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EEZ
‘그놈의 자존심하고는’
세상에 먹는데 부릴 존심이 어디 있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강태준은 식사에 열중했다. 잠시 후 안연복이 직접 쟁반을 들고 나왔다.
쟁반을 열어보니 새빨갛게 익은 게가 모락모락 김을 뿜으며 튼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오 이건? 꽃게 아닌가?”
“네. 이번에 연평도에서 싱싱한 게 들어왔어요.”
갓 쪄 낸 게의 배를 뜯어보니 노란 알이 가득 차 있다. 알을 한입 떠먹은 강태준이 호호 불며 게를 뜯어 내자, 이억수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참 맛있네. 지금이라도 한 끼 드시겠습니까?”
“됐어. 먹지만 말고 말을 하게. 불렀으면 논의를 할 게 있어서가 아닌가.”
“뭐, 모신 이유야 뻔하지요. 태동산업 문제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참에 싸우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나눠 먹는 게 어떨까 해서요.”
이억수가 어림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말이군. 자네와 내가 합의를?”
“그렇게 나쁘게만 보지 마십시오. 태동같이 덩치 있는 기업을 혼자 인수한다는 건 양쪽 다 부담 아니겠습니까? 단기적으로 적자 폭이 커지고 인력을 추가로 받아들여야 하니, 서로 조금씩 물러선다면 합의점을 찾을 가능성도 있을 겁니다.”
“흥, 그걸 내가 받아들이라고 보나? 자넨?”
게 내장에 밥을 비빈 강태준이 한입 베어 물고는 다시 말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시죠. 산은의 지분만 인수한다고 가정해도 2,000억인데, 무리하게 태동을 인수한다면 인수해도 승자의 저주를 피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현재 태동의 위치로 볼 때 한 그룹 산하에 들어가면 독과점 문제나 운임 관련 논란에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서로 원하는 게 다르면, 합의점을 도출하기 쉽지요. 제가 그래서 서로 어떻게 나눌 것인지 확인해 보았습니다.”
강태준이 손가락을 튕기자, 밖에서 대기하던 종업원들이 지도를 가져왔다. 대양을 펼쳐 놓은 지도 곳곳에는 빨간색, 파란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게 뭐꼬?”
“뭐긴요. 분할 매각안이죠. 이 파란 색이 여기까지가 저희가 바라는 지역입니다.”
강태준이 체크한 수역은 태평양 연안 사모아와 캄차카 근방을 포함한 황금어장들이다.
반대로 대서양 어장, 모로코 모리타니아 같은 미개척지들은 대부분 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저희가 생각한 분할안이니 깔끔히 반띵합시다. 우리가 태평양 어장을 가져가고, 그쪽이 대서양과 터미널 사업을 가져가시죠. 대신 본사는 그쪽에 양보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억수가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불합리하지 않나. 신규 어장은 차라리 자네가 가져가. 내가 미쳤나? 난 개척자 노릇은 못 해.”
사모아를 비롯한 태평양 어장은 기지도 가까울뿐더러 공장과 운반설비가 제대로 되어 있어, 현재로서는 수익성이 가장 높다. 이억수 입장에서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핵심 조업지를 두고 강태준과 어디까지 갈라 먹을지 한참을 싸웠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이 계속되자 강태준이 먼저 손을 들었다.
“자자,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안 끝나겠습니다.”
“그쪽이 욕심을 부려서가 아닌가?”
“저희가 태평양을 양보하죠. 대신 뉴질랜드 어장만큼은 포기 못 합니다.”
“뉴질랜드 수역 외에 태평양 지역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네. 대신 제가 본사를 가져가지요. 그쪽에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선심을 쓰는 듯한 강태준에 이억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무슨 꿍꿍이인가?”
“꿍꿍이라니. 무슨 소리십니까? 그럼 반대로 하시겠습니까?”
“끙. 그건 안 되지.”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는 게 현실적이라는 판단이 들었을 뿐입니다. 선택은 그쪽에 맡기지요. 시간을 드릴 테니,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 충분히 고민해 보세요.”
이미 몇 번이나 강태준에게 당해 본 경험이 있는 이억수로서는 당최 믿음이 가지 않는 듯했다.
