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94화 (194/361)

194화 용당 목재

스승님이라니?

염소수염을 한 노인의 말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토끼 눈을 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 강 사장한테는 미리 말을 못 했구먼. 사실 이쪽은 제 스승님이신 차강진 회장님이셔. 회사가 동구 좌천동에 있을 때 그때 일 년간 목공 일을 배운 적이 있거든.”

그 말에 차강진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진짜 오랜만에 보는구나. 전쟁 전에 봤던 이후로 처음이던가?”

“예. 아마도 한 10년 되었나? 세월 참 빠르군요”

“거, 무정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간 연락 한 번이 없더니. 지 필요할 때만 찾아오나?”

“아이구 그런 게 아닙니다요. 그게 사업 망하고 좀 방황했던 터라 좀 심란했거든요. 여기저기 빌린 돈도 많고. 그렇다고 손 벌리기도 염치가 없어서…….”

무안한 듯 고개를 숙이는 최달건에 어깨를 토닥이는 차 사장이었다.

“내 추궁하려는 게 아니다 이놈아. 어려우면 어렵다고 하지 미련하게 혼자 끙끙 앓기는. 암튼 신수가 훤해 보여서 다행이구먼. 그럼 여기 분들은 일행이신가?”

“예. 먼저 이쪽 분부터 소개 올리지요. 저희 회사 오너이신 강태준 사장님, 그리고 이쪽 분은 안연복이라고 실력이 아주 좋은 숙수로 유명하신 분이죠.”

최달건의 소개에 강태준이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백경산업 강태준입니다.”

“안연복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차강진일세. 이렇게 젊은 친구들을 알게 되어 반갑구먼. 그보다 백경이라면 자주 들은 이름인데, 혹 조미료 사업으로 유명한 회사 아닌가?”

“맞습니다.”

“대단하군. 사세가 대단하다 들었는데 사주가 이리도 젊을 줄은 몰랐구먼.”

“소문은 어디서나 과장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사업가로 치면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일 뿐입니다.”

“하하, 겸손하기까지. 아 듣자 하니 이번에 피습을 당했다 들었는데, 어디 건강은 좀 괜찮나?”

“멀쩡합니까. 다행히 좋은 의사를 만나 회복이 빨랐습니다. 좀 이물감이 남기는 했지만 특별히 움직이는 데는 무리 없습니다.”

“큰일 치렀군.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게. 젊을 때 몸 상하고 고생하면 나이 들어서 서러워. 나 좀 보게. 이렇게 늙어 빠져서는. 이제는 쌀 두 포대도 들기 힘들다니까.”

“아이구 스승님도 참. 아직 이렇게 정정하신데요. 그리고 쌀 두 포대면 어지간한 장정도 못 듭니다.“

“암튼, 만나서 반가우이. 우리 달건이를 잘 살펴 줘서 고맙네.”

“어인 말씀을.”

나무껍질 같은 손은 비록 거칠었지만 활력이 넘쳤다. 돈 많은 재벌 회장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검소하고 소탈하기 그지없는 외모.

차강진 회장은 말 그대로 바닥부터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인의 가구점에서 심부름하며 목공 기술을 배운 차강진은 타고난 근면함을 바탕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목수로 이름을 떨친다. 이후 알뜰살뜰 모은 4,000원으로 동구목재소를 설립, 해방 후 목재 부족이 극심했던 시기, 돌파구로 택했던 합판 사업이 대박이 터지면서 리즈 시절인 60년대 중반 재계 1위 자리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60~70년대를 주름잡은 대기업으로서 교육과 사회사업에도 진출했던 차강진이었지만 호사다마라고 불운은 난데없이 찾아왔다. 80년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5공 정권이 정치자금을 얻기 위해 기업을 통째로 강탈해 버렸던 것.

졸지에 멀쩡한 기업을 빼앗긴 차강진은 화병으로 사망했고 그 여파는 부산 경기 전체에 미칠 만큼 실로 대단했다. 전생에서 강태준의 할아버지 역시 용당 쪽 협력사로 일했지만, 용당의 파산하면서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버렸던 것이 어쩌면 강태준이 바다로 나가게 된 원인이었다.

이런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강태준으로서는 그를 바라보는 기분이 무척 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음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아닙니다. 그보다 여기는 목재소 규모가 어마 무시하군요. 그보다 범일동 쪽에서 원래 사업을 하시던 걸로 아는데 용케 이렇게 큰 부지를 새로 얻으셨군요.”

