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목재 공방
이병구로서는 첫 입찰 참가.
200만이라는 소리에 놀란 좌중이 술렁였다.
“200만 엔?”
“그게 정말인가?”
고작 골동품 한 개 가격으로는 경악스러운 액수. 질투심에 가득한 눈으로 힐끔거리는 사람들. 하지만 이병구는 태연하기 그지없다.
“헉, 200만 엔 나왔습니다. 다른 분 안 계십니까?”
흥분한 사회자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
매병은 결국 이병구에게 낙찰되었지만 실로 엄청난 지출이 아닐 수 없었다.
동행한 아스베도 조금은 과하다 여겼는지 걱정스럽게 말했다.
“200만 엔이라니. 우리 이또상께서 자산가이신 건 알지만, 너무 통이 크신 것이 아닙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니까요.”
하지만 이병구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업을 하려면 때론 배팅할 때도 있는 법.
그때 집사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정중하게 다가왔다.
“뭔가?”
“말씀 중 죄송합니다만 저쪽 손님분께서 물건을 양보하실 수 없냐고 물으시는데요.”
“얼마로?”
“220만 엔 어떻습니까?”
이병구가 가리킨 쪽을 보니, 부채를 든 채 얼굴을 가린 남자가 모자를 까닥였다.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차림이었지만 이병구는 단칼에 거절했다.
“허, 1할 정도론 곤란한데, 2배 더 쳐줄 수 있나?”
“그, 그건 좀…….”
“정 사고 싶었으면 아까 경매장에서 샀어야지. 뒷거래는 전혀 생각 없다고 전하게.”
이병구가 사라지고 난 뒤 빈손으로 되돌아온 집사가 주인 앞에 송구한 듯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만 안 팔겠답니다.”
“칙쇼, 그거 하나 못 받아 오나?”
“죄송합니다.”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에 빈정이 상한 녀석이 승냥이처럼 눈알을 굴렸다.
“됐어. 저걸 어찌한다?”
“그냥 포기하시죠. 이병구는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기랄, 저 물건이 딱이었는데, 매물이 그렇게 없나?”
“송나라 때 관요에서 만든 물건 몇 점이 새로 매물로 나온다고 합니다. 저것만큼 좋지는 않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리심이…….”
“씁. 어쩔 수 없지. 근데 대호 쪽은 차질 없이 정리했나?”
그 말에 이야기를 전하던 안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 더 수사가 확대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김무진이 그놈은?”
“삼척으로 좌천시키는 걸로 적당히 마무리 지을 것 같습니다.”
“김무진 그놈도 운이 없군. 이제야 좀 트이려나 싶었더니 동생 놈 잘못 둬서 피 보는군. 곧 경감으로 승진할 예정이었는데 말이야.”
“원하는 대로만 풀리면 그게 인생이겠습니까? 암튼 이번 일로 물류 쪽 타격이 커서 당분간은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일 처리 하고는. 방화범은 못 잡았나?”
“신출귀몰한 놈입니다. 아무래도 원한으로 엮인 놈 같은데, 증거가 없어서 연결고리를 찾기는 어려울 거 같아 보입니다.”
“시간을 들여서라도 꼭 찾아. 그놈은 내 손으로 조진다.”
살기 넘치는 눈초리에 오싹한 수행원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개를 돌린 이억수의 눈빛이 음험하게 번들거렸다.
‘날 건드리다니,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 * *
부르릉 소리와 함께 달리는 차량에서 먼지가 일었다. 덜컹거리는 차량 앞으로 뿌연 먼지가 일어나자 운전하던 강태준이 그만 재채기를 했다.
“에취! 누가 내 얘기하나?”
“아. 형님도 참. 감기 조심하시라니까.”
“코가 간지러워서. 이거 참 길에 먼지가 많군.”
“포장을 잘해 두면 좋을 텐데, 아직 길이 제대로 된 곳이 없으니까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강태준. 강태준의 사업은 확장을 거듭했다. 황철득으로부터 폐자재나 고철 고르는 법을 전수받으면서 강태준이 깨달은 점은 폐품이나 고물에 대한 단가표나 세부 정보가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아 부르는 게 값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정보의 비대칭을 이용해 상당수의 고물상은 단가 후려치기로 이윤을 챙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강태준은 가격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일부러 부산 외에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고물을 주웠다. 각지를 돌며 각 지역 거래가를 체크하던 춘삼이가 신기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마을마다 단가가 다르군요. 고작 5리나 10리 차이인데 동네별로 가격이 이렇게까지 다르다니.”
