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나비 효과
난데없는 MP(군 경찰)의 방문에 어안이 벙벙한 대호자원 사람들. 김무룡으로서는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다들 꼼짝 마. 여기 관리자 누구야?”
사태를 파악하기 직전, 털털거리는 군용 지프 하나가 도착했다.
어깨에는 마름모꼴 견장이 붙은 장교가 차량에서 내리자 경례를 붙이는 사람들.
파일을 옆구리에 낀 장교가 사무적으로 좌우를 둘러보더니 다소 무미건조한 어투로 물었다.
“대위인 설인모다. 자네가 김무룡이? 맞나?”
“네. 그렇습니다만…….”
“하, 많이도 해 처먹었네. 어떤 빨갱이 자식이 간 크게 군수물자를 빼돌리다 걸렸다 싶었는데 이건 완전 본격적이구먼.”
서류를 살핀 설 대위가 귀찮다는 듯 품에서 영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군수품 절도 및 횡령 혐의로 체포한다. 뒤지게 맞기 싫으면 순순히 따라와.”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군수품 절도라니?”
“꼼수 부리지 말고. 더 자세한 사정은 보안대에 가서 말하도록. 이봐 김 상사!”
“예! 대위님.”
“이 자식 당장 끌고 가!”
양옆에 팔짱을 끼는 보안대 수사관들이 김무룡을 결박한다.
김무룡이 반항하자, 소총을 들고 온 병사들이 개머리판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이 자식들도 전부 공범이니 싹 다 잡아서 쳐넣어.”
“저.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요…….”
“그래? 그거야 찾아보면 알겠지. 조사하면 다 나와.”
끌려가는 대호직원들이 주저리 변명을 늘어놓아 보았지만 궁색한 소리일 뿐.
이미 확보한 증거가 너무나 명명백백한 만큼 변명의 여지가 없다.
수갑이 채워진 모습으로 줄줄이 연행되는 녀석들.
같은 시간, 강태준은 쌍안경으로 불타는 논밭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야. 역시 휘발유가 화력이 갑이라니까. 활활 잘 타는군.”
“그 아까비. 좀 더 뽑아먹을 걸 그랬습니다…….”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복만이. 강태준이 점잖게 타일렀다.
“그랬으면 들켰었게. 적당히 먹어야 안 체하지. 암튼 지금 야적장 쪽은 어떻게 되었나?”
“미군 하야리아 부대 범죄 수사 사령부(CID)에서 직접 출동했답니다. 육본에서도 적극 협조하겠다고 나섰던데요. 절도 증거가 확실하니 빼도 박도 못하겠지요.”
“우리 박 여사께서 화끈하시네. 한 건 제대로 해 주시구먼.”
투서를 받은 인근 부산 군수사령부 직할 보안대에서 대대적으로 감찰반을 출동시켰다.
폐유가 아닌 진짜 유류를 빼돌렸다는 사실이 뽀록나자 미군이 뒤집어졌다.
주한미군 쪽에서는 빼돌린 유류가 족히 수십만 달러는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검찰에서는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그간 군수 비리에 연루되었던 업체들이 수면 위로 부상하면서 그간 대호자원에서 저지른 비리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대호자원, 장장 2년간 최소 3억 원어치 유류 빼돌려]
[인면수심 폐기물 업자의 도덕적 해이, 어떻게 볼 것인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주한미군 측에서는 강한 유감을 표명했고 한국군 부산지역 사령부에서는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감사에 착수했다. 이번 일에 군부의 고위 장교가 연루되어 정기적으로 상납금을 바쳤다는 사실까지 전해지자, 사건은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김무룡이 휘발유를 빼돌리다 전격 구속되었다는 이야기가 공론화되자 공사장 사람들에게도 큰 이슈가 되었다.
“쯧쯧, 김 감독 그 새끼가 뒤 구린 게 많더라니까. 그러게 적당히 해 처먹었어야지.”
“세상에 간도 커. 어떻게 그렇게 해 처먹을 생각을 하지? 목숨이 두 개라도 되나?”