“범일동 땅은 규모가 좀 작아도 성장에 한계가 있더군. 더욱이 합판 사업을 하려면 물류가 용이해야 하지 않나. 국내 원목 수급이 한계에 오면 원목을 수입해야 해서 일부러 선박 접안이 쉬운 해안지역으로 골랐다네. 근처 가구 공장이 있어 가공도 쉽고. 무엇보다 태풍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고 사원들 모두가 반가워하더군.”

“확실히 부두 근처라 물류 이동이 편하겠네요. 원목 수급과 운송에서 유리할 거 같습니다.”

당시 목재는 부산항 2~4부두에서 보관, 처리하고는 했는데 공장과 떨어져 있다는 점을 감안해 용당 앞바다에 바로 목재를 수입하고 수출하기 위해 부두를 처음부터 새로 지은 것이다. 덕분에 한적한 포구에 지나지 않던 용당동 갯가와 주변 구릉을 연차적인 계획에 따라 꾸준히 사들이면서 공장 부지를 확장해 나갔다.

향후의 사정은 어쨌든 간에 지금의 용당 목재는 전후 건설 붐과 맞물려 그야말로 돈을 끌어 담는 중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일행은 드넓은 물류단지를 지나 한옥으로 된 교육관에 도착했다.

근대식 마당으로 된 한옥 앞엔 멋들어진 한문으로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은은하게 솔향이 풍겨 나오는 모습에 감탄하는 사람들. 차강진이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여기는 우리 회사 부설 연구소일세. 주로 한옥 기술의 발전과 부재의 표준화를 위한 연구에 매진 중인 곳일세.”

“연구소라 엄청난 규모인데요?”

“허허, 규모도 규모지만 사람들도 보통내기들이 아니야. 여기 있는 인원들은 다들 이 업계에서 방귀 좀 끼던 경력자들로만 모았거든. 다들 최소 경력이 20년은 되는 베테랑들이지.”

과연 설계부터 집을 짓는 대목수들과 가구를 만드는 소목수들, 기와를 다루는 와공들과 절집과 궁궐에서 볼 수 있는 단청 기술을 보유한 화공들까지. 무려 오너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모두들 제작도면에 따라 제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20 크기로 작게 만들어 놓은 미니어처 모형이었다. 실제를 정교하게 구현한 모형은 마치 현실 작업장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붕어빵이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춘삼이가 신기하다는 듯 유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와우, 이건 건축 모형입니까? 이런 건 처음 봅니다.”

“하하. 고객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도면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이편이 접근성이 높을 것 같아서 말일세. 크기는 작지만 최대한 실제 한옥 제작 방식과 흡사하게 만들었다네.”

“이야. 진짜 집처럼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네요. 그런데 화장실이나 실내 장식까지. 대단합니다.”

내부가 드러난 미니어처 주택 안에는 심지어 자그만 가구까지 들어있다.

내부를 유심히 살피던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 구조는 꽤 현대적이군요.”

“집은 시대에 따라 필요가 변하지 않나. 전통을 지키더라도 생활에 불편하지 않아야지. 도시에서 옛 고리짝처럼 나무로 때는 온돌을 놓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전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따라온 인원들 역시 신기한 듯 모형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실제로 이쪽에서 집행한 수라청 복원공사나 탑골공원 팔각정과 대웅전 신축 등 그간 진행했던 굵직한 공사들이 모형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도색은 물론 주변의 지리까지 완벽하게 구획이 나뉘어 구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짜 수집가들이 탐내겠는데요. 이 정도 디테일이라니. 내공들이 대단합니다. 근데 한옥이란 것이 표준화가 가능한 물건이던가요? 같은 지역이라도 땅의 생김새와 건축주 요구에 따라 주문형태가 다르고 가공방식이 다를 텐데요.”

“가공기술이나 실력 면에서는 딱히 문제 될 것이 없지. 하지만 사실 한옥에서 가장 문제 되는 부분은 원자재 공급이랑 제작 단가야. 원목 확보와 가공비 때문에 치목장을 운영해 생산원가를 낮추고 있지만 목재 가격 상승 폭이 워낙 빠르니 말이야.“

“하긴 어떤 주택이든 기본적인 요구사항은 대동소이하니 말입니다.”

“맞아. 이 부분을 카탈로그화 하면 건축 시간이나 비용이 단축되겠지. 그러면 자재 낭비나 헛된 수고도 줄어들고 말이야.”

“흠. 그게 무슨 뜻인가요?”

