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온양 호텔
유심히 도면을 살핀 차강진이 곧바로 위치를 파악했다.
“봉곡사 근처로군. 이쪽은 영인산 일대인 거 같은데, 지역을 보니 아산읍 쪽인가?”
“잘 아시네요. 정확히는 부여 온양 일대입니다.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죠.”
“나도 아네. 예전에 세종대왕께서 안질을 치료했다는 곳 아닌가. 일제에 온양온천 주식회사가 독점으로 온천장을 경영했던 걸로 아는데. 그땐 경남 철도 주식회사가 경영하던 신정관과 일본인 소유의 탕정관 등 2개소뿐이었는데 말이야.”
강태준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오, 그걸 다 기억하십니까?
“신혼여행을 그쪽으로 갔으니 당연히 알지. 첫날밤에 온천에 처음 들어갔다가 물 온도가 너무 뜨거워 껍데기가 벗겨질 뻔했거든. 하마터면 거기가 데여서 첫날밤도 못 치를 뻔했지 뭔가. 지금 생각하니 다 추억이구만. 그런데 음식점이라기엔 이거 규모가 생각보다 큰데…… 무슨 영빈관이라도 지을 생각인가?”
삼각꼴 모양으로 그려진 표지에 그려진 영역은 확실히 음식점 부지라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규모다. 강태준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향후 유동 인구와 물동량이 늘어날 때를 대비한 영역입니다. 주차장과 각종 부대시설을 배치할 공간입니다. 추후에는 이 지역을 온천 관광지 내 숙박시설로 개발할 계획이거든요”
“여가시설이라면, 호텔 말인가?”
“관광이나 여가를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시점에서 휴양지라면 경주나 제주 정도 아니겠습니까. 동래온천을 제외하면 서울에서 가까운 여행지로 각광받을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지요. 원래는 태동산업에서 추진하는 사업이었는데 저희 백경이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호오. 그래?”
사실 저번 습격 사건과 관련해 사실 강태준은 이번 파벌 싸움이 죽고 죽이는 심각한 분쟁으로 번진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찰나였다 그러다 태동산업의 부사장이 되어 재무 지출 상태와 사업비 구조 조정을 검토하던 중 심익태가 온양 쪽 일대에 대규모 투자했던 정황을 확인한 것이다.
심지어 심익태는 이쪽 일대의 개발과 관련해 사업비 견적을 뽑는 것은 물론이고 구체적인 개발사업계획서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심익태 그 양반이 대책 없이 사업을 벌이기만 한 줄 알았더니. 땅 보는 눈썰미 하나는 대단했군. 설마 이 지역까지 손을 뻗칠 줄이야.’
아산읍 온천동에 위치한 온양온천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 중 하나다. 관광지로서 잘 가던 1960년 말엔 하루 출입 인구가 무려 17만 명을 찍기도 했던 이곳은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기 전 70~80년대에는 대한민국의 신혼부부가 7~8할은 이 지역에서 첫날밤을 보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던 지역이었다.
‘무엇보다 충남 부여는 김필중의 고향이자 정치 기반이지. 그래서 남형욱이 그렇게 똥줄이 탔던 거야.’
김필중으로서는 자기의 고향을 경제적으로 번성시킬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 파트너로서 심익태를 선택했던 것이다.
돈 냄새를 맡은 심익태는 단기적으로는 엄청난 투자가 수반될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인 입장에서 보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태동산업의 새 사장으로 보임한 양재문은 입장이 달랐다. 평생 선장으로서 어업이라는 한 우물만 파 온 양재문 사장의 입장에서는 아직 개발계획 인허가조차 받지 못해 지반공사도 진행되지 않은 사업에 투자한다는 것은 부담스럽기 짝없는 일이다.
양재문으로서는 전임 사장의 급작스런 죽음과 테러로 인한 뒤숭숭한 분위기를 바로잡고. 회사의 재무 건전성을 확보해 실적을 내는 것이 우선순위였던 것.
그래서 강태준이 이 알짜배기 개발 부지를 받는 대신 자금난을 겪고 있는 태동산업에 토지 대금을 분할 납부 방식으로 토지를 받아오게 된 것이다.
“예. 역 근처라 접근성도 좋을뿐더러. 요사이 섬천 개발 주도로 온천공을 계속 개발 중이지요. 총 38개 공의 온천공이 온양온천 중심부에 걸쳐있다고 하니, 개발하면 향후 잠재력이 충분한 곳입니다.”
