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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지지부진(遲遲不進)
리들은 에밀리와 레베카의 사건을 묻기로 했다. 없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으나 리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그렇게 했다. 에드가가 레베카를 징계 위원회에 올리려는 것을 막은 것도 리들이었다. 에드가는 펄펄 뛰었다. 이걸 가만히 없던 일로 하자고? 너 제정신이야? 리들은 차분하게 에드가를 설득했다.
“맥밀란, 잘 생각해봐. 이 일이 공론화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결국 상처 입는건 네 여동생이야. 가뜩이나 그녀는 이미 아브락사스와의 소문으로 한바탕 몸살을 앓았어. 겨우 가라앉고 있는 소문은 다시 점화되겠지. 그걸 원해?”
리들의 말에 에드가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억울한 듯 했다.
“에밀리 맥밀란은 지금 상황도 충분히 힘들 거야. 그리고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면 이 치욕을 다시 한 번 입에 담아야 해. 정말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할 거야.”
리들의 말대로라면 이 일은 묻는 것이 현명했다. 이미 무너진 에밀리의 명예를 산산조각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윌슨은 이미 참혹한 대가를 치렀어. 올리비아가 쐈던 주문이 무엇인지는 너도 눈치 챘을 테지.”
그게 어둠의 마법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에드가는 우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윌슨에게 처분을 내리기를 원한다면 내가 더 이상 말릴 수는 없겠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에드가에게 해답을 내려준 것은 학생회실에 들어선 에밀리였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대외적으로 흐트러짐 하나 없이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격 없고 명랑하기만 하다 생각했던 그녀에게서 순수혈통 가문의 영애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리들 선배의 말이 옳아.”
무슨 수를 쓴 건지 리들은 그날 사건을 철저히 입막음 했고 지금 철저한 비밀로 봉해져 있었다. 에밀리는 리들의 수완에 감탄하며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감사합니다.”
“천만에. 이 정도 일쯤이야 후배에게 못해 줄 것 없지.”
리들의 말은 참으로 사려 깊었다. 감동할 법도 했지만 에밀리는 그를 빤히 응시하다가 자신의 오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엠(에밀리의 애칭). 이번 일은…….”
“집안에 이 사실을 구구절절 적어 보냈다며. 말포이와의 파혼에 명분이 생겼으니 그걸로 충분해. 난 더 이상 추문에 휩싸이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일이 공론화되면 나도 나지만 리브가 곤란해져.”
에밀리는 똑똑하게도 리들이 왜 이 일을 묻자고 하는 지 꿰뚫고 있었다. 리들은 눈앞의 여학생이 래번클로이며 리브의 친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분명 리브가 쏜 주문이 문제 될 거야. 나는 리브를 곤란하게 할 수 없어.”
“하지만 엠.”
“에드가 네가 원하는 건 윌슨이 대가를 치르는 거겠지만 그녀는 한순간에 리브의 어둠의 마법에 의한 피해자로 전락하고 말 거라는 뜻이야. 그리고 나는 나대로 추문의 주인공이 될 거고. 내 명예를 이 이상으로 더럽히고 싶은 거야?”
에밀리의 목소리에 날이 서자 에드가가 쩔쩔매며 그런 게 아니라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 리들 선배의 말대로 해. 그리고 혹 리브한테 따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난 리브에게 몹시 고마워하고 있어. 그녀가 나대신 그녀를 응징해주었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허튼 짓 하지 마.”
에밀리까지 이렇게 나서자 에드가는 없던 일로 하자는 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마따나 리브가 레베카를 잔인하게 짓밟아 놓았기에 응징은 충분했다. 그리고 아브락사스 역시 무시무시한 독설로 레베카를 개망신 주지 않았던가. 에드가가 가버리고 리들과 둘이 남은 에밀리가 입을 열었다.
“리들 선배의 능력은 참으로 경이로울 지경이네요. 감히 제가 무어라 평가할 수도 없을 만큼요. 오리온이 왜 그렇게 선배 말이라면 껌뻑 죽는지, 리브가 왜 선배를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는지 알겠어요.”
“과찬이야.”
