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바나나우유
“투자라면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고 계시는지?”
“일단은 경기도 신갈에 하루 약 30만개 이상 규모의 공장을 세울 생각입니다.”
엄청난 규모에 숨을 헙 하고 들이키는 유박사였다.
“상당히 크군요.”
“두유의 원료가 되는 콩은 전량 수입품 아니겠습니까. 가격을 낮추려면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죠. 추후에는 소비량에 따라서 300만 개 이상까지도 증설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흐음…… 저야 좋지만 인력도 엄청나게 많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번 공장은 처음부터 물류자동화를 염두에 두고 있으니까요.”
“물류자동화요?”
“이번 분유 사태를 계기로 저희 백경에서는 위생 규정을 강화했습니다. 출고장 발부하기 전에 별도의 일반검사를 실시하려고요. 일단 오염의 근원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평소 입버릇처럼 위생을 강조한 유박사로서는 입맛에 맞는 발언이었다.
과연 강태준의 예상이 맞았는지 유박사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주었다.
“확실히 위생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면 불량품을 골라내기 용이하겠군요. 하지만 그러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요.”
“물론 초기 투자비는 많이 들겠지만 두유 대중화가 빨라진다면 투자비 회수는 금방이라 확신합니다. 블루베리나 과일류를 첨가하거나, 올리고당을 넣어 대중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면 더 수요도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강태준의 말은 충분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묵묵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유인국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상은 좋지만 좀 고민해 봐야겠군요. 원래 경영이란 게 취지와 달라지는 것이 많이 생기는지라…….”
“걱정 마십시오. 경영권이 탐나서 두유사업에 투자하려는 것은 아니니까요. 유가공전문업체를 계열화하는 차원에서 경영은 전적으로 위임할 생각입니다.”
“그게 참말이십니까?”
“창립자의 철학을 구현하기에도 그편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원하신다면 투자확약서에 부수조항을 삽입해 드릴수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신다면야. 좋습니다. 믿어 보지요.”
유 박사는 강태준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함락당했다. 여기서 강태준은 이번 공장 증설과 더불어 최근 전역하여 집에서 놀고 있는 설인모를 총괄 사장으로 스카웃하기로 정했다.
간만에 회사로 나온 설인모는 매일같이 공장을 드나들며 진행상황을 확인하는 정열을 보였다.
“아이구, 형님, 쉬엄쉬엄 하십시오. 너무 열심히 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여. 할 일이 생겨서 좋구먼. 그래. 몇 달 집에서 있으니 눈치가 보였는데 이렇게 일하니 마음이 편해.”
“근데 대령으로 예편하다니 아쉽지 않으십니까? 좀만 더 있었으면 별이야 따 논 당상인데.”
“전혀, 애초에 군에 말뚝 박을 생각은 딱히 아쉽지는 않네. 솔직히 아버지께서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는 마당에 군에 계속 붙어 있는 건 좀 난처하지 않겠나?”
설인모가 한일협약에서 큰 공을 세우긴 했지만 양국 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잡음이 안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정권에 반하는 판결을 내며 소장파로 낙인 찍힌 아버지 덕분에 운신의 폭이 줄어들자 책임진다는 핑계를 대고 나와 버린 것이다.
“그래도 몇 년간 정들었을 텐데, 제가 다 죄송해지는군요.”
“군대에 정붙여서 뭐하게. 뭐 연금도 두둑이 챙겼겠다. 난 별로 불만 없다네. 게다가 이렇게 사장 한다니까 다들 부러워하던걸? 고시 동기들도 한 자리씩 청탁하더구만.”
“형님도 참.”
“허허 뭐 아들 된 입장에서 어쩌겠어. 소신대로 사는 분이시니, 차라리 이편이 모양새도 좋지 그래. 뭐 마누라도 좋아하더라고. 하하.”
“사모님께 점수를 땄다니 제가 다 기쁘네요.”
“근데 군부대 납품일은 정말 단가를 낮춰도 되겠나? 생산원가랑 간당간당한 수준이던데.”
