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이이제이
탁재훈의 동공에 지진이 왔다.
“노조를 만들라고? 나 보고?”
“말이 안 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현재의 항만노조가 독점적 노무공급권을 무기로 회사의 자율적 경영을 침해하고 있는데 그럼 쟁의기금의 대부분은 노조가 사비처럼 쓰고 있는데 그 혜택은 누가 보고 있습니까.”
강태준의 푸념을 듣고 있던 탁 사장이 한숨을 쉬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보나? 복수노조 설립은 애초에 법규상으로 불가능해.”
“아 그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번에 고용노동부 포함 관계 부처에서 항만노조의 독점을 깨기 위해 시행규칙 개정안을 준비 중이니까요.”
“뭐라고?”
강태준이 내민 서류를 살핀 탁 사장이 계류 중인 법안을 확인했다.
서류를 읽은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1년간 실적이 없을 경우, 노조의 인력 공급 허가를 취소시킬 수 있다?”
“새 노조를 만들어 협의체를 구성한다면 기금 조성은 물론이거니와 또한 하역요율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지요.”
강태준 속내를 파악한 탁 사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이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자네…… 지금 날 모욕할 셈인가? 노무자들을 갈라치기를 해서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
“만약 허락하신다면 30억 원을 바로 출자하겠습니다.”
“뭐 지금 뭐라고?”
생각보다 너무 큰 돈에 말을 멈춘 탁재훈이 머뭇거렸다.
“그거뿐만이 아닙니다. 저희 쪽이 노무비는 바로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당장에 말입니다.”
“그런 제안을 왜 지금까지…….”
“말 안 듣는 종자는 애초에 필요가 없어서요. 주도권을 진 쪽이 누구인지 알려드리는 겁니다.”
노골적인 말에 옆에 동석한 아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먹음직스러운 미끼에도 불구하고, 탁재훈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 말은 판을 쥐고 흔들겠다로 들리는군, 그래.”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거죠. 그리고 서로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편하지 않겠습니까? 탁 조합장님?”
“허허허허허허허!!!!~~~”
노조가 파업을 벌일 거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
하지만 탁재훈이 껄껄 웃더니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
주름진 눈빛에는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작업,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겠나?”
* * *
비슷한 시각, 노조위원장인 박강태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왜 이렇게 오래 버티는 거야. 이 미친놈이 그냥 창고 물량은 버린다는 건가?”
“아무래도 퀴농항을 끼고 있다 보니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누굴 그걸 몰라? 그러니까 어떻게든 놈을 끌어내야 할 거 아니야.”
“차라리 이럴 바에는 창고를 불태워 버리는 것이…….”
“이 자식이 미쳤나? 그랬다가는 여론이 다 우리 쪽을 공격할 땐데…… 그렇게는 안 되지.”
점차 혀가 말라가던 그때 박강태에게 마침 희소식이 전해졌다.
“백경 쪽에서 긴급 교섭을 청했습니다. 협의하잡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예. 아무래도 더 못버티겠던 모양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놈이 아무리 날고 겨도 못하는 건 못하는 거지.”
내심 노심초사했던 박강태는 가슴을 쓸었다. 회의장에 도착하자 득의양양한 박강태는 앉은 자리에서 거드름을 피웠다.
“허허. 강 사장, 이렇게 뵙다니, 급하긴 급했나 보구먼.”
“쓸데없이 시간 끌 필요 없지요. 합의서부터 서로 볼까요?”
곧장 제반 사항을 마친 둘이 막 사인하려던 찰나. 다급히 들어온 노조원이 그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뭐 새 노조?”
강태준 쪽에도 춘삼이가 귀엣말을 전하자 강태준이 팬을 내려놓았다.
“이거 상황이 좀 바뀐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 협상은 무효겠군요.”
“그게 무슨 소린가.”
“지금 TV를 틀어 보시죠.”
TV를 켜는 순간 기자 하나가 나왔다.