“흠. 하지만 이쪽은 온양 아산호텔이라고 이미 강력한 경쟁자가 있잖은가. 이미 지척에 호텔이 있다면 개발허가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처음은 호텔영업이 아닌 요식업에 진출하는 겁니다. 그 뒤에 상황 봐 가면서 단계적으로 접근해야죠.”
일종의 눈속임이지만 강태준은 개발계획 허가를 받을 자신이 있었다. 공사의 주체는 달라졌지만 강태준 역시 애초에 김필중 라인으로 분류되고 있지 않은가. 실 역사에서도 김필중은 이 지역을 거점으로 상아 충남의 맹주로 활약했던 만큼 향후 정치생명을 길게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공들여 가꿔야 할 텃밭인 것이다.
“자네가 그렇게 확신한다면야. 이렇게 되면 기존의 관광호텔과 완전히 마주 보는 구도로 지어지겠군. 공사비 단가가 꽤 세겠는데?”
“얼마로 추산하시는지요?”
“아무래도 한옥 형태로 건설하려면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것보단 평당 단가가 두세 배는 들 테지. 직접 현장을 보지 않고서는 정확한 산정이 어렵겠는걸. 최소한 지반 상태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나?”
대부분 온천은 지하에서 열원이 존재하고 그 위로 투수성이 높은 퇴적암층을 사이에 두고 있다. 마치 열판 위에 올린 주전자가 따뜻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
다만 대수층에서 물을 빼면 그만큼의 공간이 남게 되어 지반이 취약해지므로, 이 부분을 확인해야 하는 것. 그 말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강태준이 말했다.
“그럼 현지 답사 겸 시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흠. 나랑 말인가? 이 늙은이 비위 맞추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래도 시간 좀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울에서 온양까지 일찍 출발하면 하루 당일치기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차강진이 옆에 있던 비서에게 물었다.
“흠…… 정 그렇다면야 이번 주는 좀 어렵겠고, 김 비서, 다음 주 일정은 어떻지?”
“다음 주 화요일쯤, 다소 여유가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럼 그날은 비워 두게. 좀 피곤하던 찰나였으니 간만에 뜨끈한 곳에서 등이나 지져야겠군.”
“알겠습니다. 사장님.”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반쯤 넘어왔군.’
강태준은 확신했다. 사실 현지 답사를 가는 목적은 사실 고작 그뿐만이 아니다.
이런 사업을 혼자 진행하는 건 무리인 만큼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돈 많은 투자자가 필요하지 않겠나. 그래서 이참에 제대로 눈도장을 찍어 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 * *
그로부터 사흘 후, 온양온천역.
오일장이 열린 온양장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경운기나 소마차를 싣고 다니는 상인들. 아침 일찍 도착한 강태준 일행이 오일장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강태준이 인파를 돌아보며 사방을 훑었다.
“이야. 이렇게까지 유동 인구가 많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대단하군.”
“그러게요. 최근에는 기차로 충남선 일부 구간이 개통되었다는데요. 더욱이 천안에서 온양까지 시외버스가 증편된 데다 휴일에는 관광버스로 들어와서 급격히 인구가 늘었습니다.”
오재갑의 말에 강태준이 관심을 보였다.
“시외버스라고?”
“네네. 요 근래 천안-온양, 서울-온양 구간 시외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던데요. 관광버스는 요일별로 운행하는데 경기도 포천, 가평, 양평, 시흥, 광주에서 온답니다. 왕복 운임은 온양온천 300원 정도라는군요.”
“서민 대상으로 하긴 좀 비싸구만.”
악극 관람료가 50원, 소설책이 70원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가격이다.
오재갑이 다시 덧붙였다.
“그래도 기차보다는 싸고 접근성도 좋으니 수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서울 근교서 나들이를 떠나고픈 사람들에게 꽤 호응이 있습니다. 남한산성부터 우이동까지 주 4∼5회 수준으로 운행되는 모양인데 오전 10시 무렵 출발해 오후 5시께 돌아오는 일정으로 잡았다네요.”
“사업모델이 그럴듯한걸. 누군지 몰라도 머리가 좋아.”
