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웰컴 투 할리우드
과연 유명세를 떨치던 곳답게 까르티종이니 쿠띠니 마르지에통이니 하는 명품부터 로컬 브랜드들까지 매우 다양했다. 여러 옷들이 걸린 상점을 지나 강태준이 슬슬 보석점을 둘러보는 동안 핸더슨도 눈요기에 바빴다.
“서비스가 참 좋네요. 여기는.”
“물건도 좋고 깨끗하고 그래. 광필이 그노마가 이걸 먼저 봤어야 하는데 말이야.”
강태준은 슬슬 주위를 돌며 다이닝 옵션을 둘러보았다. 유동 인구도 엄청나지만 인상적인 것은 동선을 고려한 배치였다. 만족을 판다는 창립자인 허버트 마커스의 이념을 계승하듯 명품 쇼핑은 물론이거니와 적당한 휴식처까지 세심하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보석의 경우엔 좀 아쉬웠다 강태준이 바라는 건 세련미가 있는 입체적인 제품이었는데 대부분 고전적인 타입의 디자인이라 딱히 눈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정도로는 좀 싱겁네. 좀 올드해 보이기도 하고.’
강태준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업을 하며 접객에 익숙해지다 보니, 눈높이가 높아진 것이다. 미래를 살다 오면서 세련된 디자인에 익숙한 강태준으로서는 당시의 스타일이 취향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마침 에메랄드 귀걸이 한 쌍이 눈에 띄었다.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물고기를 형상화한 디자인이 꽤 우아해 보이는 녀석에 절로 눈이 간다.
‘이건 꽤 괜찮군…… 알만 좀 컸으면 좋을 거 같은데?’
알이 좀 작은 것이 아쉽지만 앙증맞은 디자인 하나는 맘에 든다.
강태준이 설유하가 착용한 모습을 상상해 보던 중,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브라질산 에메랄드입니다. 1캐럿 이하 제품에는 콜롬비아산만큼이나 질이 좋죠.”
“흐음. 그렇군요.”
“보석 보는 눈이 대단하시네요. 사실 그 제품은 어제 들어온 신상이거든요. 벌써 몇 명이 보다 가셨죠.”
점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말쑥한 정장을 입은 모습이 꽤 젠틀해 보였다.
“그게 엔리코 다르마니가 직접 디자인한 제품입니다. 요새 이태리에서 촉망받고 있는 디자이너죠. 혹 어떤 분이 쓰실 건가요.”
“아내 될 사람입니다.”
“오. 피앙세가 계셨군요. 실례지만 나이는?”
“몇 살 아래입니다.”
“호오 딱 잘 어울리시는군요. 혹 어떤 종류를 찾으시는지?”
“묵혀 두기보다 일상에서도 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제품이 좋을 거 같습니다. 여자친구가 법조인이라서 그렇게 튀는 것보다는 좀 단아한 게 어울리거든요.”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점장이 손가락을 튕겼다.
“전문직 여성이 착용할 만한 보석이라. 그래요…… 그렇다면 자, 하나 제가 소개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거 어떠십니까?”
강태준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물건은 수정과 백금으로 장식된 깃털 펜던트였는데 원석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마치 살아 움직일 거 같은 깃털의 문양에 강태준은 강렬한 감동을 느꼈다.
“이건 정말, 예술작품이군요.”
“앤드류 그리마가 만든 역작이죠. 무려 영국 여왕이 착용하는 제품입니다.”
* * *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안, 강태준이 펜던트를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거 예술작품이라 그런지 겁나게 잘 만들었단 말이야?’
대체 이런 느낌을 어떻게 구현한 건지 질감이며 색감부터가 기깔나기 짝이 없다 막 휘황찬란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잘 살린 탓일까. 계속 봐도 빠져들게 만든다.
“형님, 그게 뭔데 자꾸 들여다보십니까?”
“유하 줄 선물이지.”
“유하 씨는 좋겠구먼. 근데 그거 얼마짜리요? 딱 봐도 범상치 않은데?”
슬쩍 손을 갖다 대려는 광필이에게 강태준이 인상을 쓰며 손을 쳐 냈다. 찰싹 손목을 맞은 광필이가 눈을 세로로 뜨더니 이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아우, 뭐요. 형 설마 때렸수?”
