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04화 (104/361)

104화 아동 도서 사업

“법원 쪽에서는 영 불편할 내용이더군요.”

“그래도 계속 연재하실 생각이신가 봐요. 사회 고발 차원에서 하는 일이라나. 일단 익명으로 연재 중이니 걱정할 거 없고 언제든 빠져나갈 구멍은 마련해 두었다는데 참. 덕분에 요새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에요.”

“고생이 많군요. 그보다 앞으로 어떡할 건지 진로는 정했나요?”

“글쎄요. 뭐 지금으로서는 개업 쪽이 끌려요.”

“원래 법관 지망 아니었어요? 이만승 그 양반도 물러난 마당에 또 꼰대짓하는 인간이 있습니까?”

그 말에 수육을 집던 설유하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법관 일보다는 변호사 일이 적성에 맞는 거 같아서요.”

“그래요?”

“법원에 들어가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더라고요. 봉급도 많이 짜고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한정된 것 같고 말이죠. 배당받은 케이스를 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더욱이 이번에 스카웃 제의를 받았거든요.”

“스카웃이요? 어디서 말입니까?

“한성법률사무소에서요. 이회영 변호사님께서 같이 일하자네요.”

“그 국내에서 처음 합격한 여성 변호사분 말씀입니까?”

설유하가 젓가락으로 콕콕 수육을 찍더니 다시 입에 넣었다.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던 설유하가 내용물을 꿀꺽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네네. 맞아요. 남편인 홍사천 변호사님과 함께 개업했는데 꽤 잘되나 봐요. 아무래도 그쪽이 기업 법무 쪽으로 발을 넓힐 생각인가 보더라고요. 이번 광복신문 폐간사건으로 일감이 많아졌다더군요.”

“기업 법무라 괜찮은 생각이네요. 아직 많이 생소한 영역이지만 앞으로 나라가 발전하면 수요도 늘 테고 말이죠.”

“맞아요. 요새는 기업 간 지급 불이행에 따른 계약 문제가 많은 거 같아요. 상법이 워낙 자주 바뀌니, 그 간극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는 사람도 많고, 일방적으로 거래를 파기하는 경우도 많나 보더라고요. 특히 을의 입장에서 보면 계약서에 독소조항이 들어가는 경우도 적잖아서. 계약 전에 검토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듣자 하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당시 변호사의 업무는 송무에 편중되어 있는 데다 고시 선발 인원조차 수십 명 안팎에 불과해 변호인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법관 수가 고작 300여 명밖에 안 되던 시절이니 오죽하겠는가.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일단 법관 경력은 대충이라도 쌓고 나오는 게 좋지 않겠어요? 경력상 한 줄 정도는 남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그래서 차근차근 생각해 보려고요. 그보다 천경물산 이원석 사장님께서 참의원에 출마한다면서요. 그게 사실인가요?”

“예. 맞습니다. 이번에 민한당에서 스카웃되었다는군요. 그 양반 옛날부터 그쪽에 관심이 좀 있었죠.”

“공천을 두고 야당 내부에서는 갈등이 치열했을 거 같은데요. 솔직히 깃발만 꽂으면 되는 수준 아니에요?”

“믿는 구석이 있으니 뛰어들었겠죠. 대구는 그 양반 텃밭이잖습니까. 직원만 수천 명에, 거래하는 협력사만 몇 갠데요.”

“확실히 그 정도면 몰표 나올 가능성도 있겠군요. 그럼 사업은요?”

“형제들이 다들 베테랑 기업인에 아들도 장성했으니 운영은 별 무리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이원석 사장님이 뒤에서 서포트하는 편이 외풍을 막고, 해외 차관을 끌어들이기 유리할지도 모릅니다. 수출 쪽에 기름칠을 하려면 되려 그편이 싸게 먹힐지도요.”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대충 자금 쪽에 접근하기도 쉽고, 그럼 태준 씨도 이참에 라인 타보는 건 어때요?”

“아니, 여자분들은 보통은 남자가 정치하는 거 싫어하지 않습니까?”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일을 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거 같아서요. 남자가 야망 있는 편이 차라리 나은 거 같아서요. 관심 없으면 꼭 딴짓 거리를 하더라니까요.”

뼈 있는 말에 강태준이 피식 웃었다.

