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개똥쑥
“저 인간 갈수록 성격이 이상해지는 게 노총각 히스테리네. 형님, 어디 참한 처자라도 소개시켜 줍시다. 저러다 맛 가겠소.”
“이미 서너 번 소개시켜 줬지만, 다 나가리였지 뭐. 아무튼 미모가 어쨌니, 패션이 어떻다고 하면서 까고, 눈이 너무 높아서 못 가는 거지. 진짜로 못 가겠냐? 아직 안 아쉬워서 그래.”
매번 만날 때마다 핑계를 대서 퇴짜를 놓으니, 강태준으로서도 이쯤 되면 의심 가는 수준이었다.
“광필이 형, 혹시 숨겨 놓은 아가씨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러게, 저러는 게 연기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아니면 진짜 어린 여친이라도 숨겨 두고 있는 건지 낸들 아나.”
듣던 중 신빙성 있는 소리였지만 그쪽에 더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전문 의료 인력이 도착해서인지 파월 주둔군의 동요가 가라앉은 것이 다행이랄까.
진찰을 하고 나온 마리아에게 강태준이 물었다.
“복만이 상태는 어때요?”
“안정되긴 했지만 예후를 두고 봐야 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열대열은 아닌 거 같아요.”
“다행이군요. 듣자 하니 이쪽 지역 말라리아가 악성이라던데 치료법은 없나요?”
“클로로퀸이나 키니네가 잘 통하지 않더라도 다른 약이 있으니까요. 근본적인 치료는 안 돼도 열 정도는 통제할 수 있으니,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텨야지요.”
“뭐,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
“현지 약제사들을 모아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현지에서 어떤 약을 쓰는지 대증 요법이라도 알아보면 좀 더 해결책이 빨리 나올지도 몰라요.”
강태준은 곧바로 중의약을 공부한 약제사들을 그러모았다.
남베트남 쪽에서도 나름 인텔리라고 할 수 있는 인재들과 문화대혁명 때 숙청당해 도주한 인력들이 있었던 것이다.
“일단 말라리아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후추와 고추, 명반도 대거 구매했습니다. 말라리아 감염환자들의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군요. 그래도 40프로 정도는 원충을 억제할 수 있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클로로퀸을 쓸 수 없다는 게 아쉽겐 했지만 그래도 약이 있는 게 어딘가. 그러자 광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상하군요. 형님.”
“왜?”
“생각해 보면 정글로 들어간 우리가 제일 먼저 걸려야 하지 않습니까? 온 정글을 뒤지면서 교전까지 벌였는데 방첩대원 중에서 아무도 병자가 없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렇군. 그거 이상한데?”
강태준과 정글에 투입되었던 방첩대원들 가운데는 기적적으로 아무도 병에 걸리지 않았다. 비율상으로 봐도 뭔가 특별한 요인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
그러나 최 중사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거야 우들이 건강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원래 특수부대원들이라고 함은 강철도 씹어먹는 사람들이니까요.”
“야, 미친놈아. 그렇다고 병이 피해 가냐.”
한참을 고민하던 강태준에게 생각이 스쳤다.
‘설마 그 차가?’
강태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동행했던 응우옌 창이 병해 예방이라며 억지로 먹였던 차가 떠올랐던 것이다.
쑥인지 계피인지 모를 이상야릇한 향.
맛없다고 다들 질색팔색 학을 떼었지만, 열병으로 죽은 놈들 사진을 보여 주니, 다들 죽기는 싫다고 꾸역꾸역 다 먹긴 했었지.
심증이 선 곧바로 강태준이 응우옌을 찾았다. 저번 공으로 대위로 승진한 응우옌은 미군 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니, 갑자기 여기는 웬일이세요.”
“대위, 혹시 저번에 우리들한테 먹였던 차 그게 뭡니까? 그 계피 향 비스무리한.”
“아 그거요. 그거, 황화호(黃花蒿)예요.”
“황화호?”
강태준이 알아듣지 못하자 그녀가 친절하게 말했다.
“네, 외가가 화교거든요. 거기서 외할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달여 주셨어요. 그거 먹으면 다바이쯔 같은 열병에도 안 걸리고 좋다고 해서 지금까지 먹게 됐네요.”