뒤에 말은 깔끔하게 못들은 것으로 치부하는 리들의 매끄러움에 에밀리는 사교계에서 써먹었던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주문……. 선배가 가르친 건가요?”
에밀리는 그 경황에서도 리브의 지팡이에서 새어나온 빛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똑똑히 보았다. 크루시아투스 저주가 아닐까 싶을 만큼 레베카 윌슨은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녀는 그 후유증으로 병동을 오가고 있었고 무슨 수를 쓴건지 그녀는 왜 이렇게 됐는지 입 뻥긋도 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아마 눈앞의 청년의 짓이리라. 그리고 리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에밀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한숨쉬며 한마디 뱉었을 뿐이었다.
“리브 너무 혼내지는 마세요. 저를 위해 그런 거니까.”
*
리브는 레베카 윌슨이 아무 처분도 받지 않는 다는 것에 몹시 반발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사실 너 때문에 묻은 것이라는 말을 해주지 않은 듯 했다. 리브는 리들에게 찾아와 레베카 윌슨을 정식으로 징계 위원회에 올려 정학을 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리들은 골치 아프다는 듯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정학 당하는 게 윌슨뿐일 것 같아?”
“설마 에밀리까지 정학을 당해야한다는 거에요? 에밀리는 피해자라구요!”
머리도 좋은 애가 왜 이럴 때는 멍청한 건지. 리들은 리브가 똑똑하다는 말을 취소하고 싶어졌다.
“누가 맥밀란을 말했어? 난 네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리들의 말에 리브가 눈을 깜박였다.
“안 그래도 너한테 한 소리 하려던 참이었어.”
리브가 리들에게 따지는 모양새는 이제 뒤집혀 있었다. 리들은 리브가 어둠의 마법을 썼던 일을 호되게 꾸짖었다. 리들이 레베카와 에밀리의 사건을 묻은 것도 사실 리브 때문이 아니던가. 리들에게 에밀리의 명예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되었다. 그런 배려 가득한 행동을 한 것은 사실 리브가 얽혔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일을 징계 위원회에 회부하고 공론화 시키면 리브가 썼던 그 어둠의 마법 역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어 있었다. 호그와트에서 어둠의 마법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특히 리브가 쓴 고문 주문은 어둠의 마법 중에서도 꽤 수위가 높은, 잔인한 종류의 것이었다. 순한 얼굴로 그런 엄청난 주문을 쓰다니……. 리들은 잠깐 자신의 눈을 의심했었다.
물론 리들은 리브가 어둠의 마법을 쓰는 것 자체에는 무어라 할 생각이 없었다. 리들은 어둠의 마법에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본인 역시 심취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쓴 장소였다. 리들이 묻고, 에드가와 에밀리가 그 결정을 이해해줘서 망정이지 만약 사건이 크게 커졌더라면 리브는 그 무시무시한 주문을 함부로 남용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분명 레베카가 아닌 리브가 문제가 되었을 것이었다. 어둠의 마법은 머글식 폭력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리들이 리브를 호되게 혼내는 것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되므로.
“내가 그러라고 너한테 그 주문을, 어둠의 마법을 가르친 줄 알아?”
리브가 베리타세룸을 썼던 문제의 그날 이후로 리들은 리브에게 쓴 소리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사려 깊게 굴며 리브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좋은 말만 하고 눈감아주었다. 하지만 지금 리들에게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호되게 혼을 내며 꾸짖는 선배의 모습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리브는 당황부터 했다. 그 전에도 리들은 리브를 이렇게까지 크게 혼낸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눈물을 쏙 빼놓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어둠의 마법을 남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호그와트에서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네가 더 잘 알텐데.”
“당신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는 않아요.”
누가 누구한테 어둠의 마법 남용에 대해 거론하는 거야. 그런 리브의 생각을 읽은 듯 리들이 대꾸했다.
“나는 네가 어둠의 마법을 쓴 것 자체에 대해 무어라 하는 게 아니야. 쓰든 말든 상관 안 해. 그걸 네가 감당할 수만 있다면.”
“…….”
“난 네가 그것을 쓴 장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그 후폭풍을 너는 어찌 감당할 생각이었어?”
