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하늘고래 이야기
호롱불에 의지한 채 연필을 끄적이는 중년에 아들이 문을 두드리며 기척을 내었다.
“아버님, 손님 오셨습니다. 눈 상하게 거 불 좀 환하게 켜고 작업하시라니까요.”
“약간 어둑어둑한 게 딱 좋아. 그편이 집중이 잘 되고. 근데, 손님이라니. 누구?”
“저, 마송해 작가님. 저 강태준입니다.”
연필을 내려놓고 안경을 벗은 마 작가가 서둘러 음악을 껐다.
“아, 백 화백이 소개했던? 생각보다 빨리 왔구먼. 거참 좀 나중에 온다는 줄 알고. 손님 대접할 준비도 못 했구먼.”
“아닙니다. 제가 너무 일찍 왔지요.”
“어디 보자, 차라도 한잔 대접해야지. 손님 대접할 곳이 이게 마땅치 않아서. 쿨럭!”
어지럽게 놓인 책상 위를 치우는 도중 돌연 밭은기침을 내뱉는 마송해에 얼른 부축하는 강태준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미안하네. 요새 기침이 멈추지 않는군.”
“거참, 골골대면서 고집은. 가만있으십쇼. 약이랑 차 좀 갖고 오겠습니다.
서너 평 남짓한 작업실에서 연신 쿨럭거리던 마송해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고맙네. 요새 몸이 허한가, 가끔 이러는군. 예전에 소파 선생이랑 활동할 땐 날아다녔는데 말이야.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인지 삭신이 쑤셔.”
“에이 아직은 정정하신데요. 그 무슨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까?
“아, 이거? 광복신문이 복간될 때를 대비해 연재할 예고분을 정리 중이었네. 벌써 분량은 한참 쌓였는데 아직 복간은 감감무소식이니 원.”
어질러진 책상 위를 보니 마음이 복잡한 듯한 모습이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광복신문도 곧 복간되겠죠.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하하. 기다리는 수밖에. 그보다 나 같은 퇴물을 왜 찾아왔는가 그래?”
“작가를 찾아온 데 이유가 뻔하지 않겠습니까? 아동용 그림책을 내고 싶어서요. 선생님에게 부탁하고자 왔습니다.”
“스토리 작가가 필요하다 이건가? 거 나 같은 노인네 말고, 전래동화나 번역하면 편할 텐데…… 정 안되면 안데르센같이 검증된 외국 동화를 갖다 써도 될 텐데 말이야.”
“그건 너무 진부해서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창작 동화를 원합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작품으로요. 이렇게 연구도 해 봤습니다.”
강태준이 미리 가져온 동화책들을 한데 내밀었다. 그가 가져온 동화책들이 관심이 있었는지 마송해는 곧 관심을 보였다. 아들이 가져온 도라지 차를 마시며 정독을 끝낸 마송해가 감탄을 내뱉었다.
“오 꽤 잘 만들었군 그래. 감수성 돋는 걸 보니, 그림체가 꽤 살아 있어.”
“요사이 구라파 쪽에서도 이런 동화가 인기인가 봅니다. 저희도 이런 작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정서에 맞는 작품으로 말입니다…….”
“으음, 쉽지 않겠구먼. 그래서 의뢰하고 싶은 작품이 이런 느낌이란 건가.”
“예. 반공이나 정치적인 의도가 없는 순수동화가 끌리더군요. 전쟁도 끝났겠다 애국심을 강조하는 선전문학은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요?”
“흠, 범주가 좀 막연한 거 같은데. 그리고 동화라는 건 원래 시대상을 반영하는 법이야.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도 나이가 들면 아이로 변하는 세상이지. 결국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네.”
내심 강태준이 마음에 들었는지 푸근하게 미소를 짓는 마송해에 강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사실 제 생각에는 굳이 동화라고 해서 꼭 아이들만 읽는다는 법은 없다 사료되고요. 그런 의미에서 동화책이라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의미를 담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그런 생각을 했다니 신선하구먼. 예컨대 어떤 주제로 말인가?”
귀를 기울이는 마송해의 태도에 강태준은 평소 생각했던 바를 조금 털어놓았다.
“가족 간의 화합이나 이산가족 재회 같은 내용이면 어떨까요? 이산가족이라던지, 작금의 현실을 되짚을 수 있는 소재면 더 시사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뭐 사람보다는 동물을 소재로 하면 접근하기 쉬울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동물은 아이들이 친근감을 느끼는 존재니까요.”