-속보입니다. 고용노동부 부산지청은 부산민주항만지부가 낸 노조 설립신고서를 승인했습니다. 이번 노조 설립은 컨테이너 선박의 고정작업을 하는 항만 노동자 50여 명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근로자공급허가권은 보통 승인 절차가 매우 까다롭지만 상황의 특수성을 감안해 빠르게 처리했다고 노동부 장관은 밝혔습니다.
이번 복수노조 설립으로 부산항만노조의 근로자공급권 독점구도가 크게 흔들릴 것으로 예상되어…….
박강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얼이 빠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이런, 교섭단체가 하나 더 생기다니, 이건 이제 필요 없을 거 같군요.”
미소를 지은 강태준이 그 자리에서 합의서를 북북 찢었다. 박강태가 눈을 부릅뜨며 으르렁거렸다.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새 조합장이랑 먼저 논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정이 바뀌었으니 이제 조건도 바뀌어야죠.”
“이 사람이!!”
고개를 돌린 강태준이 미련 없이 출구로 향하자 박강태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강태준, 니가 날 우롱해!!”
뒤늦게서야 상황을 파악한 박강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멱살을 잡으려 하자, 경호를 서던 방첩대원들이 앞을 막았다.
“이럴 여유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쪽 댁에도 집행관이 갔을 텐데요?”
말뜻을 파악하지 못한 박강태 얼탄 사이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항만노조 전직 부위원장인 최재덕 씨가 관급공사 수주 관련 건을 자백했습니다. 현직 노조위원장이 노조원에게 수주를 강요한 정황이 드러나…….
-노조 지부장인 김태기 씨가 노조 간부들이 가입과 승진을 미끼로 거액의 금품을 수수한 정황을 폭로했습니다. 부산지역 특수부에서는 비리 핵심으로 지목된 박강만의 동생 박강태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해 강도 높은 수사에 나서…….
박강태 노조위원장에게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졌다. 대부분의 전임자들은 횡령과 배임 혐의로 구속되었으니 항만노조의 이름은 유명무실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새 노조와의 협의를 마친 부산항에서는 다시 공사가 재개되었다.
생각보다 저항은 적었다. 오랜 파업으로 다들 심신이 지쳐 있었던 탓에 경기회복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새로운 인력들이 민자 부두로 돌아오면서 얼어붙었던 경기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근데 강 사장님도 유난하네요. 컨테이너로 바리케이드를 치라니 뭔 소립니까.”
“혹시 모르지. 원래 궁지에 몰리면 미친 짓을 하는 법이니까.”
“까짓것 이미 다 끝났는데 놈들이 어쩌겠습니까? 이제 뭐 끝장인데요.”
그때였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보아하니 언덕 위로 엄청난 인원의 시위대가 몰려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태를 파악한 광필이가 소리를 질렀다.
“박강태. 이런 미친놈들 전문 시위꾼까지 동원하다니!”
“어떡합니까?”
“뭘 어째, 일단 경찰 불러야지. 빨리 가 경찰 불러.”
머리에 붉은 띠를 맨 녀석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모두 밀집 대형으로!!”
“아니, 저 새끼들 지금 뭐 하는 거야!!”
확성기를 든 박인창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백경은 당장 공사를 중단하라!”
“중단하라!”
코앞에서 진입을 멈춘 시위꾼들이 매고 온 폐타이어를 일렬로 늘어놓는 모습에 경악한 사람들이었다.
“아니, 저거 뭐야 뭐 하려는 거야. 저놈들. 설마.”
“지금 당장 불을 붙이려는 겁니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할 것인지 깨달은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공사를 중단시키기 위해 폐타이어를 매고 온 녀석들이 불을 붙인 것이다. 곧바로 연기가 치솟고 현장으로 유독가스가 풀려나왔다. 강태준이 명을 내렸다.
“철수해!”
“하지만 그러면 설비란 자재는 전부.”
“버려! 지금 그게 문제인가?”