“그럼 샘플을 좀 얻을 수 있습니까? 가능하면 덜 마른 걸로.”
“물론이에요. 자 여기 어디에다 뒀더라?”
시들긴 했지만 산야초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풀이었다.
이거를 한국어로 뭐라 하지? 강태준이 와서 보여 주자,
“개똥쑥이잖아. 이거.”
“알아? 예전에 우리 할머니도 좋다고 해서 자시던 건데. 뇌전증 걸린 놈이 먹었다가 발작하는 바람에 큰일 날 뻔했지요.”
“이게 효과가 있는 게 맞나?”
그러자 오재갑이 책을 뒤져 보더니 말했다.
“한방에 쓰이는 제재는 맞는 거 같은데요. 한열 치료와 항암 작용에 쓰인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제대로 찾아보자고. 약제사들이나 한의사들한테 연락해서 알아봐.”
시간이 생명이었기에 강태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중의 연구원 강습반 출신 인재들까지 시간당 동원해 고서 찾기에 시킨 것이다. 시간당 100달러에 성공수당까지 약속하자 눈에 불을 켜고 책을 뒤졌다. 그러던 중 고서를 뒤지던 두쯔밍이 소리를 질렀다.
“유레카! 아, 찾았습니다. 학질과 관련된 부분이 여기 있네요.”
“어디 읽어 봐.”
“개똥쑥 한 움큼을 물 두 되에 불려 두었다가 즙을 짜내어 그 액을 마신다.”
“이게 뭔 소리여?”
4세기 동진시대 도사인 갈홍이 저술한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에 적힌 문구였다. 뭔가 더 구체적인 것이 나올 줄 기대했던 사람들은 고작 한 줄뿐인 설명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다야?”
“예. 이게 전부인데요.”
“아 골 때리는구만. 아주 콤팩트하게 적어 놓으셨어 그래. 이딴 걸 의서라고.”
“실망은 이르지. 일단 진짜 효과가 있다면 엄청난 일 아니겠나? 애초에 그렇게 제대로 쓰여 있었다면 벌써 다른 사람이 발견해서 써먹었겠지.”
머쓱해진 광필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일단 실험부터 시작하자고 미국 쪽에도 협조를 구해 보도록 하지. 이참에 노 이사도 한번 불러와야겠군.”
아무래도 이런 연구는 화학자 도움 없이는 어렵다.
강태준은 곧바로 노기철을 비롯한 화학팀과 한국에서 일하던 한의사들을 일괄 소환했다.
미군의 협조를 받아 말라리아 연구소를 급조한 것이다.
사실인즉 창고에 기초 설비만 갖다 놓은 거니 기본적인 요건도 갖추기 어려웠지만 워낙 상황이 다급했기에 미국에서도 두말없이 허가서를 내주었다.
임상 환자는 넘쳐나고 있었기에 연구는 빨리 진행되었다.
강태준은 매일같이 연구실을 드나들며 진행도를 확인했다.
“잘 되어 가나?”
“글쎄요. 지금 좀 막혔습니다. 일단 후추 같은 물건은 효능이 없는 게 아닌데 클로로퀸 효능에는 훨씬 미치지 못해서.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고요.”
“개똥쑥은?”
“이게 말라리아 기생충 성장을 억제하는 건 확실한데, 아무래도 이거 좀 추출이 까다롭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개똥쑥이라는 게 효과가 없는 건 아닌데, 치료제로 쓰기는 좀……. 이상하게 열탕에서 엑기스를 추출했을 때는 별로 효과가 없네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그냥 즙을 낼 때는 효과가 있는데 열탕에서 뽑을 때는 효과가 없다니.”
“말로만 표현하기는 어렵고, 이걸 보시죠.”
노기철이 강태준에게 영어가 막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하지만 분자 구조가 그림으로 표현된 것 중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몇 개 없었다. 그나마 이해가 되는 부분을 떠듬떠듬 읽은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페록사이드 브리지? 이게 뭔데?”
