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사나이의 유산
강태준이 편지를 펼쳐 보았다. 삐뚤빼뚤 익숙한 필체에, 강태준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악필이시구먼.’
경상도 사나이가 투박한 글씨로 꾹꾹 눌러 쓴 편지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거기는 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말과 함께 회한과 당부와 부탁이 붙어져 있었다.
-이 나이 먹고 돌아보니, 모든 게 덧없더군. 자네도 너무 열심히 살지 말게. 일도 좋지만 건강이 최고야. 그리고 가족한테 잘하게.
강태준은 내심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간 대립한 일도 있고 서운한 점도 많았지만 어찌 되었든 양재문은 그에게 스승 같은 존재이지 않았던가.
지금껏 배를 타면서 불의의 사고고 잃은 동료가 적지 않았지만 이렇게 알고 있던 사람이 하나씩 떠나가는 일은 좀처럼 익숙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강태준이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다. 헤어지기 전 당부의 인사를 하며 명함을 건넸다.
“형수님, 언제든지 필요할 때 연락 주십시오.”
“고마워요.”
양재문의 부인은 조의금을 사양했지만 그것까지는 사양하지 않았다.
사람은 떠나도 기업은 남는다.
하지만 양재문이 떠나고 난 뒤의 태동산업은 그야말로 격동에 휩싸였다.
사실 태동은 고유가로 인한 경쟁력 약화. 과거에 무분별하게 체결한 용선 계약에 발목이 잡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 그런데 대형 선망선 한 척이 유실된 것도 모자라, 선원 다수가 사망한 것은 회사로서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한 임원들은 십시일반으로 남은 돈을 긁어모아 위로금을 지급했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양재문이라는 거물이 사라지자, 이미 자본 잠식 상태에 도달한 태동산업에 대해 산업은행과 금융당국이 회생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파산 위기에 몰린 태동산업에서는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정부에서도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채권 만기 연장은 어렵다고 합니다.”
“아니, 이제 곧 원양어업 업사이클링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포기하다니요. 여기서 그만두면 터미널은 물론, 캐나다 북펀들랜드 어장에 가지고 있던 지분도 헐값에 넘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법정 관리를 시작하면 그때는 회생 불능입니다. 20년 동안 쌓아 올린 인프라가 모두 무너지면 껍데기만 남게 될 겁니다.”
“일단 자구책부터 써 보지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뒤를 걱정할 상황이 아닙니다.”
상황은 심각했다. 정부의 지원이 없으면, 위기를 넘길 수 없을 만큼 경영 상황이 악화되었지만 송규익을 비롯한 임원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양재문이 목숨을 걸고 지킨 태동산업을 버릴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채권단을 설득하는 한편으로 태동을 살리기 위해 서둘러 인수 후보군을 찾아 나섰다. 자력으로는 도저히 생존이 불가능하니, 빠른 시일 내에 매각을 진행해 기업 결합을 완료하겠다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분위기는 몹시 차가웠다.
-산업은행, 태동산업 정부 지분 매각. 흥행 가능성은?
-최초의 원양선사 태동산업 매물로, 업계에선 우려 많아.
태동산업이 홍역을 치르는 동안, 주 채무자인 산업은행이 이미 매각 절차를 시작했다는 소리가 증권가에 돌고 있었던 것이다.
“태동을 매각한다고? 얼마나 자금 사정이 안 좋길래.”
“예. 아무래도 투자를 너무 많이 한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법정 관리 이야기까지 나왔답니다.”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
그러자 서류를 살펴본 오재갑이 대답했다.
“단기 유동성 문제 같습니다. 수익률이 6.5% 수준이니 나쁘지 않지요. 빚만 제외하면 태동산업이 보유하고 있던 1,000톤 이상 선망선은 무려 30척입니다. 조업선들은 성능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니 말입니다.”
“흠. 그래? 짠돌이인 자네가 그렇게 평가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호의적으로 보는구먼.”
“애초에 태동산업은 실속 있는 기업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벨류에이션을 어떻게 정할 것이냐 아니겠습니까? 딸린 식구도 한두 명이 아니고, 평가액이 적정한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사실 없으니까요.”
“맞습니다. 솔직히 자금이 얼마나 있느냐가 문제겠지요.”