“고작 금뺏지 달아서 뭐 합니까. 어차피 초선은 거수기 노릇이나 할 텐데. 그 정도론 수지맞는 장사는 아니죠.”

“첫술에 배부를 수 있나요. 그리고 저도 국회의원 사모님 정도로 만족하는 타입은 아니죠. 퍼스트 레이디 정도라면 모를까?”

“하하. 제가 몰라봬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선거한답시고 새빨간 거짓말이나 늘어놓긴 싫군요.”

“생각해 봐요. 뭐 팍팍 밀어줄 테니.”

“나중에요. 근데 그게 뭔가요?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말이에요.”

쇼핑백 모양의 종이가방에 시선을 주자 설유하가 아, 하고 웃었다.

“아. 이거. 이번에 일본에서 가져온 거예요. 짠, 어때요 이쁘죠?”

“책이군요. 이누이 토미코? 동화작가인가요?”

<ながいながいペンギンのはなし(길고 긴 펭귄 이야기)라는 이름이 적힌 그림책이었다.

“네. 그쪽에서는 나름 이름난 작가라는군요. 이번에 조카가 5살 생일인데 국내에는 마땅한 선물이 없어서 이참에 일본 다녀온 언니한테 받은 거예요.”

배를 바닥에 깔고 미끄러지며 차근차근 길고 긴 여행을 계속하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와, 완전 아기자기한 게 색감도 이쁜데요? 애들이 좋아할 거 같아요.”

“그쵸? 이건 특별한정판으로 나온 물건이에요. 국내에서는 구하기가 힘들어서 특별히 의뢰한 거라고요.”

“일본어로 되어 있는데 이거 괜찮나요?”

“어차피 그림으로 보는 책이니까요. 게다가 이 정도는 제 실력으로 번역 가능해요.”

내심 깨알같이 어필하는 모습이 은근 귀여운 설유하에 강태준이 다시 책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수채화 같은 색감이었지만 개성 있는 그림이 꽤 좋아할 거 같았다.

“대단하네요. 근데 한국에서는 이런 아동 도서가 많지 않나 보죠.”

“사실 한국에서도 쓸 만한 그림책이 있나 좀 찾아보긴 했는데, 다 컨셉이 구닥다리라서 철 지난 전래동화 빼고는 없더군요. 혹 그런 게 있음 출판사에서 좀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흠.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한번 상의를 해 봐야겠습니다.”

강태준이 듣기에 내심 솔깃한 소리였다. 생각해 보니 근래 진짜 아동을 위한 서적이란 것이 없지 않은가? 문고판을 내는 것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판이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강태준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방국진도 귀를 쫑긋했다.

“아이들 그림책 말입니까?”

“듣자 하니 애들이 읽을 동화책이 없다더군. 일본이나 미주 쪽에서는 요사이 창작 동화가 꽤 인기라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 쪽에도 조만간 수입되지 않겠나?”

“흠. 애들 책이라. 생각해 보니 거의 없긴 하네요. 어느 정도 수준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일 년에 한 권 정도 출판되어 나오나?”

곰곰이 생각하던 방국진의 말에 오히려 놀라는 강태준이어다.

“한두 권? 그렇게 적어?”

“네. 정부 지원도 적고 전래동화 선집 작업이 활발하지 않으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출판되는 책 가운데 아동용으로 나온 책은 드물죠. 일단은 아동용으로 인기를 끌려면 흑백이 아니라 올 컬러로 제작해야 하는데 출판 단가가 워낙 비싸서 말입니다.”

“하긴, 그렇긴 하네. 재고가 남으면 그것도 나름 곤란할 테니 말이야.”

“아무래도 출판사업이란 게 재고관리와 영업, 판매 삼박자가 떨어져야 하는데, 소자본 출판사 입장에선 리스크가 커서 쉽지 않습니다. 문고나, 참고서같이 꾸준히 잘 팔리는 시장이 있는데 굳이 아이들 책에 누가 신경을 쓰겠습니까?”

고민하는 강태준에 광필이가 슬쩍 제안을 올렸다.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그럼 일단 한번 시중에 나온 서적부터 하나씩 뒤져 보지요. 그럼 수요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감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게 정답이군. 그럼 시내 바람도 쐴 겸, 한번 살펴보고 오자고. 어느 정도 수량인지 시장 점검도 할겸?”