“임마. 부정 타니까. 손 떼. 탐내지 마라.”
“아니, 보기만 한다니까. 치사하게 진짜 그럴 거요? 닳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봐 임마. 내 여자가 쓸 건데 니가 먼저 만지작대면 좀 그렇지 않냐.”
“거참, 유난 떨긴. 세상에 더러워서…… 안 봐. 안 봐요!”
버럭 성을 내는 광필이가 툴툴대자 강태준이 서류 더미를 던져 주었다.
“임마, 쓸데없는 일에 관심 가지지 말고 이거나 봐라.”
“어이구, 아주 악덕 상사일세. 여기서도 일감이요?”
“우리가 이번에 투자할 영화야. 리스트 뽑아 본 거니 읽고 외워. 법률 검수까지 받은 거니까.”
“뭐냐. 이게 이건 영화 표지요? 클린트 이스트 우드? 자식이 많이 잘생긴 게 좀 질투 나게 생겼네.
판초에 시가를 물고 있는 남자가 권총 한 자루를 든 채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는 모습이 강렬하다. 광필이가 떠듬떠듬 제목을 읽었다.
“음, 제목이 황야의 무법자? 이게 뭐시기냐.”
“서부극 같은 느낌이네요. 뭐 근데 시나리오가……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아! 이거는 요짐보랑 많이 비슷한데요? 리메이크인가?”
“오 잘 아는구먼. 역시 재갑이가 문화인이라니까?”
“어쩌다 보니 기억하는 거죠. 세상 요지경인데요? 감독은 이태리 사람이네?”
“원래 구로사와 감독이 예술 계통으로는 이름이 좀 있으니까.”
신기해하는 재갑이와 달리 광필이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구로사와? 요짐보? 그게 뭐시깽입니까?”
“임마, 기억도 못 해? 지도 봤었으면서? 니가 사무라이 나오는 영화라고 마구 떠들었잖아. 사무라이가 칼로 두 범죄조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아 그거요. 몇 년 전에 본 거라서 몰랐네. 그게 제목이 요짐보였구만.”
“그걸 웨스턴 스타일로 변형한 게 이거야.”
“근데 그거 쫄딱 망하지 않았소. 형님? 백만 달러인가 투자했다고 들었는데 마케팅비 포함하면 본전 치기도 못 했다고 들었는데.”
“근데 이건 스페인에서 찍은 건데 현지 흥행성적이 준수했거든. 고작 20~22만 달러 정도에 찍은 것치고는 굉장히 잘 빠졌단 말이지. 아마 미국에서 히트하면 시리즈로 제작할 확률이 높지.”
“주인공 빨인가? 신기하구만요. 리메이크작이 더 뜨다니? 그래서 이거에 투자하겠다.”
“입도선매 몰라? 분명히 뜨는 작품이니까. 가서 도장 찍어 와야지.”
그러자 광필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항변했다.
“아니 황당한 소리 아닌가. 그냥 찾아가서 작품 달라고 하면 투자받아 주는 놈이 어디 있수?”
“걱정 마라. 그냥 가는 게 아니야 벤 캠프사 통해서 추천서를 받았으니. 게다가 우리가 누구냐 US ARMY와 계약한 신용인들 아니냐?”
“아니 그거랑 영화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궁시렁대는 녀석에게 강태준이 명함을 내밀었다.
“BK 프로덕션? 내 이름까지 콱 찍혔네? 아니 이건 또 언제 만든 거요?”
“홍콩에 갔을 때 판 거다. 자 우리 재갑이도 주마.”
“음 제가 프로듀서입니까? 저 모르게 연출한 영화가 좀 되네요.”
“쇼 브라더스 쪽에서 크레딧만 넣어 달라고 했지. 돈 좀 쥐여 주니까 해 주더라고. 아무래도 광필이 저놈이 영어가 좀 딸리니까 보좌 좀 잘해 줘.”
그러자 오재갑도 약간 부담이 된다는 듯 명함을 쳐다보더니 물었다.
“뭐 형이 믿는 구석도 없이 준 건 아닐 테고 임무는 뭡니까? 내 감에는 이 서류랑 관련이 있을 거 같은데? 맞소?”
“역시 눈치가 빠르구먼 재갑이. 사실 이 리메이크작이 저작권자 허가 없이 만든 거거든.”
