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시카고 아레나
그걸 본 방정남의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 옆과 시선을 교환했다.
‘저놈들 혹시…….’
이미 동료 역시 눈치챈 듯 눈빛이 변했다. 통조림을 손에 쥔 방정남이 눈치를 살피는 사이 멀리 떨어진 녀석이 수신호를 주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눈치를 챈 대원들이 슬그머니 접근할 무렵, 스타킹을 뒤집어쓴 괴한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put your hands up!”
녀석이 천장을 향해 발포하려는 순간. 전시에 수류탄을 던지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풀스윙으로 날아간 통조림이 머리통을 정통으로 직격했던 것.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을 맞은 녀석이 기절하자, 곧바로 한쪽을 밀어 버리는 동기 녀석. 우당탕 소리와 함께 산처럼 쌓인 통조림이 떨어졌다.
그리고…… 뒤늦게 들어오던 강도가 머리통을 겨누는 총기를 보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What?”
[웨일 마트, 3인조 강도단 긴급 체포!]
체포된 강도단에 대한 소식이 지역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아니 셋이서 할인점에 침입해 TV를 훔치려고 했다는군.”
“간 큰 놈들일세. 세상에 특수부대원이 즐비한 곳을 털려고 하다니.”
당연하겠지만 강도를 잡은 백경그룹 사람들도 인터뷰 대상이 되었다.
“대단하군요. 방정남 씨. 그래서 지금까지 꼬박 10남매에게 돈을 부치면서 살아오셨다는 겁니까?”
“네. 능력도 없는 제가 백경그룹에서 이렇게 채용해 주신 덕분에 이렇게 기회를 얻었습니다. 여러분. 웨일 마트로 오십시오. 여기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판매점입니다.”
지역 신문 한구석에 방정남의 약력이 실렸다. 라디오에서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밥 먹고 살기 위해 군에 참전했던 시절부터, 무공훈장을 받고 은퇴하기까지. 전쟁 후 일상으로 복귀해 꿋꿋이 살아가려는 남자의 삶이 심금을 울렸는지 각지에서 격려의 편지가 쇄도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웨일 마트는 갑작스럽게 성수기를 맞았다.
“아니 다들 왜 이래? 이거 무섭게.”
무섭게 몰려드는 사람들 덕에 눈코 뜰 새 없어진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로빈 장이 처음 있는 일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방 사원한테 고마워해야겠구먼. 포상 보내고 매니저로 승진시켜야지.”
“네 입사한 지 고작 2개월 된 초짜를 말입니까?”
“그러면 마트를 구한 영웅한테 그냥 입 닦고 끝은 너무하지 않나.”
강태준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홍보효과를 얻은 만큼 돈이 아깝지 않다. 두둑한 포상과 더불어 방정남은 돈방석에 앉았다. 바른생활 사나이에 가까운 삶 덕인가.
완전히 스타 반열에 오른 것이다.
미국 현지에서도 이번 활약을 기꺼운 눈으로 보았는지 호평일색. 명예 시민을 줘야 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무엇보다 시민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섰다는 점이 큰 가점이 된 것이다.
덕분에 용감한 시민 표창을 받은 방정남에게 각지에서 러브콜이 쏟아진 것이다.
“그 자식 부럽구먼. TV출현에 완전 인생 역전 아닌가. 나도 그때 있었어야 했는데.”
“부럽긴 뭐가 부러워. 이놈들아 또 농땡이 까나!”
“아닙니다.”
“잿밥에만 관심이 많아서는.”
“그보다 주문 물량이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마트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지자 고객들이 몰려들었다. 백경에서 공급한 생필품도 꽤나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인지도를 쌓았다.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있는 법이라고 시카고 소재의 다른 유통업체들에게도 비상이 걸렸다. 웨일 마트가 등장하면서 다른 할인점들의 매출에 악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강력한 경쟁자의 급부상에 골치가 아파진 L마트에서는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빌어먹을 원숭이 놈들. 아주 징글징글해요?”
“젠장, 그러니까 미리 막았어야 했다고 하지 않았소.”
“설마 이리 선전할 줄은 몰랐지 그래.”
“그럼 저 꼬라지를 보고 있어야겠나? 우리 매출이 반토막이 났는데 무슨 수를 써야 할 것 아닌가?”