“괜찮습니다. 애초에 손실보전용이니 말입니다. 일선 학교에 우유를 공급하는 문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부분도 시도 교육청이랑 대충 협의를 봤네. 서울이랑 대구 쪽부터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들어갈 예정이야.”
아동용으로 우유급식이 쉽게 통과된 건 백경에서는 축산 발전과 낙농 진흥을 위해 필요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주창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정부로서도 영세 낙농가 지원을 위해서라도 당근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만큼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이다.
“다행이네요. 추가 생산되는 잉여분 문제는 대략 해결되겠군요.”
“근데 애들이 흰 우유를 좋아하지는 않을 거 같아 걱정이군. 허여멀건 우유 맛이 익숙하지 않은 애들도 많을 텐데.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애들이 안 먹으면 좀 곤란하지 않겠나.”
카라멜 구충제 사건도 그렇고, 애들 다루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설인모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강태준은 이미 비장의 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걱정 마십쇼. 우유 맛을 개선할 방법을 연구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어떻게?”
“우유에 바나나향을 입힐 생각이거든요. 달짝지근한 향을 입히면 부담도 없고 남녀노소 즐겁게 먹지 않겠습니까?”
“호오. 바나나라니 그거 꽤 괜찮은데 국민들에게 영양 간식으로 어필하기 좋겠군. 근데 진짜 바나나가 들어가나?”
“하하. 설마요. 바나나 향료를 적당히 가미하는 거죠. 혹시 바나나 값이 폭락하면 그때는 진짜 바나나를 넣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안 선생은 좀 많이 아쉬워하더군요.”
강태준은 이번에 용기에도 신경을 썼다. 강태준의 요구사항대로 디자인한 배불뚝이 형태의 용기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해괴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대체 왜 포장을 달항아리 모양으로 만들라는 겁니까?”
“요로콤시 단지처럼 배불뚝이로 하는 게 좋지 않나. 노란색이 돋보이도록 반투명으로 말이야.”
“흠… 신기한 모양이군요. 이런 디자인은 처음부터 본 적 없는데…… 이걸 유리병으로 만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폴리스티렌으로 만들어야지. 유리병으로 그렇게 만들다간 깨질 위험이 있지 않나? 게다가 요사이 포장재로 새로이 각광받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나 오재갑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
“흠…… 그냥 종이팩이 낫지 않겠습니까. 모양을 보니 효율 면에서 좀 떨어질 거 같습니다. 사각팩과 다르게 포장 시 낭비되는 공간이 상당할 거 같은데…… 중간에 터질 위험도 있는 만큼 완충재도 넣어야 하고요.”
“대신 다른 업체들과 차별을 둘 수 있으니 베끼기는 어렵지? 추후에 이 제품이 인기를 끌더라도 말이야. 차부장. 기술적으로 가능하겠나?”
“예. 물리적으로 가능은 합니다. 위아래를 반으로 따로 찍고 상하로 접붙이면 마찰열만으로도 접합 가능합니다. 다만 평범한 용기들과 비교하면 제작 과정이 복잡하니 그만큼 비용이 들겠죠.”
“그건 걱정 마. 이 제품으로는 조만간 회수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대중탕 쪽에 먼저 공급하는 것도 잊지 말고. 등 좀 지지고 와야겠어.”
마침 온양에서 호텔 개관을 코앞에 두고 있었기에 강태준은 온천에 내려가 휴식을 취했다.
“크으, 시원하다.”
“계란 맛있네…….”
훈제 계란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광필이가 식혜를 쭉 들이키며 숨을 토했다.
“와따, 여기가 천국이구만요.”
“너도 참 징하다. 맨날 똑같은 데 오면서 그리도 좋냐.“
“좋다마다요. 맨날 어깨가 결렸는데 여기 오니까 좀 싹 낫지 뭡니까? 세종대왕이 좋아한 이유가 있다니까요.”
“원래 온천이 약이죠. 근데 형님 그 양머리는 뭡니까?”
오재갑이 수건을 양쪽으로 땋은 머리를 보며 지적하자 광필이가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뭐, 아까 사우나 로비에서 만났는데 점례가 해 주지 뭡니까. 요새 최신 유행이라는데…… 저랑 안 어울립니까?”