“그만큼 폐품이 돈이라는 의식이 부족한 거지. 통행이 불편해 멀리 가기 힘드니 울며 겨자 먹기로 파는 거고. 아무래도 무게도 있고 유통이 만만찮으니 말이야.”
“확실히 울산 쪽은 요새 공장 짓는다. 도로 깐다 말이 많아서 폐전선이랑 헌 옷 가격이 많이 올랐지.”
복만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물은 경기의 흐름을 많이 타는 종목인 만큼 사회 동향을 파악하기에도 유용하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고압전선과 비철, 파지, 중고자재 등 취급 품목이 점점 늘어나는 중.
강태준이 물었다.
“그래. 뭔가 따로 취급할 상품 같은 건 없나?”
“의류 쪽에도 손을 대는 건 어떨까요?”
“의류?”
“예. 남포동 구제 시장 쪽에 물량이 딸린다고 하더라고요. 헌 옷도 취급하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군복 같은 걸 리폼해서 파는 것도 인기 아닙니까. 염색만 잘하면 꽤 값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등산복이나 작업복 대용으로 말이에요.”
복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일리가 있군. 어차피 전쟁이 끝났으니 추가 매물도 많이 나올 테고 말이야.”
“그러려면 봉제에 능한 여공들을 몇 명 구해야겠네. 그런 인력이라면 서울 동대문 쪽에서 찾아야 하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느새 트럭은 어느 야적장에 앞에 멈추어 섰다.
“왜. 그럽니까?”
“잠시만…….”
파지와 고철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앞에 둔 노인이 고물상을 앞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거 돈 안 되는 물건이야. 그냥 놓고 가시던지. 뭐 가지고 가기 힘드시면 그냥 내려놓고 가시던지.”
“그렇습니까? 그럼 저는 어떻게 합니까?”
난처한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분명해 보인다.
그 말에 거드름을 피우던 고물상이 선심 쓰듯 말했다.
“뭐, 사정이 딱하니 다 퉁쳐서, 도합 60환에 쳐주겠소.”
“예에?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그렇게 하면 하루 밥값도 안 나오는뎁쇼. 좀만 더 쳐주십쇼.”
“그럼 팔지 말던가. 그거 버리는 것도 다 일일세.”
어이없는 폭거에 기분이 나빠진 복만이. 누가 봐도 불합리한 거래 조건에 그냥 지나가려던 강태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여보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에?”
“이거 전부 돈 되는 물건인데 완전 거저먹으려 하는구먼. 이런 갱지나 신문지는 활용도가 높아서 하급지랑 달라요. 제지공장에 직접 납품하면 그 몇 배는 받습니다.”
뒤에서 내린 춘삼이가 물건을 들척이며 가격을 들먹이자, 당황한 고물상이 벌컥 성을 냈다.
“아니, 남 거래하는데 왜 끼어들어? 당신들 누구야?”
“지나가던 고물상입니다. 그쪽 하는 짓이 하도 얼척이 없어서 도저히 나서지 않고는 못 참겠더만. 거 영감님. 이쪽 가격이 맘에 안 들면 그 물건들 저한테 다 주십쇼. 전부 제가 받아가지요. 도합 150환 드리겠습니다.”
“예? 정말입니까?”
“이 자슥 봐라, 갑자기 남 영업장에 훼방 놓고, 대체 뭐야?”
“댁이 하는 짓거리가 좀 보기 그렇잖소. 그리고 내가 그러면 좀 어때 애초에 찜해 둔 물건도 아니지 않나? 거래 중에 누구한테 팔든 그건 자유지.”
“아놔. 이 자식이.”
그 말에 쿵 소리를 내며 내린 복만이가 인상을 쓰며 턱을 세웠다. 불룩 나온 배를 앞으로 들이밀며 껄렁하게 외쳤다.
“아놔, 누구보고 자식이래. 임마, 여봐, 우리 형님이 니 동생이야?”
“이 시키가…… 니들 깡패야?”
“험한 말씀은 서로 삼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추한 꼴 보기 싫으면 말이죠.”
춘삼이의 경고에 육두문자를 내뱉던 고물상은 입만 으르렁댈 뿐 쉬이 달려들지 못했다.
딱 보기에도 위압적으로 보이는 복만이에 그간 벌크업을 한 강태준까지.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찔끔한 고물상이 아무 말도 못 하자 강태준이 맹한 눈의 노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거, 영감님, 이 근방에서 사십니까?”
“예? 예. 그렇습죠.”
