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클로렐라
연질 캡슐을 씌우는 방안은 설비도 아직 마땅찮을뿐더러 단가가 올라가기 때문에 국내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기호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판매는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노기철 쪽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가 나왔다.
“캡슐화 전에는 영양제로는 좀 못 써먹을 거 같고. 그냥 수질 개선용으로 쓰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럴 거 같으면 시작도 안했지.”
강태준도 오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간 맛없는 제품만 먹다보니 영 거시기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은 짼다.”
“네?”
“입맛 배렸으니 바람이라도 쐬야지. 너도 휴가 갔다오.”
극구 따라오겠다는 춘삼이를 떼어 놓고, 하도 맛없는 것을 먹다 보니 아무래도 당분을 섭취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바람도 쐴 겸 백화점 식당가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보지 못하던 브랜드가 보였다.
‘생각보다 운영을 잘하고 있군.‘
열대과일부터, 케이크 같은 디저트 류도 간간히 보인다. 한쪽에서는 갓 구운 빵들이 진열되어 있고 시식대에서 즉석 조리한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그렇게 뭔가 먹을 것이 있나 주위를 둘러보던 중, 식당가에서 떼를 쓰는 아이를 우연히 마주쳤다.
“당근 싫어 당근 싫다고!!”
“때찌!! 엄마가 당근 안 먹으면 키 안 큰다고 했지. 얘 좀 봐? 공공장소에서는 조용히 해야 착한 아이지?”
계속 울음을 터트리던 아이가 땡깡을 부리자 품에서 사탕을 꺼낸 어머니. 불만 섞인 얼굴을 했지만 밥 다 먹고 준다는 소리에 곧 고개를 처박고 식사에 열중하자 강태준이 뭔가 깨달은 점이 있었다.
‘그래, 어차피 맛없는 걸 맛있게 만들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지. 공략 대상이 틀렸어.’
굳이 애가 먹고 싶지 않더라도 부모부터 공략하면 되지 않나.
자기가 생각한 아이디어에 자뻑한 강태준이 썰을 풀어놓자 해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부모한테 광고를 하자고요?”
“아니, 광고를 하지 말자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이렇게 맛없는 걸 광고를 했다간 되려 역효과가 일 거 아닌가. 차라리 약이라고 몰래몰래 파는 게 나아.”
“약이요. 엄밀히 따지면 약은 아닌데?”
“뭘 그렇게 따지고 그러나. 키 크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맞잖아. 맛은 없지만 몸에는 좋다는 식으로 희소성을 강조해서 말이야.”
실제로 남자한테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니 하는 대사가 대히트를 친 전적이 있지 않은가. 아이들만큼이나 부모에게 민감한 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략적으로 방침을 강태준은 몇 개 대형 약국들에 의사를 전달했다. 신제품의 효능과 용도를 설명한 다음 요구사항을 전달받은 약국들이 되물었다.
“고작 열 개요?”
“네. 더도 덜도 말고 한 달에 딱 열 개면 됩니다. 목표치를 달성하기만 한다면 저희 회사에서 만든 구충제와 분유를 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겠습니다. 다만 더럽게 맛없으니 클레임을 받지 않게 주의하십시오.”
“흐음…… 10개라…… 알겠습니다.”
심지어 건강에 좋다는 보약치고는 그리 비싼 가격도 아니지 않은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한 약사들은 별생각 없이 승낙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약국에 찾아온 단골 고객에게 하소연했다.
“우리 아들이 요새 키가 안 커서 참 걱정이에요. 우유니 장어니 몸에 좋다는 건 다 고아 먹이는데 잘 크지 않으니. 또래 애들보다 10cm나 작다지 뭔가요?”
“저런 저런. 어떻게. 걱정이 많이 되시겠어요.”
손님 한탄 들어주는 데 도가 튼 약사는 적절하게 추임새를 넣는 동시에 종종 오는 꼬마를 떠올렸다. 덩치를 떠올리니 과연 부모가 걱정할 만도 하지 않나. 마침 신제품을 홍보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약사가 조심스럽게 제안을 올렸다.
