94회
689
솔직히 그 상황을 무난하게 넘기기에는 사과를 받아주는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고. 어린 애랑 싸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걸 왜 받아줘!"
"하아… 됐어. 레이븐 클로?"
"…어, 어?"
팬시가 연신 옆에서 투덜거리고 다프네가 차가운 눈초리로 클로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한테 뭘 바라냐. 시어도르가 반쯤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네가 죄책감을 가지던, 사과를 하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야. 좋아, 이거 하나만 알아둬."
"……?"
"드레이코에게, 넌 빚진거야. 나중에 무슨 일이 있으면 드레이코의 부탁을 최우선으로 들어줘."
클로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조금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본다.
"그, 그러니까, 그게- 너는- 넌-"
"클로."
다프네가 생긋 웃는다.
"부담될 말은 안하는게 좋아."
"……."
클로가 발걸음을 옮긴다. 아마 래번클로 기숙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역시 다프네에게는 못 당하는건가. 나는 클로에게서 시선을 떼며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걸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응? 거의 다왔어."
"……?"
여긴 후플푸프 기숙사 방향 아니냐. 다프네가 생글생글 웃으며 과일들이 그려진 그림 앞에 멈춰선다. 아, 설마-
"부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네가 연회장에 안가서 우리끼리 찾아봤어."
"최종적으로는 스네이프 교수님께 들었지만?"
"드레이코, 네가 간다고 하니까 순순히 알려주더라고."
팬시가 당연한 듯 초록색 배를 간지럽히자 배가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옆으로 열린다.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어쩐지 분주해 보이는 집요정들이었다.
한 명이 뭔가를 만들면 나머지가 그걸 이어서 꾸몄다. 손질과 다듬기, 무엇 하나 흔들리지 않으면서 하는 모습은 약간 프로 요리사 같기도 했다. 결론은 아무도 쉬고있는 집요정이 없다는거다. 한 집요정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뜨며 다가온다. 프라이팬을 든 채로 말이다.
"도, 도, 도, 도련님들, 아가씨들!"
"…미안."
"괜찮습니다! 괜찮고 말고요!"
집요정이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안색으로 소리지른다. 아니, 이렇게 바쁠 줄은 몰랐다. 시어도르도 이건 예상 밖이었는지 입을 크게 벌렸다. 말도 안하고 온거냐. 민폐 아니냐고.
"지금 몇시지?"
"점심 연회 1시간 전."
"그러니까 이렇게 바쁜거 아니냐."
"아니, 1시간 전에도 이렇게 바쁠 줄은 몰랐지."
시어도르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팬시와 다프네도 눈썹을 추욱 늘어뜨렸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연회장에서 먹어야하나…"
"그러는게 좋지 않을까?"
"으음-"
복도를 지나갈 때도 따갑던 시선들을 연회장에서 다시 경험하기는 싫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안먹고말지. 시어도르가 한숨을 내쉬며 집요정을 바라본다.
"4명 분의 식사를 만들 수 있을까."
"물론입죠! 물론입니다! 도련님이 원하시는대로 하시죠!"
"어, 그래."
"시어도르, 친절하게."
"…고오마워, 이름이 뭐니?"
"제, 제 이름은 헤이즌 입니다!"
헤이즌이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소리지르며 무언가를 굽기 시작했다. 곧이어 맛있는 냄새가 부엌 안에 가득 찼다.
* * *
시어도르가 낯설다는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뒤에서는 다프네가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고. 팬시도 신기하게 시어도르를 바라보았다.
"헤이즌, 앞으로도 식사를 부탁해도 될까?"
"그럼요! 당연히 됩니다!"
"몇 시 쯤에 오는게 편해?"
"아, 아무 때에나 오신다면-"
헤이즌이 손사례를 치며 쩔쩔맨다. 다른 집요정들도 당치도 않다는 듯 과자나 사탕을 주며 웃었다. 시어도르가 쯧하고 혀를 찼다. 팬시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빨리."
"여, 열시 반 정도에는 한가합니다-!"
"그럼 그 때에 올게."
"다같이 부엌에서 먹자!"
의외로 식사를 안하는걸 생각해준건가. 나는 새삼스럽게 셋을 바라보았다. 시어도르가 비웃으며 나를 마주본다.
"뭘 봐?"
…아니, 자기가 먹고 싶어서 찾은 걸지도. 나는 생각을 정정했다.
* * *
4학년이 되고나서 약초학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무려 부보투버의 고름을 짜야했으니 말이다. 슬리데린들은 하나같이 그걸 싫어했고.
"스프라우트 교수님이 해그리드의 영향을 받은게 분명해."
"…해그리드 교수님도 나쁘지 않은 교수인데."
"예전에 드레이코, 너 공격당한거 기억안나?"
팬시가 씩씩거리며 소리지른다. 아니, 그것도 별거 아니었다고. 유일하게 약초학을 좋아하는 다프네만이 생글거렸다.
"고름도 나름 쓸모가 있어, 팬시."
"넌 천문학도 좋아하면서 약초학도 좋아하냐? 싫어하는게 뭐야?"
"시어도르!"
"…싫어하는 과목이 있어?"
요즘 시어도르는 바른 말 만들기에 돌입한 것 같다. 부엌에서도 그렇고 계속해서 친절한 말로 정정 중이었으니 말이다. 다프네가 후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난 비행술을 싫어해."
"뭐? 왜?"
"보는건 좋아하지만 내가 하는건 싫어."
"엑? 그랬어?"
"응."
얘기하는 동안 스프라우트의 수업실에 다다른 것 같았다. 팬시의 질색하는 표정과 함께 식물들이 빛을 내며 우리를 반겼다.
"래번클로들은 벌써 왔나봐."
"인간이 아니야."
"원래도 공부벌레들이잖아."
팬시가 여전히 잔뜩 찡그린 얼굴로 식물들을 바라본다. 다프네는 그저 웃기 바빴다. 곧이어 스프라우트가 온실 안으로 들어오자, 시어도르가 입술을 비틀며 비꼬았다.
"교수인데 왜 이렇게 늦게 오는거지. 수업을 하고 싶기는 한걸까."
"시어도르."
"…교수님이 조금 늦으셨네."
참 노력한다. 처음에 비꼬았으면 정정해도 상관없는거 아닐까. 스프라우트가 손뼉을 몇 번 치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 자. 모두 이쪽을 보려무나. 부보투버의 고름은 이 장갑을 끼고 짜야하는거 알지?"
"드레이코, 래번클로들이 너 엄청 노려보는데."
"너 래번클로 토론에서 쓰러졌다며?"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냐. 참 빨리도 퍼진다. 다프네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래번클로들은 우리 쪽을 바라보기 바빴다. 마치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감시한다는 태도였다.
"…관찰당하는 것 같아."
"완전 실례 아니야?"
"미친거지."
시어도르가 신랄하게 중얼거렸음에도 다프네는 막지 않았다. 도리어 비소를 지으며 래번클로 쪽을 바라보았다.
"어?"
"쟤 레이븐 클로인가?"
클로가 래번클로들에게 뭐라고 소리질렀다. 스프라우트의 주의도 함께 받았고. 덕분에 관찰당하는 것 같은 눈길이 분산되었다. 시어도르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인다.
"밥값은 하네. 밥만 축내고 애먼데 화풀이하는 멍청인줄 알았어."
…그거 칭찬맞냐. 다프네가 창의적으로 비꼬는 시어도르를 다시 째려본다.
"시어도르!"
"…도와줘서 고오맙군."
팬시가 옆에서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