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43화 (143/361)

143화 아킬레스건

강태준의 논리적인 말에 광필이도 일견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심증이긴 하지만 충분히 일리는 있군요. 밀수란 게 원래 정관계 커넥션이 없이는 힘든 일인데, 그렇다면 십중팔구 뒷배를 봐주는 세력이 있지 않고서야 힘들죠.”

“그래. 이런 건수는 절대로 기업가 혼자서는 못 하는 일이지.”

심각하게 주고받는 둘의 이야기에 춘삼이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그럼 멀리 갈 것 없이 언론에 제보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뭘 들었나? 설마 기자 중에 아무도 그 내용을 몰랐을까? 지금까지 쉬쉬했다는 건 알아도 눈감아 줬다는 걸세. 더욱이 마땅한 물증 없이 광고주인 대기업을 건들었다간 뒷감당이 무섭겠지.”

“확실히, 증거도 없이 밀수죄를 몰아붙일 수야 없겠죠. 잘못하면 되레 역풍을 맞을 우려도 있으니.”

“그래. 상대가 상대다 보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막상 수사에 들어가도 눈 가리고 아웅 하던가, 꼬리 자르기로 도망갈 확률이 높아.”

“그럼 굳이 파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지금 같은 시기에 밀수를 범죄 취급하기도 좀 애매하지 않겠습니까?”

어이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밀수에 대한 죄의식이 거의 없었다. 아즈하라항을 거점으로 삼은 밀수선들은 대놓고 세관과 해운국 검역소 용지와 공인 등은 물론 위조된 선원수첩, 선박 증서, 출입항 관계 서류 등까지 버젓이 비치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때만 해도 영도 앞바다에 수십 대의 전마선이 모여들고 이를 해산시키기 위해 감시선에서 위협 사격이 가해지는 일은 하루걸러 매일반처럼 일어나는 일.

전쟁의 후유증이 치유되지 않은 시점에 생필품이 아쉬운 어민들은 직물, 화장품 등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잡화를 실어 나르는 특공선의 출현을 은근히 환영하기까지 했다. 강태준도 그 점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 규모였다.

“정도의 문제지. 현찰로 수백만 불이 넘는 밀수품을 몰래 들여온다면, 그건 경제 질서를 대놓고 교란하는 행위지. 그럼 충분히 사회적으로 문제 될 사안이 아닐까?”

“수백만 불 어치를 말입니까?”

“암시장에 풀린 물량을 토대로 계산해 보면 그것도 최소치야. 오성 입장에서 보면 근래 설탕 관세가 올랐으니 손해를 벌충하려 들 것이 아닌가. 작년에 환율이 두 차례나 올랐고, 설탕과 관련된 세액도 물품세에서 원료세로 인상되었으니. 알아보니 원당 1킬로당 15원이나 관세가 붙더군. 이병구는 절대로 그런 상황을 좌시하고 있을 인간이 아니야.”

강태준은 확신했다. 오성제당이 설탕공장을 설립한 직후부터 정부는 설탕을 수입제한 품목으로 지정하여 사실상 수입을 금지했다. 이를 이용해 오성은 십수 년간 시장점유율을 고정시키며 가격을 담합하는 방법으로 국내 설탕 가격을 국제 시세에 비해서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해 왔던 것이다. 김광필도 그 말에 은근히 동의했다.

“그렇지요. 돈병구 그 자식이라면, 수익성 악화를 두고 보지 않겠지요.”

“일본 정부에서 이즈하라항을 거점으로 한 특공대 밀수를 변칙 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방관하고, 심지어 조장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야. 게다가 이번 정권은 작년 초에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까지 제정할 만큼 조직범죄 소탕을 주된 업적의 하나로 공공연히 입에 담는 상황이지. 이런 상황에서 천문학적 규모의 밀수 사건이 터진다면 어떻게 될까?”

“메가톤급 폭풍이겠군요. 제대로 꼬투리를 잡기만 한다면요.”

“그래. 민정 이양을 앞에 두고, 이런 사건이 터지면 묻어 가기 힘들겠지.”

요사이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충분히 시사성 있는 일. 실제로 올해 초 밀수와 관련된 트러블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부산세관의 심리과 직원이 원양 감시차 감시정에 승선했다. 대마도 근해에서 일본의 해상보안청 경비 선단에 포위당하지를 않나. 원양 감시 중이던 부산세관 직원 2명을 대마도 해상 보안청 경비정이 나포해 1개월 동안 억류했다 풀려난 사건도 있었던 것.