“설마 무단 도용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 다만 일단 저놈들이 정식으로 계약서를 쓴 것 같지 않고, 쓰고 일단 구로사와 측 대리인이라고 하면서 표절로 인한 법적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 주겠다고 하면 놈들도 알아서 만나 줄 거라는 말이지.”
“아니 시방. 형님 말씀은. 지금 우들보고 사기를 치란 말이요?”
그 말에 강태준이 뻔뻔하게 말했다.
“사기는 일이 틀어졌을 때나 사기고, 나중에 구로사와 쪽하고 연결해서 위임장 받으면 되잖아. 선후가 뭐가 중요하나.”
“아니, 그 양반은 일본에 있잖소? 그럼 거기까지 찾아가라고?”
“아니. 여기 와 있어.”
“아니 그 양반이 왜? 일본에서 잘나가는 거장이라며? 등 따습고 배부른데 왜 외지에 와서 고생을 자처하나.”
“세상이 원하는 대로 흐르면 오죽 좋겠냐. 그쪽도 제작사랑 결별했거든. 토호가 독립 프로덕션을 만들어서 떠넘겼다가 사이가 틀어졌는데 요새 경제 사정이 별로일 거야.”
“아니 그 정도로 잘나가는 감독도 힘들다는 거요?”
“예술이란 게 원래 배고픈 직업 아니냐. 게다가 성향이 예술감독이니 상업성과는 거리가 좀 있지 그래.”
“에쿠, 예술한다는 게 쉽지 않구먼요.”
예술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는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 등을 토대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정작 본국에서는 꽤 찬밥 신세였다. 60년대 들어 일본 영화계가 위축되면서 제작비를 구하기가 어려워졌고 기행을 일삼는 성격과 타협을 모르는 성향 탓에 제작사와도 마찰이 잦았던 것이다.
“거참 성격 좀 죽이지.”
“그게 쉽게 되겠냐. 지금 할리우드에서《폭주 기관차》의 감독을 맡아 작품 제작에 들어갔다가 지금 제작사와 싸웠다는데 아마 엎어질 위기라던가?”
“그 정도 몰렸다면 확실히 우리 쪽 제안에 혹할 법도 하네요.”
“그러니 구로사와 쪽은 내가 해결할 테니, 일단 광필이는 세르조 측과 협상을 하라고. 조건은 동아시아 쪽 배급권과 흥행 수입의 일부를 받는 걸로. 한 15프로 정도면 좋을 거 같아.”
“아니 15%요? 원작보다 훨 히트했으면 그건 감독 역량 아닙니까. 저 같으면 아까워 뒤질 거 같은데 진짜 그 정도까지 내놓을까요?”
그러자 강태준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뭐 어때 아니면 소송하겠다고 큰소리치면 돼. 정 뭣하면 가처분 신청 내고 영화 개봉을 못 하게 하겠다고 협박을 하던지.”
“그게 통하겠습니까?”
“미국에서는 소송하면 저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하겠지. 일단 재갑이가 알아볼 정도면 판사도 그렇지 않겠나?”
“그렇긴 하죠.”
“처음에야 강경한 척하겠지만 개봉이 걸렸으니 저 자세로 나갈 필요 없어. 아쉬운 건 되려 저쪽이 될 테니.”
“구로사와 측은요?”
“걱정 말래도, 내가 설득할 테니. 마침 여기에 미국법 전문가도 있지 않아?”
“누군데요, 그리 자신하는 걸 보니?”
“설마, 형수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형수님은 무슨. 처녀 상대로 못 하는 말이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집안에서는 며느리로 취급하는 만큼 공식적인 커플이나 다름없었다. 바 시험에 통과한 설유하는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하버드 로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인까지 맡는 등 광폭 행보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고 할까. 그걸 아는 광필이가 손을 저었다.
“알겠습니다. 알았어. 그런 셈 치지요. 그럼 형님은 이제 뭐 하십니까?”
“나는 따로 만날 사람이 있으니 각자 따로 움직이자고. 아 한 가지만 더. 그 감독은 딕 로버트슨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으니, 잊지 말게.”
“아니, 쓸데없이 뭘 이름까지 바꾸고 그래요? 영화도 히트했다면서 뭐 찔렸나?”
“본인 의사가 아니겠지 뭐. 뭐 그건 그 사람에게 물어보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