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백경의 대항마
가만히 듣고 있던 김요한도 감탄하듯 말했다.
“이야, 그게 뭔 소리인진 모르겠지만 대단한 사람이네요. 일본에서 한국인이 그런 성과를 거두려면 대단한 거 아닙니까. 견제가 심했을 텐데 연구 부서로 발탁된 것도 모자라 임원까지 승진하다니. 보통 실력자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러게. 결국 거기로 갔군요.”
강태준은 못내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이게 바로 나비효과라는 건가? 원래 역사대로라면 임태웅은 1950년대 중반기 일본으로 건너가 1년여의 노력 끝에 글루탐산의 제조 공법을 습득하고 부산으로 돌아와 56년 1백 50평 규모의 조미료 공장을 세우니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조미료 공장인 아호화 성공업 주식회사다.
후일 오성의 거선 도전에도 임태웅은 끝내 1위를 수성하며 업계의 철옹성으로 군림했던 기업. 이병구가 세상에서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자식과 골프, 조미료 사업이라고 했을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한데 강태준의 등장으로 그런 흐름이 틀어져 버린 것이다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 강태준에 춘삼이가 송구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더 빨리 알아볼 걸 제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인재인 줄 알았으면 좀 더 세심하게 찾아볼 것 그랬습니다.”
“아니야.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해서 뭣 하겠나? 그쪽도 바보도 아니고 핵심 인력을 그렇게 허술하게 관리하지 않았겠지.”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두고 보고는 있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지고 있을 수는 없지. 신문이랑 광고 전단 다 돌려. 전 사원들에게 지금부터 단단히 각오해 두라고 하게. 판촉전에서 사활을 걸어야 하네.”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답은 하나.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이다.
* * *
오성그룹. 회장실.
따사로운 햇살이 드리운 회장실에선 모시옷을 입은 채 이병구가 한가로이 난초를 매만지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둘째 아들인 이재무가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옷깃을 매만진 그가 심호흡을 했다.
“원, 무슨 일이 있느냐?”
“아버님, 백경에서 움직였습니다.”
“꽤 기민하군. 생각보다 행동력이 좋은데, 그쪽은 뭐 하고 있던가?”
“언론사에 콜을 돌리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 쪽이 MSG 시장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무섭게 그쪽에서도 판촉을 시작했습니다. 벌써 입소문이 번지고 있더군요.”
“예상했던 일이로구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조미료 시장을 확보하려면 경쟁이 필연이지.”
“애초 상대가 되지 않은데 경쟁은 무슨. 그런 조그만 기업이야 밟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렇게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사업에서 방심이란 게 큰 적이야. 시장에 진입한 지 몇 년 만에 과반을 점유했다면 적어도 그 수완만큼은 인정해야지 않겠느냐?”
이병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여전히 난초를 매만지고 있었다. 분무기를 든 손은 무척이나 여유로웠지만 이재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조곤조곤한 말이었지만 아까의 대꾸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슬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똑똑 사장실을 두드렸다.
“들어와.”
냉막한 얼굴에 안경을 낀 남자는 다름 아닌 아지노모토 사의 임원인 임태웅이었다. 이병구가 돌아보자 굳은 표정의 임태웅이 인사를 올렸다.
“오, 임 이사 여기는 웬일인가? 연구실에만 사는 줄로 알았더니?”
“듣기에 제품을 벌써 시판하신다고 들었는데 정녕 사실입니까?”
다시금 분무기를 뿌리는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사실이네. 소식이 좀 늦었군.”
“임 이사야 항상 일로 바쁘니까요. 애초에 연구한답시고 환영회 한번 참석 안 한 분이 아닙니까?”
꽤 맺힌 것이 많은지 이재무의 비아냥거렸지만 임태웅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힐끗 귀찮다는 듯이 옆을 돌아본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연구자는 연구에 집중하는 게 당연하지요. 우리 전무님께서는 꽤 바쁘실 텐데, 남 일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저야 그 정도 여유는 있지요. 임 이사님처럼 하염없이 바쁜 게 아니라서.”