“…….”
“어둠의 마법은 그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써서는 안 되는 종류의 것이야. 내가 가르칠 때 여러 번 말했던 것 같은데.”
리브는 더욱 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분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평소 똑똑하게 굴더니 왜 그렇게 멍청하게 굴어.”
당황에 이어서 느껴진 것은 서운함이었다. 리들의 말은 전부 옳았다. 자신은 경솔했고 그것은 지나친 주문이었다. 하지만 리브는 거의 눈물을 쏙 빼놓을 기세로 혼을 내는 리들이 야속했다. 그래서 그녀는 날선 목소리를 내며 리들에게 대들었다.
“그럼 에밀리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 저보고 참으라는 건가요? 전 선배한테 이런 소리 들을 만큼 잘못한 건…….”
“넌 참아야 했어. 그리고 잘못 맞아. 그 정도 사리분별도 못해?”
리들의 말은 가차 없었다. 이제 리브는 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는 다시 그 때로 돌아가더라도 참지 않고 그 주문을 쓸 거에요. 내 친구를 건드렸으니까요. 지금도 저는 분이 안 풀려요.”
“그래서 네가 문제야. 왜 감정 하나 조절 못 해? 나는 이런 너에게 이성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참 이해가 안가.”
흑안과 벽안이 세차게 얽혀들어 갔다. 리들은 자신을 노려보며 날을 세우는 리브의 모습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괘씸했다.
“그리고 어디서 눈을 그렇게 치켜떠. 지금 내가 너랑 싸우는 걸로 보여? 넌 너의 그 경솔하고 무지막지한 행동으로 나한테 혼나고 있는 거야.”
이제 리들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웠고 그에 리브는 더욱 더 반발심이 든 것 같았다. 소녀는 더욱 더 청년을 노려보았다.
“이게 계속……. 내가 네 친구야? 이러니까 학생회 기강문제가 계속 화두로 오르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군.”
그날처럼 리브를 끌어안는 등의 유연한 수법으로 접근하면 좋았을 것이었다. 설사 호되게 혼내더라도 그 후에 달래고 잘 타이르면 리브는 잘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리들은 평소의 깊은 사려를 잃고 리브를 찍어 누르려 하고 있었다.
“넌 지금 나한테 혼나고 있는 거야. 태도를 똑바로 해.”
리브는 복받치는 마음에 생각나는 말 하나를 생각하지 않고 내뱉었다.
“이제 나한테도 그 비인간적인 벌을 주겠다 그건가요?”
슬리데린에서는 어둠의 마법을 남용하는 학생은 절대 용서치 않았다. 리들은 친인인 오리온과 아브락사스 역시 용서하지 않고 벌을 주었다. 리브는 그 일을 들추고 있는 것이었다. 리들이 흠칫하며 말했다.
“넌 슬리데린이 아니야.”
그리고 차갑게 한 마디 덧붙였다.
“넌 네가 슬리데린이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 네가 슬리데린이었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났어.”
그 말에 리브는 울컥한 것 같았다.
“하, 슬리데린이 아니라서? 하지만 같은 학생회 소속인건 맞지 않나요?”
리브의 목소리에는 설핏 비아냥거림이 서려있었고 리들은 그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흑안과 벽안 사이에 순간 불꽃이 튀었다.
“그래, 태도를 똑바로 하라고 했죠? 네, 원하는 대로 해드리죠.”
“…너-”
“그러고 보니 제가 제대로 된 호칭도 잊었군요, 리들 선배님.”
리브는 뾰족하게 말을 뱉었다. 리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리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말도 하면 안되는 거였나요? 태도 똑바로 할게요. 아 고개도 숙여야 하나요?”
계속해서 강도가 높아지는 리브의 이죽거림에 리들의 분위기는 더욱 더 서늘해졌다.
“뭐하세요, 벌 안주고.”
그 말에 리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겼다. 리브가 무어라 말을 뱉으려는데 리들이 빽 소리쳤다.
“이 망할 계집애야, 내가 너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청년이 성을 내며 또 한 마디 뱉어냈다.
“이 빌어먹을 계집애.”