“흠. 취지는 좋군. 대신 시간을 좀 더 주게나. 나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거 같네.”
강태준의 말에 꽤 영감을 얻었는지 마송해는 곧장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
얼마 후 원고를 전달받은 강태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하늘고래 이야기?”
“마 작가님께서 고래를 소재로 한 동화라면 아주 좋을 것 같다더군요. 백경출판이라는 사명에서 모티브를 얻었답니다.”
백종섭의 말에 흥미가 생긴 강태준이 차분히 소설을 읽어 보았다.
소설의 내용은 은하수를 따라다니며 별똥별을 먹고 사는 하늘고래가 호기심에 신들의 전쟁통에 말려들었다가 큰 상처를 입고 바다로 떨어진 후,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벌이는 여정이었다.
짤막하지만 꽤 흥미로운 소재가 흡입력 읽게 읽힌다. 소설을 다 읽고 나자 백종섭이 물었다.
“어떤가요? 저는 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꽤 좋군요. 이거, 아이들한테 꽤 먹힐 거 같은 내용인데요. 하늘 주머니라니. 고래가 별가루를 머금고 하늘을 난다는 상상력이 재밌어요. 빛과 어둠의 전쟁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졌다라. 꽤 재미난 설정이기도 하고요.”
“네. 저도 신화적인 요소를 가미한 점이 맘에 들었습니다. 내용 자체가 그림으로 표현할 여지가 많은 거 같아서요. 아이들한테 시범 삼아 읽어 줬더니 무지 재밌어하더군요.”
아이들의 시각으로 볼 때도 전반적으로 신선하다는 평이 다수였다. 떨어진 고래를 치료해 주는 거북이라던지. 돌고래 동료라던지. 사랑과 우정을 배경으로 한 동화다 보니 확실히 차별성이 있어 보였다.
“백 화백님께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로 추진하세요. 다만 지금 스토리 내용은 너무 기니 컴펙트하게 다듬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부분은 마 작가님과 협의해서 진행해 보겠습니다.”
의뢰를 받은 백종섭은 간만에 의욕이 생겼다는 듯 신들린 듯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 소설 내용 가운데 아이들한테 어려울 수 있는 부분은 과감히 빼고 수정했다.
완성된 작품은 예상대로 대단했다. 수채화의 색감을 그대로 살리면서 펜 선을 살렸다. 고래가 은하수 길을 따라 하늘을 바다처럼 헤엄치는 모습이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이거 소장용으로도 좋겠군요.”
“역시 백 화백이네요. 그림 하나는 정말 기똥차군요.”
은하수 사이를 마치 풍선처럼 둥실둥실 날아다니는 고래를 보니 절로 마음이 푸근해진다.
아빠로서 자식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라서일까. 큰 고래 옆에 둥실 떠가는 새끼 고래의 모습에서 절절한 부성애가 느껴졌다. 한참을 뚫어지게 그림을 보던 광필이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 왜 그래?”
“작품이 대단하긴 한데 색감 구현이 제대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거 잘못하면 작가님께 누를 끼치는 게 아닐지 부담스럽네요.”
“뭘 그런 걱정을 사서 하나? 최대한 노력하면 되지. 안 그런가, 방 국장?”
“하하. 할 수 있을 만큼은 해 보겠습니다. 오프셋 인쇄로 원색 느낌을 최대한 살려 본다면 꽤 괜찮은 작품이 나올 거 같은데요.
의욕을 불태우는 방국진에 광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님, 초판은 몇 부나 찍는 게 좋겠습니까?”
“일단은 300~400부 정도만 찍어 봅시다. 이게 잘 팔릴 거 같긴 한데 시장 수요가 있는지 확인부터 해 봐야 하니.”
“300부라 좀 애매한데요. 사철제본 작업을 하기에는 양이 좀 적은 감이 있고요.”
양장제본으로 책을 만들 경우는 접지를 한 후 10p 정도씩 세트로 실로 묶는 사철 작업을 하는데 여기서 문제는 단가가 많이 든다는 것이다. 이 경우 책 자체의 내구는 높아지지만, 비용이 추가된다. 풀컬러 인쇄의 경우엔 제본비도 만만치 않은데다 서점들에 따로 떼 줘야 할 금액을 생각하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그 말에 방국진이 의견을 냈다.