이억수는 내심 마음이 싸했지만 강태준의 제안이 합리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혼자 결정할 수 없었던 이억수가 임원 회의를 소집했다.
“이게 논리적으로 어때 보이나?”
“저쪽이 태평양 쪽 어장을 전부 포기하고 배를 넘겨주겠다? 받아들이시지요. 이건 이득이 되는 조항입니다.”
“자력으로 전부 인수하는 건? 검토해 봤나?”
“저희가 최대 동원할 수 있는 현금성 자산이 3천억 수준인데, 산업은행이 보유한 지분 가치는 5천억 수준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어차피 혼자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크기입니다.”
“그래도 본사까지 넘겨주는 건 좀 그렇잖아.”
“미주 노선을 확보한다면 우리 쪽이 압도적으로 이득 아니겠습니까? 이건 남는 장사입니다.”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제안을 수락하라고 했다. 의심병 환자인 이억수는 뭔가 놓친 게 있나 계속 살펴봤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독소 조항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논쟁 끝에 협상이 완료되었다.
[태동산업 인수전. 백경- 발해 양자 협상, 극적 타결]
태동산업 인수를 놓고 발해원양과 백경그룹 간의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습니다. 인천시와 부산시는 무역협회, 상공회의소 등과 함께 선의의 경쟁을 펼쳐 양 회사가 국적 원양선사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이것으로 독립 이래 25년 역사의 태동산업은 역사 속으로……
백경과 발해가 협약을 체결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둘이 앙숙 관계라는 건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도 꽤나 알려져 있던 것. 기자회견장 자리, 사진을 찍는 자리에 사진사가 두 명을 사진에 담았다.
“더 가까이 붙으십시오. 그래서야 한 컷에 안 나와요.”
“이렇게?”
“예. 두 분, 웃으십시오. 스마일 아니 김치!!”
이억수의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강 회장, 내가 꼭 이래야 하나?”
“쇼입니다. 웃으십시오. 웃으면 주가가 오를 겁니다.”
그 말에 강태준과 마주한 이억수가 억지로 웃음을 어색한 지어 보였다. 찰칵 소리와 함께 셔터가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강태준이 속삭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 회장님.”
“허허. 본인이나 잘하게나. 어차피 다시 볼 일 없을 테니.”
“허허.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이억수는 악수한 손아귀의 힘을 꾹 눌렀다. 인수를 허가하는 건 산업은행이다.
정부에서 바라는 예쁜 그림에 맞추려면 대충 명목상으로는 협조해야 했다.
강태준은 대서양 노선을 인수하는 즉시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갖추기 위해 태동수산과 기업합병을 완료하고, 법인의 변경 사항을 등기하기로 했다.
“선박 관리 쪽 인력은 새로 뽑았나?”
“예. 이미 선발했습니다.”
“북미 서안 항로부터 개설해야 하니 벤쿠버랑 시애틀 쪽에 접선해 보게. 컨테이너 원양선사 쪽에 연락하게. 우리한테 터미널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어봐. 공동 운항을 하면 아무래도 운임에 이득을 보지 않겠나?”
“옙.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오 사장은?”
“출장 중입니다. 아무래도 통조림 공장 재건부터 서둘러야 할 것 같다 하시더군요.”
간만에 매우 바빠진 오재갑은 얼굴을 비출 틈도 없었다.
이사 준비하랴, 부서 옮기랴. 한시도 쉴 틈 없이 돌아다니는 인력들에 혀를 내둘렀다.
“아주 일 폭탄이 떨어지는군요. 그냥.”
“하하. 각오한 일 아닌가? 이만하면 양호하지.”
“그러게요. 전체적으로 나쁜 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태평양과 미주 지역을 그렇게 양보한 건 좀 아쉬운 거 같습니다.”
전체 어장 규모로 치면 7 대 3 정도로 나눠 가진 셈이니 여러모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신규 어장에 배를 대고 육상에서 운송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야 했던 만큼 내부적으로 불만이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정을 익히 아는 강태준이 빙그레 웃었다.
“아주 양보한 건 아니지. 우리가 먹은 지역은 잠재력이 큰 지역이야. 사실 누가 이득인지는 두고 봐야 알걸?”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 차분히 알게 될 테고. 자, 농땡이 치지 말고. 어서 일해라 핫산!”