그 말에 리브의 머릿속에서도 무언가가 뚝 끊겼다.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뇨? 전에는 그보다 더한 짓도 했잖아요!”
“뭐?”
“난 당신한테 정말 많이 당했는데. 뺨도 얻어맞고……. 아, 기억이 안 나는 건가요? 하긴 잊으라고 했었죠.”
그 말에 리들의 얼굴이 파삭파삭 굳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화가 났군요. 또 뺨이라도 한 대 때릴 생각인가요?”
“……그래도 베리타세룸을 쓴 너만 하겠어?”
이번에는 리브의 얼굴이 파삭파삭 굳었다. 그녀는 순간 얼어붙은 것 같았다.
“너야말로 기억이 안나는 건 아니지? 상대를 믿지 못하고 베리타세룸을 쓴…….”
리들은 어떤 형용사를 붙여야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악랄한 너 말이야. 내가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했는데도 너는 보란 듯이 베리타세룸을 내 차에 쏟아 부었지.”
리브는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리들이 이 얘기를 정면으로 끄집어낸 것은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리들은 절대로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둘은 이 일을 묻었고 절대로 꺼내지 말자는 암묵적인 룰을 세웠다. 하지만 리들은 어찌나 화가 났는지 그것을 깨버렸다. 사실 언젠가 깨질 그런 위태로운 것이기도 했다.
“그런 어마어마한 짓을 해놓고도 참으로……. 넌 나에게 이렇게 당당해서는 안 돼. 이 뻔뻔한 계집애야.”
리들의 독설에 리브의 푸른 벽안에는 눈물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다가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리고 리들은 그 눈물을 보고 말았다. 만약 보지 않았더라면 리들은 리브를 내버려 두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보고 말았다. 잡히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걷는 리브의 손목을 잡아챈 리들은 버럭 화를 냈다.
“울어?”
리들은 리브가 우는 것이 싫었다. 자신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은 더욱 더 싫었다. 그럴 때면 리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달래주면 좋으련만 지금 리들은 그런 유연함을 잃은 상태였다.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리들의 윽박에 리브가 빽 소리쳤다.
“그래서 그냥 가는 거잖아요!”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하늘거리는 금빛 머리칼이 리브의 고운 얼굴을 가렸다.
“그냥 가? 네가 그냥 갔어? 영악하게 나한테 일부러 눈물 보이고 간거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럼 내가 너한테 죄책감이라도 가질 거라고 생각했어?”
리들은 리브가 그런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나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리브의 눈물에 이렇게 약해지는 자신이 싫었다. 너란 여자가 뭐라고 나는 이리 흔들리나. 나에게 마음 한자락 내주지 않는 네가 뭐가 좋다고! 리들은 리브를 놓지 못하는 자신에게, 그런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리브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천만에! 미안해해야하는 것은 너지! 내가 아니란 말이야!”
리들은 사실 리브가 왜 베리타세룸을 쓴지 이해하고 말았다. 자신이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왜 믿음을 주지 못했나. 난 얼마나 더 해야했나. 리들은 이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속에 가득 무언가 얹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리들은 그 일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어쨌든 그것은 끔찍한 배신이며 기만이었다. 그리고 분노 후에 남는 것은 비통함이었다. 그것은 리들에게 큰 상처로 남아있었다. 이런 일을 당해놓고 왜 나는 너를 놓지 못하는 건지!
“고개 들어. 이제 날 쳐다보기도 싫다 이거야? 날 보란 말이야!”
그렇게 리들이 빽 소리치는데 어느 순간부터 리브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작은 흐느낌. 리들은 말을 뚝 멈췄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눈물 젖은 얼굴로 리브는 울부짖었다.
“용서했다면서요…….”
리브의 푸른 벽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대체 내가 얼마나 더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요. 언제까지 용서를 빌어야하죠?”
그것은 처연하고 처절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요. 너 따위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 말에 리들의 흑안이 떨려왔다.
“사실은 그게 당신의 본심 아니던가요?”