당최 이해하지 못하는 춘삼이의 말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차강진이 운을 떼었다.

“음. 그럼 예를 들어 설명해 볼까? 지금은 표준화된 메뉴얼이나 시방서가 없어 예를 들어 고객이 주문한 사양과 부합하는지, 단순한 주문명세서로 확인이 어렵고, 직접 주문 후 확인, 검수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지.”

“맞습니다, 저희도 주문해서 납품할 때 참 곤란한 경우가 있어요. 주문자의 요구사항이 애매하거나 사양이 실제랑 달라서 현장에서 재가공하는 것이 어려워서요.”

강태준이 이어 말했다.

“그렇다고 그걸 반품하면서 시간이 지체되기도 하지. 그러다 보면 고객과 트러블이 생기기도 하니까. 감정이 상하여 거래가 끊기기도 하지.”

“맞아. 거래하다 보면 누구나 자주 겪는 문제야. 공급 사양과 치수가 실제와 맞지 않거나 오류가 발생하면 부실의 원인이 누구한테 있는지 따지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 부재를 다시 제작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목재 부재나 가공품을 미리 제작하여 따로 납품 검사를 따로 생략할 수 있다면 부품 조달에 시간과 수고가 덜 들지 않겠나?”

“아, 그래서 부자재를 미리 표준대로 만들어 둔다는 겁니까?”

“단가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겠군요. 목수의 기술과 역량에 따라 만들어진 부품의 품질의 편차가 큰 것도 비용과 공사 기간을 늘리는 한 요인이니까요.”

강태준의 말에 차강진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옥의 대중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사실 비싼 시공비지. 기존의 한옥은 벽체를 세우는 데만 3개월 이상이 걸릴 만큼 건축 기간이 길고 제작비의 절반 이상이 인건비로 들어가니까. 하지만 지붕이나 벽체, 창, 문, 온돌 같은 핵심요소를 표준화해 대량생산을 한다면 건축비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도면을 매번 그리는 대신 카탈로그에 실린 치수표를 보며 원하는 부품을 지정하면 확실히 작업시간이 단축될 것이다?”

“맞네. 사실 이 조그만 모형은 사실 실 비율과 동일하게 만들었네. 다만 크기만 다를 뿐이지 실제적인 차이는 없는 셈이지. 숫자 기호의 조합이 상품 번호가 되고 카탈로그에 상품 가격이 적혀 있다면 견적이나 가격 교섭이 따로 필요 없지 않겠나?”

“확실히, 단순하지만 획기적인 방식이군요.”

마치 레고 같이 부품을 대량으로 생산해 놓고 원하는 대로 끼워 맞추겠다는 발상 아닌가.

차강진이 눈을 빛내며 열정적으로 역설했다.

“이건 사실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해. 현재 한옥 부자재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 중인데, 수요 강원도 대관령 지역에 자생하는 금강송은 개체 수가 줄고 있거든. 강원 영서와 수도권 국유림관리소에서 생산되는 대경재 공급 물량을 합쳐도 전쟁 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네.”

“흠. 수급 문제가 그 정도로 심각한지는 몰랐습니다.”

“허허. 분단 전에는 괜찮았지. 백두산이나 함경도 쪽에서 목재를 수급했거든. 하지만 이제는 북쪽과 왕래가 끊겼잖는가. 남한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산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데다 단단한 침엽수가 적거든. 특히 서까래, 대들보 등에 쓰이는 육송 자재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일세.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정용 취사 난방에 목재를 많이 쓰다 보니 근처 뒷산이나 살림에 들어가 땔감을 채취하는 일도 잦았다. 문제는 아무리 정부가 석탄 같은 대체재를 대신 쓰라고 권고와 규제를 실시해도 예전부터 평범하게 해온 일이다 보니 딱히 이런 행위가 근절되지 않았던 것이다. 차강진의 설명에 강태준도 심각하게 들었다.

“산림 고갈이 가속화되고 있다니. 국가적 차원의 녹화 사업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해결하기 힘든 문제군요.”

“그렇지. 저번 정부에도 한 번 건의해 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지. 신정권은 아무래도 추진력 하나는 있어 보이니 조금 다르려나. 하하. 아무튼 의뢰인을 두고 넋두리가 심했구먼. 그래서 그쪽에서 주문하고 싶은 부재는 뭔가?”

“그 전에 여기 배치도면부터 봐 주십쇼.”

강태준의 말에 춘삼이가 미리 가져온 지도를 펼쳤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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