“단가가 문제라면 그럼 낱장씩 재단한 후에 접착제를 발라 그물망 거즈를 위에 붙이거나 스테이플러로 박아서 중철로 제본하는 방법도 있긴 합니다.”
“흠, 그건 좀 저렴해 보일 거 같은데. 이왕 초판인데 싸구려 같아 보이는 건 지양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접착제는 나중에 가면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전 그게 꼴 보기 싫더라고요.”
“흠. 그거는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아이들이 사용하는데 너무 쉽게 찢어지거나 구겨지면 곤란하니, 무광택 스노우지로, 제본 방식은 그냥 미싱으로 박죠.”
“스티치 바인딩 말입니까?”
“네, 실 제본으로 내자 이거죠. 그렇게 하면 180도로 책을 펼칠 수 있으니 아이들이 더 편안하게 책을 감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일단 수요가 얼마나 되는지 시장 동향을 확인해 보고, 수요가 있는 것이 확실하면 사철 제본으로 갑시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대략적인 계획은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편집팀이 활약할 차례. 오프셋(off set) 인쇄 방식 전과 달리 표지와 본문 삽화에 비싼 잉크를 아낌없이 쓴 강태준은 헝겊으로 싸바리를 한 표지에 박작업까지 마쳤다.
푸른색 고래가 그려진 백경출판 마크까지 넣고 나니 근사한 예술품처럼 보였다.
“잘 만들었네.”
“이 정도면 싸구려 같단 소리는 못 하겠지요.”
“색감이 묘하구먼. 수채화 같은데?”
“애쿼틴트(Aquatint) 기법을 썼습니다. 판면에 송진가루를 뿌리고 뒷면에서 열을 주어 색감을 내는 방법인데 송진가루가 녹은 부분은 부식되지 않거든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입체적인 효과를 줄 수 있지요.”
방국진의 말대로 표면에 음영이 드리운 모습이 아주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렇게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갔겠어. 잘했구먼. 글씨도 가로쓰기로 넣었군.”
“아무래도 교과서도 가로쓰기로 나오는 마당에 이쪽이 보기 편하잖습니까. 아무래도 가독성 면에서 이게 낫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지. 그래서 가격은 얼마로 책정했나?”
“일단 한 질 10권에 2,000환 정도로 잡았습니다.”
액수를 들은 강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2,000환? 그거 너무 비싼 거 같은데?”
“그렇긴 한데, 비용이 비용이다 보니 이래도 남는 건 별로 없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 안 받으면 단가 못 맞춥니다.”
“흠. 그렇게 비싸서 수요가 있을까?”
“일단은 초회 한정판이니 소장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팔리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 심리가 묘해서, 도리어 너무 싼 건 싸구려라고 느끼는 법이니까요.”
강태준은 고민에 빠졌다.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한 질에 무려 2,000환이라, 솔직히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 아닌가. 고심하던 강태준이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그러면 영문판으로 같이 내는 건 어때?”
“영문판이요?”
“그래, 솔직히 국내에서 팔기엔 좀 부담스러운 가격이지. 정 안되면 주한 미군 자녀들한테 재고라도 떠넘기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정 뭣하면 아동용 영어교재라고 홍보하는 방법도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육용이라면 환장하니까 말이야.”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요.”
“그리고 춘삼이 니는 보진당 백 영감님한테 좀 다녀와야겠다.”
화들짝 놀란 춘삼이가 토끼 눈을 했다.
“백 영감님이요?”
“그래. 백 영감님 정도면 아는 인맥도 많을 거 아냐. 초판본이니 앞으로 돈 될지도 모른다고 꼬셔 봐라.”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솔직히 춘삼이는 회의적이었다. 백 영감 같은 사람이 이런 그림책을 사 줄까. 골동품과 아동용 그림책이라. 영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한 춘삼이었지만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강태준이 아무 생각 없이 쓸데없는 일을 시킬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래. 자기는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되는 거다.
그렇게 춘삼이가 백 영감을 설득하러 간 사이 멋들어진 이탤릭체로 표문을 따로 만든 하늘고래는 마침내 서점에 배포될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트럭에 곧바로 실린 책들은 따끈따끈한 온기를 간직한 채 서울 중심부 서점과 부산 등 대도시로 일제히 배송되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시작되었지만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고작 1주일이 되지 않아 동화책이 모두 팔려 나간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