태동의 사정을 깊이 알아가면 갈수록 강태준은 안타까움이 더했다. 사실 태동이 아무리 적자라도 투자의 방향성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양재문도 바보가 아니었고 원양어업에서 리스크가 크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무리를 하더라도 물류 쪽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규모도 사실 엄청났기 때문에 롱비치항 쪽 터미널 사업이나 컨테이너 사업에 투자한 금액이 있으니, 몇 년만 허리띠를 졸라매고 버텨도 해운 쪽으로 제대로 입지를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기획안을 구상한 사람이 이미 저세상으로 가 버린 뒤였다.
‘사업은 전부 타이밍이야. 아무도 그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지.’
투자 리스크가 큰 만큼 한번 삐끗하면 나락이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강태준이 우려했던 이유가 그거였다. 이미 물밑에서는 인수합병을 염두에 두고 잠재 인수 후보들이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미, 천진과 발해 등 대기업들은 이미 노골적으로 인수 의지를 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장을 맡은 배춘삼이 고개를 저었다.
“인수만 한다면 떡상은 불문가지인데. 참 아쉽네요.”
“어이구. 우리에게 그럴 여력이 어디 있나? 지금 먹은 것도 소화하는 데도 힘든데.”
“그러게. 아쉽네그래.”
진한 아쉬움을 보이는 춘삼이와 달리 겉으로만 아쉬워하는 녀석들이 많았다.
광필이가 눈에 띄게 안도하는 것을 본 그걸 본 강태준이 피식 웃었다.
“어이. 다들 왜 이러시는가. 아직 포기 안 했어.”
“설마 또 인수전에 참가하시려고요?”
“혼자는 좀 벅차도, 부산시랑 공동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인수하면 되지. 항만공사랑 FI를 끌어들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겠어?”
그러자 광필이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이번 인수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덩치도 그렇고, 이건 자칫 잘못하면 유동성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저도 이번만큼은 동감입니다. 일단 태동은 여명통운과 그 규모 자체가 달라요. 인수를 해도 사후처리가 문제 아닙니까. 임원진 구성부터, 정상화까지 난관이 많습니다.”
태동산업은 거의 십수 년간 한국 원양어업 업계에서 1위를 고수해 온 기업이었다. 단일 규모로 보면 이보다 큰 회사는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덩치가 큰 만큼, 일단 그만한 회사를 삼키려면 엄청난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뭐, 우리가 전부 다 먹는다는 게 아니야.”
“그러면요?”
“쪼개서 파트별로 인수할 수도 있지 않겠나. 어차피 태동이라는 덩치를 혼자 삼키기에는 어지간한 그룹들도 부담이 될 테니 말이야.”
태동이 보유하고 있는 선망선은 여명통운처럼 단순한 조각배 같은 게 아니다. 한 척에 적어도 수백만에서 수천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배들이 아닌가.
선복량이 증가하는 추세에, 이런 규모 있는 선박의 가치는 계속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빚은 조정을 통해서 삭감하면 되지. 그 부분은 협상하면 돼.”
“하지만 채권단에서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
“일단 산업은행 쪽에 의견을 타진해 보자고. 어차피 그쪽도 제값을 받고 팔고 싶을 것 아닌가.”
해운업 주무 부처인 해양수산부를 통해 물밑에서 협조를 요청했다. 해양수산부는 처음에는 단일 매각으로 원양선사를 끌고 가자는 기류가 강했지만, 강태준의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산업은행은 오일값 상승과 태동의 규모로 볼 때 단일 인수 시 향후 사업 전망도 낙관하기 어렵다는 부분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기사가 떴다.
[최국진 산업은행 회장, 태동산업 분리 매각 등 다양한 처리 방안 검토]
-태동산업의 최대 주주인 산업은행에서 정부 정책과 시장을 고려해 분리 매각을 할 예정으로 공시했습니다. 원활한 인수합병을 위해 보유 지분은 단계적으로 처분할 것임을……
-산업은행은 관계자는 근본적 경영정상화를 위해 능력 있는 민간 투자자에게 매각하는 것이 낫다는 데 의견을 모으기로 했다고……
실탄을 쥔 채 매각 절차가 진행되기만을 기다리던 이억수는 뜻하지 않은 기사 발표에 인상이 굳어졌다.
