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백경 빌딩
양측이 엉겨 붙어 투닥거리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마아안……!!!”
탁재훈의 노성에 노동자들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탁재훈의 일갈에 다들 멈칫한 것이다.
앞섬이 뜯겨진 최 반장은 벌게진 채 박 부장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술은 찢어진 채 터져나가 있었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인가? 이게…… 무슨 추태야!”
멱살을 턴 최 반장이 똑바로 박 부장을 주시했다.
잠시 그를 맹목적으로 노려보던 박 부장이 경멸 섞인 눈으로 침을 탁 뱉었다.
“퉷!! 더러운 놈! 그래 혼자라도 그놈들이랑 붙어먹으라지. 앞으로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보겠어.”
눈을 부라리던 박부장이 걸음을 옮기자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 최 반장 곁으로 다가온 탁재훈이 등을 두드리며 그를 달랬다.
“최 반장 괜찮나…….”
“괜찮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입술의 피를 닦은 최 반장을 사람들이 부축했다. 그 뒷모습을 보던 탁재훈이 한숨을 쉬더니 긴장이 풀린 듯 갑작스런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그걸 본 아들이 서둘러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됐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박강태는 뭐 하고 있다냐?”
“모르겠습니다. 요구사항을 관철하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겠다는데요. 끝까지 갈 듯싶습니다.”
“허어…… 그 인간도 똥꼬집은 다 죽으려는 건가?”
곤경에 처한 박강태였지만 완전히 배 째라는 식으로 나왔다 노조원들 역시 빵에 들어가고 나온다 해도, 1, 2년만 살고 나오면 조합에 복귀할 수 있다 하니 물불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일찍이 강태준의 성정을 아는 탁재훈으로서는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물류가 인질로 잡혔으니 강 사장도 언제까지 버틸 수는 쓸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 저걸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나? 이런 방식으로는 안 돼. 이러다가 다 죽어!”
“그럼 뭘 어쩌시려고요?”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지.”
“아버지 그건.”
“이미 서신을 보냈다. 예전 한솥밥 먹던 사이에 찾아가면 모르는 척은 하지 않을 거야.”
정말 그럴지 자신은 없지만 상황을 타개하려면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얼마 후 정말로 답변이 왔다.
- 28일, 정오까지 서울역 본사로 오십시오.
“다짜고짜 서울 본사라니 어떻게 찾으라는 건가?”
“뭐 어떻게든 되겠지요. 상대가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두릅시다. 아버님.”
강태준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탁재훈 부자는 곧바로 급행열차를 탔다. 하루 반나절을 꼬박 지난 후에 도착한 서울역. 탁재훈을 흔들어 깨웠다.
“아부지…… 다 온 거 같습니다.”
“엉. 벌써?”
중절모를 쓰고 일어나려는 사내를 붙잡은 탁재훈이 물었다.
“여보, 실례지만 백경그룹 본사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아. 그것도 모르시나? 역에서 나가면 바로 앞에 있소.”
그것도 모르냐는 듯 쌀쌀맞게 눈을 흘긴 남자가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저런,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싹퉁머리 없는…….”
“됐다. 쓸데없이 성내지 마라. 일단 나가 보자꾸나.”
그러나 둘의 의문은 서울역 정면 맞은편을 보는 순간 해소되었다.
역사 밖으로 나가자마자 어마어마한 덩치의 건물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남산을 등지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건물.
총 28층. 가로 80m, 세로 120m 길이의 웅장함에 탁재훈은 저도 모르게 압도되었다.
“이게 정말 백경그룹 본사라고?”
“에…… 그런 것 같습니다. 아버님.”
“거 강태준이 대단하구만. 예전에 하역장에서 오징어 포장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백경그룹은 더 이상 옛날 그 구멍가게가 아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올라섰다는 생각에 문득 대견함을 느끼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아무리 친분이 조금 있다지만 이건 가히 하늘과 땅 차이 아닌가.
과연 말이 통할까 하는 의문에 마음이 약해지려던 찰나, 어디선가 불량해 보이는 양아치 몇 명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어이, 거기! 영감탱이?”