해외 터미널을 인수하고, 물류기지를 구축하기까지. 일이 산더미처럼 남았다. 그렇게 백경에서 중국 및 중동 노선을 새로 개설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사이, 발해원양의 조업은 순풍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조업 3개월 차, 사모아 앞바다, 발해원양의 배 뒤로 뒷동산처럼 부풀어 오른 파도 사이로 시꺼먼 물체가 불쑥 떠올랐다.
“하하! 또 혼마구로입니다!”
“이거 아주 미쳤구만.”
한가득 올라오는 참치 떼가 순식간에 어창을 가득 채우자, 선원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그물에 잡힌 것은 한 마리에 1톤이 넘는 진짜 마구로였다. 배때기에 토실토실하게 기름기가 껴 있었다.
“백경 놈들, 아주 헛똑똑이군요. 이렇게 좋은 어장을 순순히 내주다니.”
“강 회장이 오랫동안 배를 안 타다 보니 감이 죽었나 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어장을 어떻게 양보하겠습니까.”
“그러게. 내 걱정이 기우였나 보군.”
송규익은 내심 찜찜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강태준 밑으로 들어가기는 영 껄끄러웠기에 이억수의 제안을 받아들인 참이었지만, 내심 강태준이 왜 양보했는지 의아했던 것이다.
“이렇게 순조롭다니. 뭔가 운이 트이려나 봅니다.”
“양 선장님이 하늘에서 굽어살펴 주신 게지.”
적재한 어획량이 30만 불은 넘을 듯하다. 양재문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직도 아리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집에 도착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이대로면 보합비를 두둑하게 챙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선원들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다음 순간 산산이 깨어졌다. 회선하는 길 경비정 하나가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비정은 발해원양의 배를 본 즉시 다가오더니 검문에 나섰다.
“여기는 코스트 가드. 여기는 우리 미합중국의 영해다. 귀선은 우리 영해에서 불법 조업을 하고 있으니 수색에 협조할 것을 명한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언제부터?”
어안이 벙벙해진 선원들이 웅성거렸다. 갑자기 영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펑!!!
배가 멈추지 않자. 그쪽에서 경고성 발포음이 들렸다.
“어어!! 쐈어! 진짜로!!”
“스탑, 도주하지 마라. 순순히 협조하면 다칠 일은 없다.”
경비정의 협박에 포격을 들은 원양어선은 속수무책으로 억류되었다. 이유는 해역에서 불법 조업을 한 혐의. 선원들과 함께 구류된 송규익은 수산청에서 석방 조건으로 본사에 거액의 벌금을 요구하기로 했다는 말에 기가 찼다.
“아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우리는 엄연히 허가를 받고 조업을 시작한 겁니다!”
“그거야 그쪽 사정이고. 규정이 바뀌었소. 우리는 정부의 방침을 따를 뿐이요.”
사유를 알아보니, 기가 막혔다. 미국과 소련, 캐나다가 유엔해양법회의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EEZ를 기습 선포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인 통보에 자유 조업 하에 있었던 한국 트롤 조업선들은 일제히 어장을 상실하거나 강제 쿼터를 배정받은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미-한 어업협정에 의해 새로 배정받은 쿼터는 종래 어획량의 15~20% 수준에 불과했다.
관중석에서 눈먼 공을 얻어맞은 꼴이 된 이억수는 곧장 미국으로 날아가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오히려 벌금이나 내라는 통보뿐이었다.
“벌금이 한 척당 20만 불이라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당신은 우리 영해를 침범했소. 모르시나 본데, 이곳 영해선은 22일 자로 수정되었고, 우리는 즉시 그 사실을 모든 나라에 통보했소이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의에 누가 동의했소이까?”
“그쪽의 동의는 필요 없소. 불만이 있으면 소송을 하든가. 정식 절차를 밟으시길.”
수산청이 아주 노골적으로 나오자, 이억수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바싹 약이 오른 이억수가 외교부를 통해 정식 항의서까지 넣었으나, 미국의 입장은 완고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이억수가 항의할수록 공무원들은 더 세게 나갔다. 기념품으로 가져갈 상어 이빨이나 조그만 산호 조각 하나라도 걸리면 무조건 건당 2만 불씩 벌금을 때려 버린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