“입찰 직전에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럼 매각 시기는?”
“그게……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일단 이번에 침몰 사건과 관련해 손해 규모를 구체적으로 산정하고 손실 회복 계획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군요. 구체적인 회계 법인에서 감사를 거쳐 확정하겠다고 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야. 이미 손실 계산은 끝났잖아?”
“오일 가격 급등으로 경영 불확실성 지속이 우려되는 상황이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라는군요. 아무래도 신중해야 한다고…….”
이억수는 머리를 굴렸다. 산업은행의 공시대로 단계적으로 매각 절차가 진행된다면, 태동을 일거에 인수하기 힘든 그룹들도 인수전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오매불망 태동 매각만 기다리던 이억수로서는 전혀 달갑잖은 소식이었다.
“이거 분명히 어떤 자식이 수작을 부린 거야. 누가 이런 맹랑한 짓을 한 거지?”
“추측건대 아무래도 백경 측에서 나선 것 같습니다.”
“강태준이 또 그놈인가? 욕심 많은 놈 같으니라고. 그놈은 지치지도 않나?”
여명통운을 인수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는 또 태동에까지 탐을 낸다는 말인가. 씨근덕대던 이억수가 성질을 부렸다.
“여기서 또 물러설 수는 없지. 인천중공 쪽에 연락해. 인천시장과도 미팅 잡고.”
“그러면 판이 커지는데요. 정말 계속하실 겁니까?”
“강태준이 다 먹게 놔둘 수는 없지 않나. 채산성을 확보하려면 우리도 덩치를 키우는 수밖에 없어.”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이번 판만큼은 질 수 없다. 이억수는 투지를 불태웠다. 원양어선 회사들이 합종연횡을 이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만한 매물이 다시 나오리란 걸 기대하긴 어렵다. 이억수는 결의를 다졌다.
인천시가 컨소시엄에 합류하자, 대결은 인천시-인천중공-발해원양 대 부산시-부산항만공사-백경통운의 대결로 치달았다. 이에, 정부가 누구를 선택하고 집중할지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선복량이나 영업망, 인적 네트워크, 글로벌 경쟁력 등을 고려할 때 양측의 세력은 용호상박.
거기에 천진그룹까지 가세하자, 경쟁이 과열되어 태동산업의 몸값도 천정부지로 솟구쳤다.
“강태준 회장이 만나자고 합니다.”
“그놈이 또. 또 어떤 구라를 까려고”
내키지 않은 이억수가 툴툴대었지만 피할 도리가 없다.
이번만은 속지 않겠다 비장한 각오를 마친 이억수가 용화루에 도착하자, 대기 중이던 강태준이 천연덕스럽게 자리를 권했다.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됐고, 식사할 기분이 아닐세. 거두절미하고 묻지. 날 왜 불렀나?”
그간 서로 치고받은 전적도 있고 갈등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 않나. 갈등의 골이 깊어진 상황인 만큼, 이억수도 이제는 예의 따윈 집어던진 듯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강태준은 도리어 여유로웠다.
“하하. 까칠하게 구시긴. 서로 합의점을 찾자고 불렀지요. 그럼 전 아직 식사를 안 해서 뭐라도 시켜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잠시 후, 종업원들이 음식을 대령했다. 마침 기름에 얹은 생선부터 방어회, 천엽, 새우튀김, 전복밥, 콘치즈와 단호박, 골뱅이무침, 고구마맛탕, 계란찜, 생굴 같은 자잘한 메뉴가 끊임없이 나왔다. 끊임없이 음식을 흡입하는 강태준의 모습에, 보다 못한 이억수가 성질을 부렸다.
“거 참, 많이도 먹는군. 걸신이라도 들렸나?”
“근래 들어 식이조절 중이라 두 끼밖에 안 먹거든요. 입맛도 돌고 좋네요.”
이억수의 비아냥에도 강태준은 꿋꿋했다. 이억수는 솔직히 짜증이 치솟았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거절했지만 강태준이 하도 맛있게 먹다 보니, 이억수도 괜히 식욕이 돋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달라는 건 너무 없어 보이지 않는가.
배고픔을 꾹 참은 이억수는 애꿎은 찻물만 들이켰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