“임원분께서 한가하다는 건 뭔가 하자가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 시간이 남으신다면 스스로 회사 내 개선할 점이나 신규사업 아이템이라도 찾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랫사람만 닦달하거나 뭐가 떨어질까 입만 벌리고 있지 마시고.”
“뭐, 뭐요?”
하지만 임태웅은 더 이상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다시 이병구에 고개를 돌린 임태웅이 안경을 추켜올리고는 차분하게 할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판을 철회해 주십시오. 아직 생산라인 준비가 덜 되었습니다. 지금 만든 제품은 아직 시제품에 불과합니다.”
“임 이사. 이번 출시는 임원 회의를 통해 결정한 일일세. 지금 와서 뒤집는 건 쉽지 않아. 게다가 공정은 거의 완료 단계라고 들었는데 좀 일정을 앞당기는 거야 충분히 예상 범위 아닌가.”
“확실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직은 제품이 완벽하지 않다고요. 출하품의 성분과 맛이 실험실 공정과 다소 차이가 나는 만큼 미세조정이 필요합니다. 균일한 품질을 구현하려면 배지조성부터 면밀히 검토해서…….”
임태웅의 말이 길어질 듯하자, 이병구가 중간에 말을 잘랐다.
“임 이사, 자네가 연구에 진심이라는 건 알겠네. 하지만 사업이라는 건 다 타이밍이 있어. 지금 풍미의 점유율이 얼만 줄 아는가. 무려 50%일세. 저쪽에서 시장 주도권을 잡아 버리면 그땐 따라잡기 힘들어. 우리도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사안일세.”
“하지만 제품의 경쟁력은 결국엔 품질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풍미와 저희 물건의 실질적인 품질 차이는 없다시피 한 수준입니다. 이 정도 퀄리티로는 소비자가 저희 제품을 선택할 메리트가 없습니다. 후발주자임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그러자 이재무가 헛기침하며 딴지를 걸었다.
“아니, 지난 몇 년간 거기 투자한 돈이 얼만데, 완성품이 언제 나올 줄 알고.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소?”
“이 전무님께 여러 번 간언을 드렸지만, 사장님께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셔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끼어드실 일이 아닙니다만?”
“아니. 내가 틀린 말 했소? 매번 연구 개발 중이라 하면서 연구 대체 물건은 언제 낼 건가. 언제까지 계속 기다리라는 말이요? 생각해 보니 어이없구먼. 우리가 어디 돈 나오는 화수분인 줄 아나?”
역린을 건드렸는지 임태웅의 눈썹이 꿈틀댔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생각해 보니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요. 연구 기간을 일부러 길게 잡는 것이 아니면 굳이 이렇게 질질 끌 이유가 있소? 지금 연구 개발이 미뤄진 게 대체 몇 번이요? 우리도 참을 만큼 참았소이다.”
“말은 바로 해야지요. 애초에 그쪽이 요구한 조건부터가 터무니없지 않았습니까. 공장 건도 그렇습니다. 설비 투자에 소홀해 작년에서야 제대로 삽을 푸지 않았습니까.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서 연구비도 삭감해 놓고는 인원도 뽑지 않았으면서 같은 성과를 바라다니. 무슨 기술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십니까?”
“그럼 백경 같은 소기업도 단기간에 가능했던 걸 왜 아지노모토 같은 회사가 못한다는 거요?”
“그쪽에서야 사주가 사활을 걸고 투자를 독려한 덕이겠죠. 솔직히 말하면 그쪽에서 연구인력 지원 요청하면 엉뚱한 인력 배치하고, 이렇다 저렇다 사사건건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개발이 늦어질 일은 없었습니다.”
눈썹을 치켜올린 임태웅이 상대를 노려보자, 이재무도 지지 않고 도끼눈을 떴다.
으르렁대는 둘이 다시 한판 붙으려고 하자, 이병구가 벼락같이 호통을 질렀다.
“아니, 임 이사, 이 전무 자네들 뭐 하자는 거야? 이 내가 안 보이나?”
“송구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추한 꼴을 보였습니까?”