사실 이 지역이 개발된 것은 그닥 오래되지 않았다. 60년도에 5일장에서 장사하던 상인 60여 세대가 모여 농토를 매입해 시작한 것이 그 기원이랄까. 먹고살기 위해 자연스럽게 국밥장사나 막걸리집 등 먹거리촌이 형성된 것이 이렇게 큰 규모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마땅한 여가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관광지 주변으로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번성한 줄은 솔직히 기대 이상입니다.”
“그러게. 가격도 많이 올랐더구먼. 온양역 근처 목 좋은 지역은 한 평에 분양가가 몇천 원인 곳도 있다고 해.”
“허어, 그 정도면 서울 웬만한 도심지 택지가격 못지않은데요.”
혀를 내두르는 김광필에 오재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역세권이니까요. 다만 철길 쪽 위치가 거리가 있어서, 그게 좀 아쉽군요.”
“그건 솔직히 어쩔 수 없겠지. 원래는 온주동 쪽으로 철도 노선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지역 유림들이 반대해서 여기 놓인 거라는군.”
“꼰대들 하고는. 나중에 정말 후회했겠네요.”
“뭐 그러게. 굴러온 복을 차 버린 셈이지만 어디 되돌릴 수 있나. 그래서 운이란 게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야.”
이런저런 말을 하며 일행이 거리를 돌아다니던 중 깡통 골목으로 유명한 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깡통을 펴 작은 그릇에서부터 양푼까지 뚝딱 만들어 내는 곳. 주변을 둘러보던 강태준은 시범 삼아 수저 몇 개를 들어 품질을 살폈다.
“이거 은근 괜찮은데. 재질이나 만듦새도 괜찮군. 재료는 어디서 나오는 건가?”
“서울 의정부와 평택 등지에서 미제 깡통 드럼을 공수하고 있답니다. 양 지역 토박이분들이 많아 신뢰도가 높지요.”
그 외의 다른 곳을 보니 새우젓이나 황석어젓 등 장류가 많았다. 수산물은 대부분 천안에서 공수해 가공하는데 일부 상인들은 전용 토굴을 갖추고 있어 서울 쪽에서 시외버스 타고 젓갈 사러 온다는 소리도 있을 정도로 이름난 곳도 몇몇 되었다.
‘천안이라, 그럼 우리 쪽 물건도 한번 팔아 봄 직한데.’
무안 쪽에서 생산되는 오징어나 젓갈이 유명한 만큼, 이쪽 지역에서 거래처를 뚫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한 일. 강태준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디선가 큰 소음이 들렸다.
뻥!~
그때 시꺼먼 무쇠 기계가 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뜨거운 열기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번지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성업 중인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자,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차강진이 갓 튀겨나온 뻥튀기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친절한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미소를 띤 얼굴. 마지막 아이가 사라지자 강태준이 인사를 했다.
“벌써 오셨습니까? 미리 말씀 주시지 않고?”
“허허. 시장 구경에 정신이 없어서 말이지. 강 사장도 생각보다 빨리 왔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 태연하게 붕어빵을 해치우는 차강진.
군복을 리폼해 만든 등산복 차림으로 무장하고 온 것이 영락없는 동네 할아버지다.
마치 뒷산에 마실을 나온 듯한 모습에 강태준이 웃었다.
“그 옷도 은근히 잘 어울리시는데요.”
“원래 작업복으로 쓰던 걸세. 이번 작전은 적진 탐사 온 것이나 다름없잖나? 호들갑스럽게 광고하며 다닐 이유도 없고 말이야. 일단 부지 주변부터 미리 점검해 봤네.”
“오 벌써요? 대충 어떻습니까.”
“뭐 단단한 암반 지형이라 지반 개량이 크게 필요하진 않을 거 같더군. 윗 지질이 화강암류라서. 용출되는 온천수의 수온은 44℃~60℃ 내외라 딱히 깊이 팔 필요도 없고 말이야.”
“그렇습니까? 공사에 품이 덜 든다니 다행이군요.”
강태준으로서는 꽤 반가운 소식이다.
“토목 공사상 별문제 없을 거 같긴 하네. 하지만 지형상 도로연계 구간과 확장이 가능한지 지적도를 봐야 할 것 같으니 추가로 시간이 걸릴 거 같아.”
“그럼 주변 여건 파악도 할 겸 이참에 시내 관광이라도 하시죠.”
양해를 구한 강태준은 차강진과 함께 아산 탐방에 나섰다. 심 사장이 수매해 둔 부지가 곳곳에 산적해 있는 만큼, 하나하나 쭉 둘러볼 요량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