“나? 나 부르나?”
“그려. 영감탱이 여기 왔으면 관람료 내야 되는 거 모르쇼?”
“뭐시기? 그게 뭔 소린가?”
“아니 여기서 눈 호강을 했으면 대가를 내놓으셔야지. 입을 슥 닦으려고 했소?”
인상을 쓴 채 건들거리는 것이 한두 번 윽박질러 본 솜씨가 아니다.
어이가 없어진 탁재훈이 반박하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구 이 징글징글한 것들…… 여기서 뭣들 하고 자빠졌나?”
복만이와 함께 온 방첩대원들을 본 양아치들의 표정이 변했다.
상대의 면면을 확인한 복만이가 풋 하고 웃었다.
“시레잡놈의 자식들…… 구치소 나온 지가 고작 사흘인데, 고새를 못참아?”
“그게 아니라. 형님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자식들 아직 예절 주입이 덜 되었구만. 이보게 최 중사.”
“옙!”
“실력 좀 보여 주시게. 오늘 매타작 좀 해야겠어.”
복만이가 눈짓하자 뒤에 물러섰던 최 중사가 어깨를 풀며 앞으로 나서자 양아치들이 뒤로 피했다. 용기는 가상했지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잠깐 사이 급소를 얻어맞고 제압당한 양아치들.
방첩대원들이 달려들어 녀석을 제압했다. 저항이 극심한 녀석들도 몇 있었지만 핸더슨의 핵꿀밤을 몇 대 쳐 맞고 바로 잠잠해졌다.
녀석들을 인계한 복만이가 탁 사장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거 욕보셨습니다. 요새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을 노리고 사기를 치는 종자들이 있어서”
“그러게. 세상에 관람비라니 세상 말세이지 말입니다.”
“허허. 암튼 고맙네. 그보다는 살이 많이 빠졌네? 예전에 몰라보겠는걸.”
“하하.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다시 안내했다. 본사 앞으로 가자 웅장했던 건물이 더 거대해 보였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구먼. 용적율도 장난 아니겠는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듣기로 연면적만 15만 제곱미터가 넘는 걸로 압니다.”
“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건물이라니.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건가?”
“무슨 말씀을 제 형님 말씀으로는 이건 케네디 우주 센터랑 비교하면 그냥 구멍가게랍니다.”
“허 근데 신기하구만 이걸 대체 어떻게?”
사무용 고층 건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수준이 아닌가. 변변한 복층 건물조차도 거의 없던 당시 이런 대형 건물이라니. 그에 복만이가 코를 훔쳤다.
“운이 좋았죠. 원래 교통부 부지였는데 공사 중에 관광공사를 세우는 게 낫지 않냐 잡음이 나와서 잠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현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그래서 짓던 건물이 홀랑 타 버렸지 뭡니까.”
“건물이 타 버렸다고?”
“글쵸. 교통부 입장에서는 신축은 고사하고 손가락만 빨게 된 마당이니. 난감해졌지 뭡니까. 그때 마침 우리 형님이 서부역 쪽으로 대체 부지를 주고 교환하자 했습니다.”
“정부 청사를 대신 지어주다니, 그것도 한두 푼이 아니었을 텐데.”
“그래도 결과적으로 많이 남는 장사였어요. 사내 계열사는 다 들어와도 남을 정도니. 거기다 이거 짓고 주위 땅값이 몇 배나 뛰었습니다. 이런 땅을 고작 40억에 인수했으니, 덕분에 우리 형님은 뭐 앉은자리에서 떼돈 벌였죠.”
“거 대단하구먼. 재주도 무지 좋아…….”
“사실 처음에는 다들 너무 크게 짓는다 우려하긴 했습니다만 막상 짓고 보니 너무 좋더라고요. 실내도 널찍해서 쓸만합니다.”
탁재훈은 감탄을 거듭했다. 웅장한 외경만큼이나 공간 역시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홀 중앙에 사람들의 사로잡은 것은 닻을 올린 배였다.