“이 개똥쑥에서 약효를 내는 성분은 화학적으로 아주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어요. 열에 매우 불안정한데 비극성 성분이기 때문에 물을 이용한 추출 방법을 이용하면 파괴돼서 추출 효율이 많이 떨어집니다.”
“물을 용매로 가열 추출하면. 추출이 균일하지 않다는 건가?”
“네네. 열탕 추출 시 함량이 줄어들거든요. 순수하게 추출한 성분 자체는 효능이 적어서 다른 약재와 섞어 써야 합니다. 그런데 정제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불순물이 섞이면 효력이 반감됩니다.”
“알쏭달쏭하군. 어떻다는 거야?”
“기존의 한약 제조 방식으로는 제한적인 효과만 있을 뿐, 제대로 약성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이죠. 게다가 여기서 추출한 엑기스는 독성이 강해서 산성 부분을 없앤 뒤에 추출해야 합니다.”
“효소 추출은?”
“그것도 안 됩니다. 그럼 제품의 질이 변하니까요.”
보통 한약재는 달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개똥쑥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열에 의해 성분이 파괴되어 그런 일반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시 그 이야기를 듣던 강태준이 아이디어를 냈다.
“고온 추출로 약효를 내기 어렵다면, 차라리 냉침으로 뽑는 법이 있잖은가? 커피처럼 말이야.”
“네? 맹물로는 안 뽑히는데요?”
“아니, 용매가 물이나 알콜이 전분가? 물이 용매로 부적절하다면 딴 걸로 뽑으면 되지.”
“그렇긴 하지만 독성 때문에 간에 부담이…….”
“뭐 일단 약성 추출이 우선이지 독성이야 나중에 제거할 수 있지 않나?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일단 사람이 죽고 살고가 문제지, 몸 망가지는 게 대순가. 독이 있어도 뒤지는 것이 낫지.”
“그 말이 정답이네요. 그럼 해 보지요.”
“최대한 빨리 부탁하이. 환자들이 죽어가고 있어.”
복만이는 고열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황. 삼일열 같은 증상이길 바랬지만 발열이 계속되면서 매일 열이 나고 체온이 39~41℃로 상승하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헛것을 본 듯 헛소리를 지껄이는 녀석을 본 강태준이 갑슨에게 물었다.
“어떱니까? 상태가?”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해 두셔야 할 거 같습니다. 오늘이 고비일 거 같네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제대로 된 약이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이대로는……”
“젠장, 약이 없나. 그럼 다른 거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강태준이 씁쓸함을 삼키는 사이 핼쑥해진 노기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룻밤 새 얼굴이 반쪽이 된 노기철이 곧바로 약병을 건네주었다.
“이건?”
“에테르로 추출한 물건입니다. 어떻게든 독성을 제거하긴 했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고맙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일단 먹여 보자구.”
강태준이 서둘러 약을 먹였다. 쇠약해진 복만이는 홀로 거동하기 어려웠기에 마리아가 숟가락으로 한 스푼씩 떠서 입에 넣어 주었다.
병색이 완연한 녀석은 약도 제대로 마시지 못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약을 자꾸 흘리는 녀석의 행동에 입을 닦아 주는 마리아.
순간 발작하던 녀석이 강태준을 찾았다.
“형……! 형!”
“그래 여기 있다. 여기 있어!”
강태준이 엉겁결에 손을 잡았다. 손은 얼음장처럼 차디찼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탁했다.
“나 설마 죽는 거요?”
“죽기는 무슨!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하나. 약 먹었으니까 곧 회복될 거다.”
“근데 와 이렇게 춥나. 아따 눈앞이 왜 이러나. 헛것이 보이네. 내 형 땜시 고생한 거 생각하면 참, 대충 살 걸 내가 너무 열심히 살았…….”
복만이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축 늘어지자 사람들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복만 씨!!”
“임마! 죽지 마! 뒤지면 너, 내가 하늘 끝까지 쫓아가서 끌고 온나!”
“그래 형이 잘못했다! 평생 놀고먹어도 좋으니까. 살아만 다오!”
이렇게 가 버리면 외삼촌을 볼 낯이 없지 않은가. 다시 태어난 후 혈육의 정을 느낀 것은 복만이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강태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마리아 역시 밤새도록 간호를 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