“안 걸릴 줄 알았겠지. 원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 쉽지 않나.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기는 순식간이야.”
평소 김무룡을 고깝게 보던 사람들은 무척 고소해했다. 황철득이 물었다.
“그럼 이제 대호자원이랑 김무룡이는 어찌 되는 건가?”
“김무룡은 군법회의에 넘겨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군법무관들이 아주 벼르고 있어서 형량이 꽤 셀 거 같던데요. 변호사를 선임해도 워낙 증거가 확실해서. 중형을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오너가 빵에 가다니 갈 때까지 갔군 그래. 대호자원은 파산인가 그럼.”
“대충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부랴부랴 대리인을 세우긴 했지만 벌써 간당간당하던데 미군서 발주하는 철거공사에서는 강제로 손을 떼게 되었으니 앞으로 타격이 크겠죠.”
말이 씨가 되었을까. 대호자원은 결국 폐업 수순을 밟았다.
미군부대 공사 과정에서 그간 독점적인 지위를 구가하던 미래건설도 칼바람에 편승했다.
업무상의 공정성을 재고하겠다는 명분을 핑계로 그간 말썽을 일으켰던 하도급 업자들을 일거에 대거 정리해 버린 것이다.
덕분에 강태준을 비롯한 신생 업체들이 입찰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소식을 접한 정성택이 술잔을 들며 축하했다.
“허허, 역시 사업하는 놈들은 얄짤없군. 건수 잡았다 이건가.”
“그러게 적당히 해 처먹었어야지, 미운털이 좀 박혔나? 아마 장원영 전무도 꽤 벼르고 있었을 걸세.”
“덕분에 저희도 낙찰 기회를 얻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입니다.”
어찌 되었든 강태준 입장에선 이득이 되는 결과다. 그간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장원영의 배려로 빈자리를 꿰찬 것이다.
“이제 현장에서 텃세 당할 걱정 없겠군요. 근데 휘발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채지 마라. 제값 받으려면 수고가 필요한 거 몰라? 안 떼어먹을 테니. 걱정 말라고.”
빼돌린 휘발유는 몇 주에 걸쳐 현금화는 작업을 가졌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리터당 0.97환이던 휘발유 평균가격은 전후 고공 행진을 거듭해 평균 5환대로 접어든 것이다.
수요가 폭증하면서 총량 3,000리터 분량의 휘발유는 무려 1만 5,000환이 넘는 금액으로 팔려 나갔다.
* * *
같은 시간, 일본 시모노세키 공항.
터미널에 정지한 비행기가 트랩을 갖다 붙이자, 미쓰이 물산에서 나온 임원이 공손하게 손님을 맞았다.
“자주 뵙는군요. 이또상.”
“신형 원심분리기가 나왔다고 해서 찾아왔지요. 게다가 요새 사업 다각화를 생각하고 있어서 말이죠.”
설탕 산업으로 돈을 번 이병구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업가였다. 미쓰이물산을 통해 다나카 기계공업사의 제당 기계를 수입한 이병구는 일본 업계에 뒤지지 않는 대규모 최신식 공장을 추진해서 설탕 사업을 일으켰다.
물론 창업은 쉽지 않았다. 일본의 제당 업계는 새로 등장할 라이벌을 견제했고 한국의 경쟁자들 또한 이병구를 친일파를 매도하며 공격을 계속했다.
이병구는 문지방이 닳도록 정부 관계자를 만나 호소했지만, 수입 통관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병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계류를 조립하는 회사를 한 곳도 빠짐없이 찾아 문의해 보게. 우리에게 설계도가 있으니 어떻게든 조립하겠다는 곳이 있을 거요.”
“하지만 사장님, 시방서나 메뉴얼도 없이 설비를 제작하면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 그럼 배워서 만들면 되지 않나?”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매시장에서 선을 보인 설탕의 가격은 100환. 세 배가 넘는 외국 설탕과 비교해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처음에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편견 덕분에 팔리지 않았지만 싸고 질도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자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렇게 얻은 부를 바탕으로 이병구는 신규사업에 눈독을 들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섬유 분야였다. 미쓰이가 투자한 도요레이온 공장을 둘러본 이병구가 원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나일론이란 게 물건입니다. 면사보다 실이 질기고 윤기가 있네요.”