“아니 뭘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방법이 있지 말입니다. 엿 먹일?”
며칠 후 웨일 마트 할인점에 때아닌 전화기가 울렸다.
“외벽타일 주문 가능합니까?”
“얼마나요?”
“한 200장 정도.”
“그 외에 포셀린이랑 마감재 있습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갑작스럽게 시공업자들로부터 욕탕용 타일 주문이 몰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늘어난 발주량에 놀란 웨일 마트에서 이유를 수소문하자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리모델링 사업?”
“그게. 뉴욕 브롱스 양키 스타디움에서 리모델링을 진행할 예정이라네요. 노후한 바닥재를 대거 교체하고 외관을 타일로 바꾼다고요. 거기 자극을 받았는지 시카고 아레나에서도 재개축 일정이 잡힌 듯합니다.
“양이 얼마나 필요한데 그럽니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로빈 장이 잠시 양을 가늠해 보았다.
“글쎄요. 그쪽이 규모가 꽤 커서, 예상컨대 10만 장은 족히 필요할 거 같다는군요.”
“10만 장? 엄청난 물량이네요.”
“거의 1만 5천 명 이상 수용 가능한 크기니까요. 그래서 지금 업자들이 호재라고 난리입니다. 주문은 넘치는데 각지에 재료가 없어서 말입니다.”
양키 스타디움에 모든 물량이 몰린 마당이라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너무 좋은 조건에 강태준은 의심이 들었다.
“흐음. 물량을 더 늘리라니 이거 확실한 건가?”
“뭘 망설입니까. 일단 수주를 받아야지요.”
“맞아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기회는 잡아야 하는 겁니다.”
로빈장의 독촉에 결국 고민하던 백경에서도 결단을 내렸다. 일단 수주 물량을 되는대로 받기로 정한 것이다. 주문량은 거의 3만 장.
밤잠을 새워 가며 구워 낸 타일은 차곡차곡 화물선에 쌓여 항구로 향했다.
그러나 겨우 납기일에 맞추어 확보한 물건이 배에 실려 오는 중에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항구까지 배송을 끝마칠 무렵, 급 시공 취소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린가? 지금 타일이 배송 중인데?”
“그게 체육관 사정이 바뀌었답니다. 주총에서 반대 의견이 나오는 바람에 재개축을 당분간 보류랍니다. 아마도 발주한 물량을 일괄 취소할 거 같습니다.”
“아니 뭔 소리고. 지금 와서 취소라니. 우리는 어쩌라고. 계약금 입금한 거 홀딩했어?”
“그게 입금액이 사실 10만 불도 안 됩니다.”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사실은.”
실적에 눈이 먼 영업직원들이 마구잡이로 외상 수주를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거기에 공사가 취소되자 중소 시공업자들의 경우들을 아예 잠적을 타거나 배 째라고 나오고 있었던 것. 어이가 없어진 강태준은 기가 막혔다.
“그래서 계약금도 안 받고 수주한 게 절반이 넘는다?”
“저희도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줄은…….”
전부 악성 재고로 남을 수밖에 없다. 버벅대는 로빈 장의 변명에 강태준은 짚이는 감이 있었다.
“이거 누가 수작질을 한 것이 확실하군.”
“설마요?”
“아니 이런 건 십중팔구 경쟁자일 확률이 높아.”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기 직전, 마침 기다렸다는 듯 방문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방문을 요청한 상대는 L마트 지점장인 매니 팩슨. 사무실을 들어온 녀석이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엄청난 부자라고 들었는데 사무실이 되게 소박하시군요.”
“쓸데없는 데 돈 낭비 안 하는 주의라. 애초에 사무실만 삐까뻔쩍하다고 돈 버는 게 아니죠. 한데 갑자기 여기는 어인 일로?”
그러자 손에 든 선물꾸러미를 내려놓은 매니 팩슨이 모자를 벗었다.
“아이구. 일찍이 인사를 드려야 했었는데 늦었습니다. 듣자 하니 타일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으시다면서요? 그래서 왔습니다.”
“아니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깐죽거리는 매니의 말에 떨떠름해진 강태준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그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그 정도 정보력도 없어서야 어떻게 유통을 합니까? 허허. 그보다 어쩝니까 쯧쯧. 3만 장이 넘는 타일이 죄다 쓰레기가 되어 버려서.”