“일개 직원도 아니고 중역끼리 쌈질이라니 뭐 하는 건가? 서로 협력해도 모자랄 판에 쌈박질이라니 사람 낯 뜨거워서 참.”
“거 죄송하게 되었소.”
“미안합니다.”
서로 마지못해 사과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눈빛부터 못마땅한 것이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아니다. 냉랭한 기운에 쯧쯧 혀를 찬 이병구가 부드럽게 둘을 타일렀다.
“이보게 임 이사. 자네 말이 일리가 없지는 않아. 하지만 소비자들은 기다려 주지 않네. 좋은 제품이라도 팔지 못하면 말짱 꽝 아닌가. 지금 풍미의 점유율이 무려 50프로에 육박한 마당에 이대로 지체하면 시장에 진입하기 어렵네. 조미료는 풍미라는 인식이 뭇 주부들에게 확고하게 박히기 전에 서둘러야 해. 때론 랩실보다 현장의 목소리에 집중할 필요도 있는 게야.”
“하지만 제품의 품질이 균일하지 못하면 소비자들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 주기 어렵습니다. 무리하게 제품을 시판하여 문제가 발생하면 그땐 어쩌시렵니까? 시작이 반입니다. 처음부터 소비자에게 잘못된 인상을 심어 준다면 의식을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어떤 제품이든 처음부터 완벽할 수야 없는 일이지. 품질 문제는 추후 개선하면 되지 않은가. 생산시설은 나중에 증설하면 되고, 부족한 물량은 아지노모토랑 협력해서 들여오면 되지 않나? 나머지 미비한 점은 마케팅이나 자금력으로 커버할 수 있어.”
“맞습니다. 회장님. 사업이란 사정에 맞춰 유도리 있게 대응해야 하는 법 아니겠나. 임 이사는 제품 연구개발 업무에 매진해 주면 되는 거고, 우리 경영진은 영업에 집중하면 되고. 각자 역할이 다르니 각자 맡은 파트에만 집중하는 게 맞지. 아닌가, 임 이사?”
옆에서 깐죽거리는 이재무가 묘하게 거슬리는 임태웅이었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병구의 대답은 부드러웠지만, 결국 마케팅에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라는 소리.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임태웅이 이내 결심한 듯 안경을 추켜세웠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도 도리가 없군요. 그럼 이번 사안은 제 소관 밖인 만큼 저는 일본 본사에 지침을 구한 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본사에는 이 회장님과 경영진에서 단독으로 결정한 사안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임 이사!”
사무적으로 고개를 까닥인 임태웅이 뒷말을 듣지 않고 사라지자 이재무가 성질을 부렸다.
“저저. 건방진!”
“놔두게. 쯔쯔, 어째 저런 꽉 막힐 수가 있나.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뭐 저런 싹퉁머리 없는 놈이 다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극하지 말 거라. 이 정도 반응은 예상하지 않았느냐. 지금 때려치우겠다고 강짜 부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일이지.”
덤덤한 이병구의 반응에 이재무는 여전히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저런 싹퉁머리 없는 놈을 굳이 써야 하는지.”
“돈이 된다면야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 진짜 사업가라는 거다. 그보다 원당 수입 문제 어떻게 된 거냐?”
“그거야 문제없습니다. 세관원은 물론이고, 말단 행정병까지 구워삶아 놓았습니다. 그쪽은 전부 제 손아귀 안입니다.”
“방심하지 마라. 정치인들은 애초부터 믿기 힘든 족속들이야. 절대로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병구는 생각했다. 맹수는 토끼를 상대할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
돈 냄새가 난다. 돈 냄새가.
그로부터 며칠 후, 양 사의 광고가 라디오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풍미 한 봉지 300원짜리를 100원에. 달걀 한 줄 값에 온 가족이 맛있는 식사를.
-맛이라면 풍원입니다. 설탕만큼 달콤한 맛의 풍년. 오성의 새로운 미래입니다.
전신주에 도배하다시피 한 광고지들. 지역 신문에 끼워 넣는 전단 광고지들이 역시 삐라처럼 무작위로 뿌려졌다.
조미료 시장에 처음 출사표를 던진 오성과 백경식품의 판촉 전쟁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