“좋습니다. 형님. 여기 처박혀서 책만 보려니 좀도 쑤셨는데 간만에 나들이 좀 가죠.”

강태준은 며칠에 걸쳐 부평과 국제시장 일대를 돌며 아동용 그림책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확보한 동화책은 고작해야 십여 점 정도. 쌓아 놓아도 고작해야 서재 한 칸을 겨우 채울 만큼 초라한 분량에 강태준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전부라고?”

“백 화백 통해서 서울 시내 남대문이랑 동대문 시장부터 명동까지 싹 돌아서 가져온 겁니다. 나머지 상태가 좋은 책들은 수집가들한테 팔렸는지 대부분 예약이 걸려 있다는군요.”

그림책이라고 하지만 칼라 인쇄가 조악한 품질이 대부분. 작은 그림이나, 물체의 색상이 삐져나와 정확하게 채색이 맞지 않거나, 원판이 아닌 카피본을 사용해서인지 명도 수준도 형편없었다.

“수제 공방에서 제작하는 책이 몇 개 있기는 한데 그게 전부입니다. 사제 출판으로 나온 책 몇 권을 빼면 처참하더군요.”

“이 정도면 확실히 아동용 서적이 부족한 건 확실하네. 그럼 우리도 한번 도전해 보는 게 어떻겠나. 마침 마땅한 그림작가도 있고 하니 말이야.”

백종섭을 염두에 둔 발언에 광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백 화백님 말씀이죠? 확실히 그 양반이 감성적으로 잘 그리니. 근데 아무래도 스토리 작가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화백님 실력이야 인정하지만. 애들 눈높이에 맞춰서 쓴다는 건 또 다른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 부분은 염려할 필요 없을 거 같아. 마침 적임자가 있거든.”

강태준이 자신 있게 찾아간 곳은 대구 향촌동이었다. 대구는 전란 당시 비교적 피해가 적은 지역으로 문인들이 주로 피난하던 곳으로 특히 북성로 일대는 문인들의 거리로 유명했다.

전쟁이 끝난 후 피란 왔던 문인들은 썰물처럼 대구를 빠져나갔지만 몇몇은 그 자리에 터를 잡고 자리를 지켰던 것.

텅텅 빈 다방의 흔적을 지나 팔공산 아래로 가니, 사방에 늘어선 밭뙈기에서 구릿한 비료 냄새가 진동했다. 근처에 사과 농사를 하는지 자라다 만 과실들이 널려 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판잣집에 도착하자 누런 황구 한 마리가 기어 나오더니 컹컹대며 시끄럽게 짖어 대었다.

“어이. 흥분하지 말고. 까칠하구만. 녀석.”

“형님, 그 똥개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고것 참 맛있게 생겼네. 우쭈쭈 착하지!”

크릉!

위협을 느낀 황구가 이빨을 드러내며 크게 짖어 대었다. 안에서 소란을 들었는지 젊은 청년 하나가 마중을 나왔다.

“어이 펄, 일루 안 와?”

황구가 낑낑 어리광을 피우며 헥헥대자 목을 어루만져 주었다.

양처럼 순해진 개의 모습에 강태준이 신기해했다.

“개가 아주 충성스럽군요.”

“죄송합니다. 개가 경계심이 심해서. 아직 낯을 좀 가리네요”

“개가 아주 맛있…… 아니 멋있게 생겼습니다. 지능도 높은 거 같고.”

서둘러 말을 바꾸는 광필이에 다시 크릉대는 녀석.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청년이 기쁜 듯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아주 영리한 녀석이죠. 덕분에 도둑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백종섭 화백님께 이야기 들었는데 강태준 사장님 맞으시죠? 그쪽은 김광필 국장님이시고요.”

“예. 그럼 그쪽이 마송해 작가님?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아니요. 전 아들 되는 사람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뒤편 별채에서 작업 중이십니다.”

청년이 안내한 별채는 작업실이라기보다 창고가 더 어울리는 공간.

낡고 오래된 물품들이 잡동사니처럼 쌓인 방 안에는 맨 처음 배가 불룩한 석탄 난로가 눈에 띄었다. 위에 놓인 골동품 축음기에서 오래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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