건물 안에 배가 있다니. 모래사장 위에 올려진 선박에 현실감이 없어 잠시 멍을 때리던 탁 사장이 바로 그 정체를 알아보았다.
“무안호? 이거 무안호 아닌가 그래?”
“네. 맞습니다. 스크랩 처리를 하려다가 사장님께서 회사와 역사를 같이 한 배인데 없애기 아깝다고 그러시더군요. 기념물로 두는 게 좋다고 해서 이렇게 설치했습니다. 휴식 공간치고 꽤 나쁘지 않지요?
“호, 정말 그렇구먼.”
탁 사장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안호 주변에는 모래사장과 나무까지 조성해 놓은 덕에 해안가에 있는 느낌을 들게 했다.
“신축이라 입주가 안 끝났습니다만. 이거 덕분에 주의를 끌어서 그런가, 꽤 인기가 좋아요. 공실 없이 다 나갔습니다.”
“대단하군. 정말.”
폐기 직전의 배 한 대를 재활용함으로서 자칫 썰렁할 수 있는 공간을 꽉 찬 느낌으로 만든 것이다. 구경도 잠시 엘리베이터를 탄 복만이가 응접실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룹 총수가 머무는 공간답게 꼭대기 층의 응접실은 사방이 전망 좋게 탁 트여 있는 것이 인상 깊었다.
“형님께서 앞전 회의가 있으셔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네.”
널찍한 응접실 안은 전시관마냥 널찍했다. 카발 자동차 시절부터 무안호, 지평호에 이르기까지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며 찬찬히 감상하던 중 신기하게 생긴 지도 하나가 눈에 띄었다.
“호오, 이건 뭐지?”
“2차 세계대전쯤 지도 같은데요.”
미니어처 모형처럼 꾸며놓은 전장을 흥미롭게 감상하던 중 인기척이 들렸다.
“높은 성의 주인이란 작품인데 제가 요새 관심 있게 보는 책입니다.”
“오 그래 어떤 내용인가 그래?”
“전간기를 다룬 대체역사인데, 추축국이 승리할 때의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역사 개변을 다루고 있거든요.”
“호오. 그래? 별일이구먼.”
“살짝씩 다른 게 나비효과란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지요. 미국서 휴고상까지 수상한 작품이니 퀄리티는 보증하는 수준이죠.”
“아쉽군 내가 영어는 까막눈이라.”
“하하. 걱정 마십쇼. 저희 쪽에서 이번에 번역 중이거든요. 우리 마나님이 꽤나 열일 중인게 일 끝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보다. 간만에 여기까지 찾아오시다니. 고생 많으셨습니까. 근데 노조를 대표해서 오신 겁니까?”
강태준이 소파에 앉자 비서가 커피를 내왔다. 따뜻한 아로마가 감돌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아쉽게도 그렇게 권한 있는 인사가 아니라서 말일세. 다만 중개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나.”
“뭐 큰 기대는 안 했습니다.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니까요.”
여유롭게 찻잔을 드는 강태준에게 탁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바쁜 사람이니 물어보겠네. 컨테이너 준설항을 옮긴다는 이야기 사실인가?”
“뭐 사실입니다.”
“그건 저쪽에 먼저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파업을 일방적으로 속행한 건 저쪽입니다. 게다가 차라리 잘 되었어요. 어차피 인력 감축은 필연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린가?”
“컨테이너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게 되면 인력의 30~40프로 이상이 감축될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 일에서 배제되는 인원은 다른 밥벌이를 찾으셔야겠죠.”
어차피 지금 단계에서 정리가 필요하다는 뉘앙스에 탁재훈의 표정이 간절해졌다.
“매정하구만. 그래도 이대로 노무자들을 다 죽일 셈은 아니지 않나. 사정 봐주게.”
“글쎄요. 현 노조 집행부와는 대화가 안 될 거 같은데요. 차라리 탁 사장님께서 직접 새 노조를 만드시면 몰라도…….”
“농담도 참…….”
“농담 아닌데요? 어때요. 노조 한번 만들어 보시렵니까?”
강태준이 차를 내려놓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