“그러면 현이 어머님. 이런 걸 먹어 보시는 건 어때요?”
“뭐에요 그게?”
“자자. 쉬쉬. 현이 어머님에게만 소개시켜 드리는 거예요.”
조심스럽게 꺼낸 것은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포장에 담긴 물건이었는데 금박으로 grow up이라고 적힌 캡 위에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당신의 키는 안녕하십니까?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바꿉니다.
“이게 뭔가요? 설마 키 크는 영양제?”
“네 이번에 들어온 제품인데. 클로렐라라는 거에요. 완전단백질 제품인데 성장 인자가 들어 있는 제품이라 아이들 성장 발육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고 말구요.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나요?”
눈을 샐쭉하게 뜬 현이 어머니가 약간 의심되는 눈빛을 보냈다.
“흥. 근데 왜 지금 알려 주는 건가요?”
“그게 한 가지 여기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서. 맛이 좀…… 많이 그렇거든요.”
“얼마나 맛없길래?”
“흠…… 그럼 직접 보시고 결정하심이 좋으실 거 같아요.”
냄새를 맡아보니 약간 쿰쿰하다. 가루 맛을 본 현이 어머니가 욱 하더니 오만상을 찌푸렸다. 현이 어머니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약사가 서둘러 물건을 치웠다.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정말 그렇네. 이걸 대체 어떻게 먹으라고.”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거든요. 좋은 게 몸에 쓴 법이라고 딱 열 개만 한정 판매하는 거지요.”
“흠. 그래도 그렇지. 조금만 조금만 고민해 볼게.”
적당히 맛없다면야 모르겠지만 이건 맛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나.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나자 자꾸 제품 위에 써 있던 문구가 자꾸 기억에 났다.
-몸에 좋은 것은 원래 맛이 없습니다. 인생은 선택,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바꿉니다.
금박으로 된 문구를 떠오르자 어머니는 극한의 갈등에 휩싸였다.
지금의 선택이 자식의 키를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자꾸 그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
그러던 중 돌아온 아이를 본 현이 어머니의 얼굴이 동그래졌다.
“어머 너 얼굴이 왜 그래.”
“동찬이랑 싸웠어. 자꾸 쪼매낳다고 놀려서 그만.”
“어머어머. 얘가. 동찬이 개는 뭐가 잘났다고!”
씩씩거리는 아이에 동네 아이에게 맞고 왔는지 멍투성이다.
결국 화딱지가 난 현이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일찍 약국을 다시 방문한 현이 어머니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클로렐라 제품 있어요?”
“이미 다 팔렸는데요 어머니.”
“뭐요 그새 다 팔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마치 물건을 맡겨 둔 듯한 태도에 난감해하는 약사가 변명했다.
“그게 손님, 분명히 딱 열 개밖에 못 판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내꺼 하나는 남겨 뒀어야 할 거 아냐.”
“죄송해요. 다음 달에는 들어올지도 몰라요.”
“흥! 이거 못쓰겠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현이 어머니었지만 약사로서는 거듭 죄송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오기가 생긴 현이 어머니는 주변을 돌며 발품을 팔고 난 뒤에야 겨우 하나를 구했다.
그렇게 힘들게 구하고 나자 그 맛없는 초록색 가루가 더없이 소중하게 보인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아이가 마주한 것은 온통 초록빛투성이로 변한 식단이었다. 밥부터, 부침개에, 계란까지 온통 녹색의 향연을 접한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예요. 엄마?”
“다, 몸에 좋은 거란다. 자 얼른 먹어.”
“싫어. 이상해. 나 이런 거 안 먹을래!”
“뭐? 이거 구하려고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버럭 성질을 부린 엄마에 울먹거리는 아이의 모습.
그제야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살살 아이를 달랬다.
“뚝, 잘 먹으면 엄마가 과자 줄게.”
“정말?”
“그래 이거 먹으면 키 큰단다. 어서 먹어.”