“뭐 제품이 하자가 있어서라기보다 아직 거래처를 정하지 못한 것뿐이죠.”
“허허 규격대로 나온 물건을 어떻게 말입니까? 한 3년 뒤? 그만한 물량을 처리하려면 무지하게 힘이 들 겁니다. 보관료만 어마어마하게 나갈 텐데요.”
마치 네가 어쩔 거냐는 투다. 특히 시멘트와 마감재의 경우에는 3개월 이상 보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에 강태준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래서요? 절 대신 걱정하시는 겁니까?”
“예. 그래서 제안을 드리러 왔습니다.”
“무슨 제안 말입니까?”
“이번에 배송된 타일을 저희 회사에서 톤당 200불에 인수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거죠.”
“뭐라고요?”
“아무래도 여분의 창고도 있으니 폐기물 처리 비용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 말입니다. 저희로서는 나름 큰 결심을 한 겁니다.”
마치 선심을 쓴다는 듯 지껄이는 투에 표정이 굳어진 강태준. 이쯤 되면 아주 놀리러 온 것이 아닌가? 정색한 강태준이 곧바로 정문을 가리켰다.
“나가십시오. 당장.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허허, 빠르셔라 생각 바뀌면 연락 주십시오.”
뒤늦게 알아본 바 결과는 확실했다. L마트에서 시카고 아레나 운영진과 막역한 관계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강태준을 엿 먹이려고 벌린 짓이 확실하다. 광분한 광필이가 콧김을 뿜었다.
“이런 시밤바를 봤나? 그러니까 우들을 엿 먹인 거라굽쇼.”
“워워 흥분하지 말고. 놈들이 일부러 발주를 취소했다는 걸 입증할 방법이 없지 않나. 게다가 직접 나선 것도 아니니 말이야.”
“그럼 이걸 그냥 둡니까?”
“열받을 시간에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수만 장의 타일을 당장에 처리할 곳이 없으니 이대로 쥐고 있다간 적자가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는 말인가.
함께 온 엄청난 양의 욕실 자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강태준. 그때 화가 난 복만이가 툴툴대며 들어왔다.
“이런 스벌…… 이런 그지 같은 놈들 같으니라고.”
“왜 그래?”
“대중탕 갔다가 기분만 잡쳐서.”
“손님을 안 받는대요. 노랭이는 안 받는답니다.”
“아니 아직도 그런 놈이 있나 그래?”
“그래서 주인장 나와 보라 했더니 까망베르 같이 텁텁하게 생긴 놈이더군요. 얼굴에 땀이 가득한 것이 영 찝찝해서리. 그냥 왔습니다.”
뭔가 아래위로 내려다보는 것이 찜찜해서 그냥 왔다는 것이다.
“잘 안 갔어. 거기서 비누 안 주운 것만 해도 다행이지.”
“덩치에 쫄아 놓고는 헛소리는. 그리고 내가 문제냐 네가 문제지.”
“아니, 시방 그게 뭔 소리여? 그럼 댁은?”
둘이 투덕거리는 것을 듣던 강태준이 뭔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때밀이 수건과 타일 그리고 비누라…… 뭔가 조합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타일을 모아서 사우나를 만드는 게 어떤가?”
“사우나라면?”
“불가마와 불한증막 같은 찜질방 시설을 만드는 게 어떤가 그래?”
방향성이 다르긴 하지만 온천을 운영하고 있는 강태준으로서는 그닥 새로울 거 없는 구상이었다. 일종의 황토방에 휴게시설을 갖춘 공간을 만들자는 구상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재활용이긴 한데 먹힐 거 같긴 하네요.”
“아니 뭐 그렇긴 한데, 그게 통할까요?”
“대중탕은 세계 보편적인 정서 아닌가. 러시아나 핀란드 같은 데서도 인기니 딱히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
보관할 곳도 없는 타일을 어째야 할지 고민할 바에야 아예 도배를 해 버리는 게 낫지 않나.
결단을 내린 강태준은 빠르게 건설 작업에 착수했다.
웨일 마트 주변의 건물을 인수해 곧바로 증축을 시작했다. 남녀별 욕탕과 휴면실을 별도로 마련하고 황토방과 불가마 시설을 확충하기로 한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