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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264화 (264/361)

264화 쌀 막걸리

호호 뜨끈한 쌀을 불던 강태준이 숭늉 삼키듯 털어먹었다.

“이게 와, 향미가 다른데요?”

“숙성쌀이라서 그렇습니다. 망하기 전에 숙성해 놓은 건데 한국 올 때 몇 포대쯤 가져왔지요.”

겉면을 보니 노릇한 것 위에 얇게 가루가 코팅된 모습이 특이하기 짝이 없다.

궁금해진 강태준이 조반니에게 물었다.

“이 흰색 가루 같은 건 뭡니까?”

“미강입니다. 왕겨에서 쌀눈을 추출해 곱게 간 다음에 백미에 섞어 준 겁니다. 쌀과 함께 섞으면 풍미가 올라가더군요.”“그럼 도정을 하기 전부터 숙성을 한다는 겁니까?”

“중국서는 고대부터 해 온 방식입니다. 숙성된 쌀은 1년 정도 지나면 쌀 안의 녹말 성분이 안정되면서 균열이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소스가 잘 스며드는 상태로 변하죠. 시간이 더 지나면 거뭇하게 변하는데 별 차이는 없습니다.”

“오, 일종의 드라이에이징 개념이군요.”

“맞습니다.”

강태준은 다시 쌀을 음미해 보았다. 숙성된 쌀의 풍미는 햅쌀과는 명백히 달랐다. 파에야 역시 수분이 빠지고 균열 사이로 소스가 흡수되어 그런지 맛이 잘 스며들어 있었다.

“숙성만 1년이 넘는다고 하니 귀하군요.”

“원래 농사란 것이 기다림의 연속 아니겠습니까? 기다릴수록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거지요.”

새로움과 전통을 결합한 쌀의 맛은 아주 훌륭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후 안연복이 넌지시 물었다.

“어떻습니까? 사장님? 맛은 괜찮으셨습니까?”

“이거 확실히 상품성이 있네요. 캔에 질소포장을 해서 팔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거 같습니다. 아예 리조또처럼 조리해서 판매해도 되겠고요.”

물론 품이 많이 드는 것이 문제기는 하지만 프리미엄을 붙여 팔면 되지 않을까.

원래 쌀이란 것이 규모의 경제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 맛이라면 충분히 해외에서도 경쟁력이 있다.

그러나 강태준의 그런 계획은 줄지어 도착한 트럭 앞에서 깨어졌다. 갑자기 도착한 엄청난 양의 트럭들에 어안이 벙벙해진 것이다.

“이게 다 뭔가?”

“그게 국방부에서 보낸 물건이라는데요.”

강태준이 포대를 뜯어 확인해 보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오래된 쌀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던 것이다.

“냄새. 이거 몇 년은 묵은 쌀이잖아. 이건. 뭔 짓거리야.”

“뭐라고 써 있나?”

“정부양곡창고에서 노후화된 쌀을 소비하고 새 쌀로 채워 넣을 거라니 협조 부탁한답니다.”

“이렇게 오래된 걸 가공해서 팔라고? 지금 우리한테 짬처리 시키는 거야 뭐야?”

“그러게요. 갑자기 이렇게 재료를 바꾸면 좀 곤란하지 말입니다.”

어이가 없어진 강태준은 곧장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아직 통조림 쌀은 개발이 끝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묵은 쌀이 공급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장병들 사기에 악영향을 줄 수 있잖습니까. 수백 인분의 밥을 쪄내야 하는 취사 방식상 묵은 쌀을 사용하면 품질이 현저하게 저하될 수밖에 없으니 재고 부탁드립니다.”

매우 정중하고도 조리 있는 편지였지만, 국방부에서의 답변은 매몰차기 그지없었다.

“정부는 지금 흉작과 원조 감소 등으로 인한 식량 부족 때문에 말이 아니오. 비단 백경뿐 아니라 모두가 어려움을 나눠야 하지 않나. 범정부 차원에서 물가 안정에 힘을 쏟고 있는 만큼 협조해 줬으면 하네.”

“알아봤나.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옙. 이건 심증이지만 수도권 방위 사령부에서 기획한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강철완 쪽에서 압력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베트남전에서 불명예스럽게 귀국한 일로 준장 승진에서 열외된 강철완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 아무리 성과 내기라도 제놈도 군인인데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대통령께서 올해를 식량자급의 해로 천명했으니 핑계가 좋지 않습니까. 윗선 비위도 맞추면서 엿도 먹이고 일석이조죠.”