“좀도 먹지 않는 점이 장점이죠. 게다가 세탁을 하면 다른 면제품과 달리 금방 마르지요. 특히 나일론 스타킹이 인기인데, 스타킹 덕에 면도기도 잘 팔린답니다.”
“면도기라고요?”
“예 미용 때문이지요. 천이 얇아 살이 비치니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리털을 깎는다는군요.”
“허허. 그런 망측한 일이.”
“아무튼 축복은 축복입니다. 나일론 덕분에 바느질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신기한 건 원재료인 카프로락탐이 석유에서 뽑아내는 재료라는 겁니다.”
“호오, 이런 흰 천을 그 시꺼먼 석탄에서 뽑아낸다는 말입니까?”
“그게 바로 화학의 마술이죠.”
이병구가 맞장구를 치며 호응하자 신난 아스베는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묵묵히 귀를 열고 집중하는 이병구의 행동에 아스베가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아이구야, 너무 제 이야기만 했군요.”
“하하. 아닙니다.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하이구야. 그럼 이또상은 바로 돌아가십니까?”
“며칠간 온천에서 쉬다 가려 합니다. 요사이 나이가 들었나 어깨가 결리더군요.”
“그렇습니까. 그럼 저랑 같이 경매장에 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실 이또상이 오신다는 말에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오, 이런 감사할 데가?”
이병구는 반색했다. 세간에서 알아주는 골동품 수집광인 이병구는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신분제가 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좌판이나 깔고 밥벌이하는 하류계층과 나 같은 양반이 어떻게 동급일 수가 있단 말인가.’
예술이란 상류층의 전유물이라는 사고를 가진 이병구에게 예술의 향유란 계급을 확인하는 수단이었던 것 그렇게 아스베가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회원제로 운용되는 골동품 경매장이었다.
극장처럼 넓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경매는 꽤 박진감이 넘쳤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어울릴 법한 스테인드글라스부터, 건륭제 때 그렸다는 극사실화까지.
하지만 이병구는 곧 따분해졌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이병구의 눈으로 볼 때 앞서 소개된 물건들이 그다지 가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인내심을 잃은 이병구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흐음…… 생각보다 별거 없군요.”
“흐흐. 좀만 더 기다려 보십쇼. 원래 주인공은 나중에 나온다지 않습니까. 진짜 좋은 물건이 나올 테니까요. 특히 오늘의 주인공은 특별합니다.”
“그렇습니까?”
“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생각과는 다른 반응에 쩔쩔매던 아스베가 자신하자 이병구도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오색찬란한 도자기는 이전에 등장했던 화려함과는 다르게 우아하면서 고풍스러운 감이 있었다.
심드렁했던 이병구의 눈에 생기가 돈 것도 그때부터였다.
‘저건?’
구름 위에 학이 그려진 매병이라. 가져온 물건은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모습이다.
사회자가 자신 있게 소개를 올렸다.
“오늘의 물건 중에 최고의 상품을 소개하겠습니다. 천지운학 매병입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절, 고려에서 제작된 청자로 보물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물건이죠. 이 유려한 비취색을 보십시오. 실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마 세상 어디서도 품질의 양품은 좀처럼 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감정가는 60만 엔부터 시작하겠습니다.”
“80만 엔.”
“100만 엔!”
이마를 좁힌 이병구는 속으로 갈등 중이었다. 저런 유형의 청자는 단순한 예술품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경무대를 자주 드나드는 이병구는 저것과 이와 비슷한 물건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 박사한테 넘기면 아주 좋아할 거 같은데.’
사업하는 데 꼭 필요한 지출일지 고민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어느새 가격이 120만 엔까지 치솟자. 묵묵히 앉아 경매를 지켜보던 이병구가 패를 들며 언성을 높였다.
“200만 엔!”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