어머니의 바람 덕분일까. 아이는 몇 달 후 정말 쑥쑥 자랐다. 이유가 클로렐라 때문인지 아니면 성장할 때가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자 아이를 둔 부모들 사이에 클로렐라가 키 크는 영양제로 입소문을 타자,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엉뚱한 소문이 퍼졌다.
-아무 약국이 아니라, 오직 검증된 약국에서만 클로렐라를 팔 수 있다.
-백경에서 내부 기준이 있는 듯. 검증한 약사한테만 제품을 판다더라.
-분유 파는 업체다 보니 다르겠지 뭔가.
강태준으로는 피부로 체감하지 못했지만 분유 사태와 여러 풍파를 겪으면서 지명도가 크게 올랐다. 사람들 사이에서 믿고 먹을 수 있는 브랜드라는 인식이 퍼진 것이다.
몇몇 약국에서 클로렐라 시범 사업을 약국의 신용도를 높이는 데 활용해 버린 것.
그렇게 되자 클로렐라 확보는 약국들 간에 이상한 자존심 싸움으로 번졌다. 어이없게도 사람들은 그걸 정설이라고 믿게 되니 약국 입장에서도 물량 확보에 혈안이 되었다.
정부에서 과대 광고라는 제재를 받은 강태준이었지만 다시 신문에 의학자의 칼럼이 실린 것이 판매량 개선에 촉매가 되었다.
-클로렐라는 간 건강에도 도움을 주는 제품으로 다용도로 활용이 가능한 만능식품.
-술 마시기 전 클로렐라를 미리 먹어 두면 간 손상을 줄일 수 있을 것.
영어를 번역한 인터뷰에는 NASA와 소련에서 개발한 우주식품이라는 말이 지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마침 달에 사람을 보낸 일로 우주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올라갔던 터라,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딱 좋은 시절.
몸에 좋다는 거라면 아무거나 다 집어먹는 한국인들이 그런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렇게 되자 백경 본사로 여기저기 연락이 쇄도했다.
“거기 클로렐라 파는 회사요?”
“네. 맞습니다만 무슨 일로?”
“아니 내 한마디 좀 하겠소. 대체 왜 그렇게 찔끔찔끔 파는 건가. 장사를 그따구로 해서 돈 벌겠어?”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게 좀 대놓고 팔기에는 맛이 없어서요. 아직은 더 개량이 필요해서.”
“헛소리 말고, 그냥 팔게. 얼마면 되나?”
“아직은 좀……. 수량책정이 안되서. 정말 죄송하지만 약국 외인에는 판매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안 되겠군. 자네 내가 누군 줄 알아?”
기사의 효과는 대단했다. 생떼를 쓰는 사람들부터, 그냥 막무가내로 찾아와 드러눕는 사람들까지. 시가의 열 배를 부르는 사람까지 있었다.
시중에 품귀현상이 빚어지자 각종 식품업체들도 관심을 보였다. 우유, 음료수, 라면, 등 각종 건강보조식품에 첨가하는 게 어떤가 문의가 계속해서 들어왔던 것이다. 광필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웃기는군요. 이렇게 맛없는걸. 그냥 안 판다고 하니까 더 살려고 하네.”
“원래 인간들이 비합리적이라니까. 요새는 짝퉁까지 나온다네요.”
“이걸 짝퉁으로 만든다고?”
“네 그런데 맛을 구현 못 해서 실패했다네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맛. 역설적이게도 그 괴랄한 맛이 오히려 정품 인증에 도움이 되었다고 할까. 오히려 맛없는 것이 몸에 좋다며 권장하는 분위기까지 있을 정도였다.
클로렐라 열풍에는 함부로 팔지 않는 고급품이라는 인식도 한몫했다. 일종의 넛지효과랄까. 판매량 제한이 도리어 제품에 대한 관심에 불을 붙인 것이다.
수요가 폭발하자 자신감이 붙은 강태준은 미국으로 판매할 루트를 물색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