“이제 어차피 철수가 가시화된 상황이니, 막나가자는 거겠지. 재무부나 농림부 입장에서도 환영할 일 아닌가. 작년부터 병충해로 농사가 흉작이었으니 사실 당위성이 없진 않지.”

물가를 잡아야 하는 재정부나 쌀값 문제로 항상 골머리를 앓는 농림부 입장에서도 이만큼 쉬운 방법은 없었다. 덕분에 백경이 골머리를 썩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후, 묵은내부터 어떻게 해야 되겠네. 이거 살릴 수 있겠어요 안 선생?”

“냄새 제거도 문제지만 애초에 쓸 만한 쌀이 많지 않습니다. 보관을 잘못해서 썩은 것도 있고 쌀바구미까지 나오고 있어서요.”

“하, 골치구먼. 그거.”

물건의 상태를 확인한 강태준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먹을거리 파동 때마다 짬처리로 소화한 게 군인들이긴 하지만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다.

몇 년 넘게 묵어 곯아터진 쌀을 식량이랍시고 보낸다면 장병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이걸 그대로 보내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겁니다. 바보도 아니고 이렇게 품질이 확 바뀌면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그래. 이걸로 꼬투리 잡아서 베트남 사업에서 열외시키겠다는 거겠지.”

아무리 정부에서 시켰다지만 파월 한국군의 식품공급사업자는 백경식품이 주체 아닌가. 묵은 쌀을 곧이곧대로 보냈다가는 정부를 대놓고 욕하기 껄끄러운 장병들이 백경 쪽에 화를 쏟아 낸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놓고 함정이라도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올해 햅쌀이 나올려면 얼마나 남았지?”

“몇 개월은 기다려야죠. 그래 봤자 내수용이라 수출할 물량은 절대 안 나옵니다.”

“그럼 시중에서 수매 가능하는 방법밖에 없겠네.”

“가능은 하겠지만 엄청나게 비쌀 텐데요. 아시다시피 작년부터 작황이 영 별로라서.”

“일단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쌀부터 되는 대로 사들이게.”

강태준은 지체 없이 곡물 수매에 나섰다. 하지만 3만 명이 넘는 장병들에게 보낼 물량을 확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이은 흉작이 예상되자 곡가는 인상을 거듭했고 일부 소비자와 상인들의 매점매석이 곡가 상승을 부채질했던 것이다.

“이런 개아들놈들. 어떻게 쌀값을 5배를 받아 먹냐.”

“5배라고?”

“아무래도 담합이 아닌가 싶네요. 시중에서 정보가 풀려 나간 것 같습니다.”

강하게 배짱으로 치고 나오니 강태준으로서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골머리를 앓던 중에 뜻하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사장님 나와 보십쇼 여기.”

트럭에 실린 쌀이 내려지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 강태준이 주위를 둘러보자 땀을 흘리는 직원들이 보였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거제도에서 보낸 쌀이랍니다.”

잠바떼기를 걸친 장성량 의원이 팔을 걷어붙이고 쌀을 나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보좌관들까지 낑낑거리며 한몫 거들고 있었다.

“아니, 장의원님.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쌀이 필요하다면서. 이게 다 거제도에서 농부들이 모아서 보낸 쌀이야.”

“예?”

“작년 말이야. 강사장 덕에 풍년이지 않았나. 병충해 걱정도 없었고. 여기 조합장도 자네 덕을 봤다는군.”

그러자 조합장이 웃으며 말했다.

“마누라가 배앓이를 했는데 맹장이 터져서, 근처 병원이 있어서 살았지 뭡니까. 멸치공장 일도 그렇고 여러 가지 해 주시는 일이 많은디 한 손 보태야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가격은 톡톡히…….”

“어차피 정부 수매가격 낮아 남는 것도 별로 없어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지 않습니까. 마음이니 받아 주십시오.”

“그래. 필요할 때 돕는 거지. 어차피 다 우리 장병들 먹일 거 아닌가. 우리가 지은 쌀이 그렇게 의미 있게 쓰인다면 좋은 게지.”

황서방도 무안 미곡처리장에 있던 물량을 한 무더기 보냈다. 좋은 것만 엄선해 보냈는데, 해풍을 맞아 익은 쌀들이 딱 보기에도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품질이 상당하군요. 이 정도면 큰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그래. 여기까지 배송하는 데 고생했으니 다들 수고비 넉넉히 챙겨 줘.”

여러 곳에서 모인 도움 덕에 한숨 덜기는 했지만 맨입으로 털 생각은 없었다.

“묵은 쌀은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창고에 쳐박아 두는 것도 그렇고.”