그런 상황에서 수백만 불어치의 밀수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건 전 국민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할 임팩트가 있었다.

“아마, 빼도 박도 못하게 증거를 잡아서 한방에 요절을 내야 승기를 잡을 수 있어.”

“흠. 근데 물증을 잡기가 가능은 하겠습니까? 짭새 놈들은 영 신뢰가 안 가는데. 밀수 수사를 맡기면 수사는커녕 되려 그쪽에 고자질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하지 않겠나? 여수랑 부산쪽 에 사람을 보내서 준비해야지. 일단 황철득 사장하고 진중보 과장 쪽에 도움을 청해야 할 거 같네. 안 이사랑 노 대표는 영업을 맡도록 하고, 광필이는 나랑 어디 좀 가자고.”

“아니 또 제가요? 그럼 백화점 영업은 어쩌고?”

“뭐, 이제 증축 공사는 대충 마무리되었잖아. 나머지는 여기 요한이랑 실무진에 맡기면 돼, 일단 밀수 사건을 수사하려면 칼잡이를 구하는 게 우선이지.”

“칼잡이라니, 누구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뭐 니가 아는 놈 있지 않나? 얼굴마담으로 쓸 만한 녀석 말이야.”

“제가요? 아니, 설마? 그놈 말입니까?”

* * *

11월 6일 오후 5시. 여수세관 감시과 조사실

삼 주전 계류장에서의 선박 충돌 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삼양호 선주와 수출업체 직원들과의 날 선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쪽 배와 충돌하는 바람에 우현 주기관의 과급기가 완전히 손상되었습니다. 과급기 한 대에 30만 원인데 수리하는 동안은 조업을 전혀 못 나간답니다. 지금처럼 전어 철에 조업을 못 나가면 손해가 얼만지 아십니까.”

“그건 그쪽 배가 노후한 탓이지요. 애초에 그 정도 충격에 부서질 기관이 아니죠. 주기관 쪽에 있는 배기관에 크랙이 발생했고, 이 손상 부위로 선미에서 유입된 해수가 누출되어 수리한 적이 있다던데요.”

“그간 거센 태풍에도 끄떡없었던 배입니다. 그쪽 배가 이쪽 배를 친 건 전적으로 관리 미스 아닙니까? 게다가 사고 발생 시에 그쪽 업체 직원은 어디 있었습니까? 바람이 불어 닥치는데 비상 근무 직원조차 없었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노릇이죠.”

“고작이라뇨. 관상대 자료에 의하면 초속 30m가 넘는 태풍이었다는데? 사고 당시 숙소에서 직원이 비상 근무 대기 중이었고. 새벽 3시경에서야 사고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한데 당시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풍이 불어 접근이 불가능한 수준이더군요. 그래도 새벽 일찍 사고 사실을 알렸고 오전 8시쯤 중장비를 동원해 긴급 복구에 나섰습니다. 그 정도면 할 일 다 한 거 아닙니까?”

흥분한 목소리로 항의하는 선주에 차분하게 대응하는 수출업체 직원들.

싸움을 지켜보던 신명부가 심드렁한 어조로 되물었다.

“근데 초속 30m라니 그게 빠른 건가? 대체 어느 정도 속도지?”

“평시 10m/s만 되어도 사람이 걷는 데 힘들 정도이고 우산은 찌그러질 정도인데, 30m/s에는 웬만한 간판이 떨어지고, 지붕도 날아갈 정도의 세기랍니다.

“아이구야, 그럼 바람이 잘못했네.”

그 말에 신난 수출업체 직원이 침을 튀겨 가며 떠들었다.

“네. 그렇죠. 측면에 강풍을 맞아 넘어간 배가 무려 세 척입니다. 이건 명백한 자연재해입니다.”

“선대와 선대끼리 안 밀리게 고정해야 하는데, 선대 고정이 안 돼 바람에 밀리면서 옆 배를 밀친 거죠. 묘박 장치 단도리를 제대로 못 한 게 어째서 자연재해입니까. 이건 인재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가해 선박의 선수 방위각에 따라 인명피해로도 귀결될 수 있었던 문제에요.”