“일주일에 폐지 모으는 양이 얼마나 됩니까?”
“한 100킬로 되는데, 많을 땐 대략 200킬로쯤 되지요.”
“부지런하시군요. 그러믄 저기 신작로 건너편으로 10리쯤 더 가면 대원 고물상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파지 전문으로 값을 잘 쳐주는 곳입니다, 거기 제 지인이 있으니 백경 자원에서 소개해 줘서 왔다고 하십쇼. 가격은 여기보다 서너 배는 더 쳐줄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요.”
아까까지 멍 때리던 고물상이 분한 듯 그를 노려보자, 강태준이 돌아보며 한마디 던졌다.
“거참, 먹고살 만한 사람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양심껏 사시죠. 아무리 팍팍한 세상이지만 정도는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이…… 썅.”
얼굴이 시뻘개진 고물상이 화를 내며 돌아서자 그제야 차량에 오르는 강태준.
돌아오는 길, 복만이가 꼬시다는 듯 시시덕거렸다.
“거참 눈깔 부라리는 꼴이 잡아 죽일 기세던데요. 거 눈빛으로 사람 죽이겠더이다.”
“지가 어쩌겠어. 부들부들 떨기밖에 더하겠나.”
“그러게요. 대놓고 사기 치는 놈팽이들은 가만두면 안 되지요.”
“임마 근데 얼굴에 붙인 반창고는 뭐냐? 어디 다쳤어?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그뿐이랴. 복만이의 볼 한쪽에는 옅게 베인 자국이 나 있다.
무안한 듯 볼을 만지작거리던 복만이가 두루뭉술 말을 돌렸다.
“아, 이거요.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 뭔데 그렇게 다쳤어?”
“그게 면도하다가 베였습니다요.”
은근 부끄러워하는 복만이에 사정을 짐작한 강태준이 피식 웃었다.
“니가 날 수염이 어딨다고?”
“이거 왜 이러십니까. 지도 이제 곧 어른이거든요…….”
“누가 아니래? 근데 왜 면도를 그따위로 했냐고?”
“아니 제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면도날이 완전 거지 같아서 그렇지.”
“고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는데 성인 흉내 내는 건 좋은데 우리 헛짓하진 말자.”
“아. 또…… 놀리지 말라니까요. 진짜. 서투른 것도 죕니까 그래?”
두 명이 투덕거리는 사이 화물차는 봉래동으로 향했다.
봉래동 창고 안에서는 쌓아 둔 폐목재와 톱밥이 몇 포대씩 쌓여 있다. 땔감처럼 가지런히 쌓여 있는 폐목재를 옆에 두고, 뚝딱뚝딱 무엇인가 만들어 내는 사람들.
공장 한편에 차린 가구 수리 공방.
화물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공사장 안으로 버럭 하는 호통이 들려왔다.
“철민이 인마 니, 사포질 똑바로 못 하나? 니미 이게 이거 봐라 표면이 까끌까끌한 거. 이기 제대로 마감한 긴가?”
“죄송합니다.”
“거 힘만 준다고 다 되나? 그렇게 빡빡 문지르면 흠집도 많이 나고 사포가 금방 닳아 버리지. 이렇게 물을 살짝 묻혀서 물 사포질하면 가루도 안 날리고 이렇게 곱게 연마가 되지 않나?”
뭔가 작업 중 실수라도 한 걸까. 공교롭게도 목재 가루를 뒤집어쓴 철민이가 훈계를 받는 중이었다. 최 목수의 훈계에 일렬로 선 아이들이 모두 어쩔 줄 몰라 했다.
“요령 같은 거 피지 말고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라. 글고 대룡이 니는 와 톱을 왜 그렇게 잡노. 손가락 잘라 먹을 일 있나? 스카시 할 때는 톱날 부분이 아래쪽으로 향하게 끼워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노? 그냥 밀 때랑은 반대로 하라고 몇 번을 씨부렸는데 그걸 기억 못 해!”
“아, 깜빡했습니다.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정신 못 차릴려? 목수 일이 장난이야? 전부 그지 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싶나?”
“아닙니다.”
“그러면 똑바로들 해. 배때지 부른 놈들은 다 때려치라! 그런 얼빠진 놈은 다 필요 없다.”
최달건의 일갈에 군기가 바짝 선 목책교 아이들.
입술을 깨문 채 분한 듯 고개를 떨구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것 같은 분위기에 서둘러 트럭에서 내린 강태준.
사장이 공장 안으로 들어가자,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