“완전 계륵이구먼. 저거.”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먹을 수도 없으니 곤란하기 짝이 없다. 사료나 딴 데 섞어 쓰려고 해도 득달같이 난리칠 것이 뻔했다.

“그러면 이걸로 막걸리를 만들면 어떻겠나?”

“에이. 맵쌀로 막걸리 만드는 건 금지하지 않았습니까?”

광필이의 말대로 정부에서는 식량 부족을 막는다는 명목삼아 몇 년 전부터 막걸리 제조에 쌀 사용을 제한했다. 이후 사용 원료의 2할 이내로 백미 사용을 허용했다 이 년 전 백미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바람에 밀가루와 잡곡을 섞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언제 막걸리를 완제품으로 판다고 했나?”

“네? 그러면 어떻게?”

“직접 만들 필요는 없이. 판만 깔아 주면 되지.”

애초에 술을 먹지 말라고 안 먹을 놈들이 어디 있는가.

제대로 된 막걸리를 못 먹어 본 지 벌써 3년이니 술꾼들로서도 환장할 지경이다.

강태준의 예상대로 요 근래 애주가들에게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퉤퉤. 어이 막걸리 맛이 왜 이래? 뭔 맹탕인가?”

“순수 곡주로 빚으면 혼나니 쌀로 술 빚는 거 금지인 거 몰라유.”

“알지. 그래도 최씨네서 가져왔잖아?”

“하필 누룩 거를 때 걸려서 폐업당했지 뭡니까? 최사장이 빤쓰만 입고 도주했답니다.”

양은 주전자를 확인한 황철득이 인상을 썼다. 막걸리 단속에도 사람들은 몰래몰래 술을 사서 마셨다. 큰 통에 막걸리를 담아 집집마다 배달해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필 해당 양조장이 단속에 걸려 폐업 조치를 당한 것이다.

나름 애주가인 황철득으로서는 분노할 일이었다.

“아니 이게 나란가. 술에 쌀 좀 넣었다고 무슨 죽일 짓이라고. 어떻게 막걸리 하나 내 맘대로 못 마시나?”

“아니 고작 술따위에 뭘 그렇게 민감하신가?”

“그게 무시할 일이 아니여. 목민심서에서도 탁주로 요기를 면한다고 했는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허이구야. 웬일로 문자를 쓰시나. 평소에 글줄 하나 안 읽는 양반이…….”

비꼬는 마누라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황철득이 입맛을 다셨다.

“마누라. 그러지 말고 술 좀 담가 주면 안 되나?”

“뭐요?“

“집에서 담가먹는 건 안 걸리지 않소. 그러니까…….“

“참나, 거 개소리 말고 콩나물이나 사오슈!”

등짝 스매싱을 당하고 밖으로 쫓겨난 황철득은 극 분노했다.

“아니, 돈을 벌면 뭐 해. 어째 술 하나 제대로 못 먹나?”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뭐 하나.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니.

투덜대는 황철득이 마주친 것은 정성택이었다.

평소 이야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잘 아는 사이가 아닌 터. 우두커니 선 황철득이 엣헴거리며 아는 척을 했다.

“허허. 이거 공교롭구먼. 어디 가는 길인가?”

“장 보러 가는 중입니다. 마침 기원에 식사 재료가 똑 떨어졌다고 해서요.”

“그래 나도 같은 길인데 동행할까?

잠시 같이 걷던 황철득이 슬쩍 운을 띄웠다.

“요새 쌀값이 올랐다며?”

“많이 올랐죠. 장난 아닙니다.”

“그래서 요새 막걸리도 쌀로 못 담그게 하지 뭔가. 쌀 소비를 아예 금지해 버렸어.”

“아 그래서 요새 예전 맛이 안 났군요.”

상대의 맞장구에 울화가 터진 황철득이 열변을 토했다.

“그지같은 넘들이지. 지들은 와인에 스테끼나 먹는다고. 감히 막걸리를 금지해?”

“허. 악법이긴 합니다요. 사실 금주령이라니 지금이 무슨 조선시댑니까?

“맞아. 사람의 욕망이란 게 그런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오히려 술의 질만 떨어지지 않겠나. 그나마 최씨가 잘 담궜는데 이제 낙이 하나 사라졌어.”

“아쉽네요. 그래도 뭐 누군가 우회할 방법을 찾지 않겠습니까?”

“그러게. 그렇게만 되면 다들 떼돈을 벌 텐데 말이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둘은 시장에 도착한 즉시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식료품점 앞에 큼지막한 드럼통 하나가 놓여 있지 않은가.

덩치 자체가 광고판인 드럼통 위로 영문으로 홀 그레인이라 쓰여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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