리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혼란스러웠다. 이해하기에 용서했다. 하지만 그 일이 리들에게 끔찍한 배신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거기다가 그 일로 인해 리브 역시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마저 깨졌다. 리들은 자신을 철저하게 불신하고 나아가 인연을 끊으려했던 리브에게 치를 떨었다. 그럼에도 놓지 못했다. 집착처럼 리브에 대한 마음은 더욱 더 질겨졌다. 그리고 리들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절대로 그녀를 끊어내지 못하리라. 차라리 내 목숨을 끊는 것이 더 빠르리라. 대답하지 않는 리들을 보며 리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 말이 맞군요. 부정조차 하지 않는 걸보니.”
여전히 리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알겠어요. 내가 어리석었군요.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는데.”
“…….”
“그동안 내가 얼마나 꼴 보기 싫었는지 알겠어요.”
리브는 리들과 관계 회복을 하기 위해 애썼던 그 시간들이 소용없었다고 결론 내리고 말았다.
“이제 다시는 당신 주변에 얼쩡거리지 않을게요. 사라져 줄게요.”
“…!”
그렇게 뒤돌아선 리브는 마치 마지막을 선언한 것 같았다. 리들은 그날의 악몽이 다시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청년은 필사적으로 리브를 붙잡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강한 악력에 리브의 고운 얼굴이 찌푸려졌다. 청년은 그대로 소녀를 벽으로 쾅 밀쳤다. 그 거친 행동에 리브는 부딪힌 몸이 아파와 고통을 호소했다. 순간 숨이 막힐 정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숨이 막혀온 것은 리들의 눈빛이었다.
“내가 말했지.”
리브가 움직이려하자 리들은 양 어깨를 붙잡아 그대로 벽에 고정시켰다. 그 무지막지한 힘에 리브가 다시 한 번 고통을 호소했으나 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욱 더 힘을 주고 으르렁 거릴 뿐이었다.
“난 절대로 널 놓아주지 않겠다고.”
리들의 어둠 같은 흑안에 붉은 빛이 감돈 것 같았다. 그것은 섬뜩할 정도의 집착과 광기였다.
“이 빌어먹을 계집애야, 다시는 얼쩡거리지 않겠다고? 사라지겠다고?”
리브의 흔들리는 벽안에 리들이 한가득 담겼다. 그 푸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흐릿하자 리들은 더욱 더 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리브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가 이렇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내가 그걸 용납할 것 같냐는 말이야!”
리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 흔들림을 멈추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너의 숨을 끊어놓으면 될까. 그럼 넌 나에게서 절대로 도망칠 수 없겠지. 순간 가학심이 치솟았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선까지 치고 올라왔다.
“넌 무조건 내 옆에, 내 시야가 미치는 곳에 있어야 해.”
“…….”
“알겠어?”
리브가 여기서 싫다고 하면 리들은 더 이상 참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는 상태였다.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망가뜨리리라. 마음껏 이 추악한 욕심을 채우리라. 다행히 리브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리들은 리브가 무슨 말이라도 하길 바랐다. 알겠다는 대답을. 사실 그것을 바랐다. 하지만 리브의 입술은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 숨소리만이 가득한 복도에서 리들은 리브를 놓아주고 떨어졌다.
“넌 끝까지…….”
리들의 흑안이 상대에 대한 집착과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래, 넌 그런 여자였지.”
놓지 못하는 내가 어리석지.
“가.”
그는 몹시 참고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정말로, 무슨 짓을 해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내가 미쳐서 너한테 무슨 짓을 하기 전에.”
하지만 리브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리들은 헛웃음을 뱉었다. 리들은 한 마디 내뱉고 돌아섰다. 그 말은 리브의 마음속에 깊숙히 침투하기에 충분했다.
“난 언젠가 이런 너 때문에 미쳐버리고 말거야.”
아니 이미 미쳐있을 지도.
*
그 후 다시 마주쳤을 때, 리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리브를 대했다. 그리고 리브 역시 그렇게 했다. 이 지지부진한 관계는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채로.
<지지부진> 마침.
============================ 작품 후기 ============================
지지부진한 관계는 결국 터지기 마련입니다. 아브엠이 그랬듯이..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어요.
답답해하시는 것 같아서 몇 마디 남기고 가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