“인간적으로 그건 좀…….”
안구테러가 생각나는 형상이었지만 강태준은 슬쩍 어깨를 내리눌렀다.
“아니 뭐 잘 어울려. 계속 그러고 다녀라.”
“암튼. 식혜 다 떨어졌구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본인도 민망한지 슬쩍 자리에서 내빼는 광필이의 행동에 오재갑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설마 그건 아니겠죠? 반삼평 그 할배가 알면 뒤집어질 텐데.”
“나이 차가 얼만데 설마, 점례도 보는 눈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 일이 어떻게 될 줄 아나? 쓸데없이 초치지 말고 모른 척해. 그보다 바나나맛 우유 판매량이 폭등했다며?”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호의적입니다. 확실히 포장 용기가 신기해서 그런가 홍보가 잘 되는군요. 한번 사 먹어 보고 맛들인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게 묘하게 중독되더군요.”
온천장 밖으로 노란 바나나맛 우유에 빨대를 꽂아 먹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노랗고 맛있는 바나나맛 우유!
-영양만점. 우유. 성장기 어린이에게 키를 선물하세요.
성수기에 맞춰서 TV 광고를 시작했다. 소 위의 노란 병아리가 그려진 표지는 바나나맛 우유의 이미지와 어우러져 큰 인기를 끌었다.
출시 즉시 가공유 시장 1위를 기록한 바나나맛 우유가 모든 음료의 판매실적을 갈아치우는 진기록을 세우며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렇게 바나나맛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이에 자극받은 테라나 케롯 등 다른 식품 업체들도 곧장 딸기향과 바나나향을 가미한 우유를 부랴부랴 시장에 들이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쟁력 면에서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달항아리 모양의 용기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준 덕에 바나나맛=달항아리 모양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아 버린 것이다.
“디자인이란 게 생각보다 영향력이 크군요.”
“세간에 모양이 수류탄이라서 전쟁터를 연상시킨다며 항의하는 놈들도 있더군요. 사상이 불온한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거, 웃기는 놈들일세. 진짜 수류탄 쳐맞고 디질려고.”
“노이즈 마케팅도 걍 놔둬. 어차피 용을 써도 못 만들걸.”
강태준이 독일서 해당 설비를 수입하면서 해당 국내에 재판매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어 뒀기 때문에 웃돈을 주고서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거기에 수류탄 모양의 디자인은 별도로 해외에 상표등록은 물론 실용신안까지 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짝퉁으로 비빌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분유는 어떻게 되었나?”
“많이 회복되었죠. 분유 수요는 지난 분기 대비 400% 이상 증가했습니다. 아무래도 담양 놈들 곰팡이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 신한글래스에서도 공급 물량을 두 배로 늘리기로 했습니다.”
바나나맛 우유가 공전의 히트를 치자 서서히 회복하던 분유 매출이 급등하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생산속도를 높이고 있지만 수요가 너무 폭증해서, 다만 우유병과 두유 생산이 좀 차질이 있네요. 공병 회수율이 좀 저조한 게 원인인거 같습니다.”
“흐음. 공병 보증금 제도가 효과가 없나?”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찮습니다. 점포에서 소주나 맥주를 구입했다는 영수증을 첨부하라고 되어 있으니 골치가 아파지더라고요. 사실 누가 귀찮아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거기에 중간수집상들이 껴서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 소비자가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강태준이 다시 말했다.
“동기부여가 문제인 거 같은데 그러면 이건 어때? 주류업자들이 빈 병을 모아서 갖고 온 만큼 묵은쌀과 누룩을 공급해 주는 걸로.”
“공급량을 제한하자고요?”
“원래 세상 섭리가 그렇지 않나. 자본의 논리대로 가는 거.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써야지 공병을 제일 많이 모아온 업자에게는 한 달간 공급가를 10프로 낮춰 주는 걸로.”
“그거 명안이군요.”
강태준이 경쟁원칙을 도입하자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시원찮았던 공병 회수율이 곧바로 90%대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