시커먼 매연이 하늘로 뭉게뭉게 올라가자 부산 시내에서도 보일 정도. 매캐한 유독가스가 바람에 따라 서서히 이동하는 사이 한 사람이 컨테이너 위에 남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름 아닌 최 반장이었다.
“최 반장! 지금 뭐 하나 내려오게. 거기 있으면 죽어.”
“굶어 죽으나, 타 죽으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전 여기서 뼈를 묻겠습니다!”
“자네 돌았나! 어서 내려와!!”
사람들이 설득을 하려 했지만 최 반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거대하게 커진 불꽃이 커지더니 이쪽으로 옮겨왔다. 뭉게구름이 최 반장을 삼키기 위해 했다 눈을 감은 채 손을 벌렸다.
별안간 풍향이 바뀌더니, 오히려 시위대 쪽으로 연기가 쏟아져 내렸다.
“아니. 위원장님 바람이 이쪽으로 옵니다.”
“이런 미친!!! 왜 갑자기 풍향이 바뀌는 거야.”
노도처럼 밀려오는 검은 연기에 박강태는 혼이 나갔다. 혼비백산한 시위대가 흩어지며 도망치자 그러자 쾅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터진 타이어가 튀어 올랐다.
그것이 그의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 * *
라디오에서 기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로 출범한 항운노조원들과 백경 간에 임금 협상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세부협상 통과 후 각 부두회사와 노조지회는 구체적인 임금수준을 확정하고 노조원의 하역회사별 상시고용체제를 갖출 것을 천명했습니다.
이번 개정안에 따라 항운노조원은 일용직 근로자에서 항만물류기업의 정규직원이 되어 노동 관련 법령의 적용 대상이 됩니다. 향후 항만의 대외신인도가 향상돼 외국선사의 신규유치는 물론 다국적 물류기업의 투자유치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며…….
기존의 항만노조는 노조원 간부들의 폭력행위로 인해 완전히 공중분해 되었다. 준설지에 불을 지르려고 한 주모자들은 하나같이 발화 죄 혐의로 잡혀갔다.
“일선 노조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노무자 4명이 중상, 2명이 사망했고 20명은 유독가스 중독으로 치료 중입니다.”
“세상사 아이러니하군요.”
폭동에 참가한 노조원들은 도리어 세브란스 병원 신세를 지게 되다니 중환자실에서 미라처럼 온몸에 붕대를 감싼 남자들을 보니 마음이 착잡하다.
한쪽을 돌아보던 강태준이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
“여기 박강태 씨는요?”
“순조롭게 회복 중입니다. 위독한 시기는 넘겼습니다.”
“그래요? 근데 왜 이렇게 오래 의식이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게 다친 부위가 좀 그래서. 사실 깨어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 좋지 않은 곳에 불이 붙어 버리는 바람에…….”
“네? 그게 뭔 소립니까?”
이야기를 전해 들은 강태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잠시 후 강태준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이구야 저런…… 혹시 자살하지 않게 잘 감시하세요. 쯧쯧. 사람이 어떻게…….”
잠시 후, 실눈을 뜬 박강태가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의사 양반…… 이게 무슨.”
“아 깨셨군요.”
“저 의사 양반 무슨 소리요? 영 좋지 않은 곳을 당했다니.”
아무 말 못하는 간호사가 난처해하자 갑슨이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 선생님께선 앞으로 남자 구실을 하실 수 없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롭니다. 화재 이후 급 봉합 수술을 진행했지만 뿌리까지 타 버려서요. 그래도 죽는 것보단 이승이 낫지 않겠습니까?”
조직이 완전히 괴사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재활을 마치면 일상생활이 가능할 수 있을 거는 말에도 충격을 받은 박강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의사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아래를 보는 박강태.
야구공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아랫도리가 헐렁해진 느낌이다.
그제서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내가 고자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어흐흐흐!! 어머니!! 아버지.”
“아니 울면 더 아파요. 진정을…….”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아흐아흐하아으으윽!!!”
온몸이 불탄 고통보다 심리적인 상실감이 크다.
짐승 소리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