수출업체 직원들은 자연재해에 따른 사건이니 보상 불가라는 입장인 반면, 무조건 보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신명부가 짜증을 냈다.

“아 그만! 머리 아프게. 적당히 합의하고 끝내야지, 그래서 기어이 소송까지 가겠다는 겁니까?”

“그, 배상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참작할 부분이 있다 이겁니다.”

“참작할 부분? 이보시오. 수리비라고 꼴랑 5만 원 준다는데 열 받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소?”

“자자, 여기서 이러지들 마시고, 손해가 발생했으면 증거자료 모아서 서류로 제출하세요.”

아웅다웅하는 두 명을 간신히 떼어 놓고 나니 벌써 오전이 다 지났다.

하지만 현장 조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신명부는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탁자 위는 수북한 공판 서류들이 쌓여 있었던 것.

신명부의 이마에 주름이 생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야, 갑자기 이게 뭐야?”

“부장님이 이번에 들어온 사건인데 읽어 보시랍니다.”

막 돌아온 터라, 짜증이 치솟았지만 지엄하신 부장님의 명이니 어쩔 수 없다.

마음을 추스르고 서류를 흩어보던 신명부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배를 모는데 술을 처먹어?”

“반주에 낮술했겠죠. 뭐 흔한 일입니다.”

사건의 전망은 이랬다. 사고 당일 제2 연천호는 부두에 입항해서 선적 화물을 하역하고, 타이어 300ton을 실은 뒤 홍콩으로 출항할 예정이었다. 한데 선장은 혈중 알콜 농도 0.086%인 음주 상태로 예인선도 없이 무리하게 출항했다가 옆 매립 부두에 계류 중이던 선박 다섯 척을 연쇄적으로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문제는 실습선에 약 열댓 명의 승무원과 학생들이 실습 중이었다는 것이 사건을 키운 이유였다.

“연쇄 추돌이라니,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그래서 다친 사람은?”

“다행히 가벼운 충돌이라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네요. 그래도 계류장에 근무하던 항해사가 두 명이 경상이고, 계류 중이던 요트랑 바지선도 일부 파손되었답니다.”

“하,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거는 콩밥 먹여야겠네.

신명부는 가해 선박의 선장을 업무상 과실 선박파괴, 해사안전법 위반과 선박 입출항법 위반, 업무상 과실, 일반교통 방해, 선박 교통사고 도주 혐의 등 사유로 구속 기소하기로 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주섬주섬 외투를 챙기는 수사관들이 서류를 보는 신명부를 보며 물었다.

“거, 신 검사님은 식사 안 가십니까?”

“됐어. 난 짜장면 시킬 테니, 니들끼리 알아서 먹고 와.”

한참 동안 홀로 남아 서류를 마지막까지 검토하던 신명부는 홧김에 서류를 집어 던졌다.

“에이! 시부랄!”

좌천된 지 무려 4개월째. 잡생각을 피하기 위해 일에 집중해 보았지만, 당최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니, 잠시 쉬고 오라는 게 대체 몇 개월째야?”

대체 내가 왜 그랬지. 서글퍼진 신명부는 몇 달 전 호출당한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을 되새김질하던 신명부의 귀로 그때의 호통이 환청처럼 울린다.

몇 개월 전, 서울 동부지검 부장 검사실로 호출된 신명부는 증권파동을 조사했다는 이유를 조인트를 까이는 중이었다.

“야 신 검사. 니 증권 쪽은 일은 왜 건드렸어?”

“서울 동부는 제 관할이니 제가 지휘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이런 멍청한 자식을 봤나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봐야 알아? 이미 다 끝난 일을 대체 왜 들쑤시는 건데?”

“아니, 다 끝난 일이라뇨. 피해자만 5,000명 이상이고, 자살한 사람이 속출한 마당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떳떳하게 고개를 드는 신명부에 피식 웃은 김 부장이 비웃음을 뿌렸다.

“옘병 할, 야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사명감이 투철한 녀석이었다고. 같잖은 정의감 부려서 뭐 하게, 아, 설마 니도 증권하다 비자금 털렸나?”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화들짝 놀라 시치미를 떼는 신명부였다. 강한 부정은 곧 긍정. 그를 흘겨보는 부장의 눈에 자라처럼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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