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부산행
강태준의 손에 단단히 손목이 붙들린 소년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뭐. 뭐요? 당신은?”
“거 참, 손버릇이 나쁘구먼.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이 손 놓고…… 당신이 뭔데, 이익, 당신 누구야?”
꿈쩍도 하지 않는 손에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는 녀석.
그 말에 강태준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봐, 개수작 말고. 여기 숙녀분 지갑은 어쨌나?”
“누굴 도둑으로 모는 거요. 지금 이봐 증거 있어? 엉?”
“증거? 그거야 확인해 보면 알겠지. 지금 당장 까 봐.”
“무슨 개소리를…… 억! 이봐. 악!”
소년이 신경질을 부리며 어떻게든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강태준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손목이 ㄱ자로 꺾인 소년이 새된 비명을 지르자 집중되는 시선들.
군중에 숨어 있던 동료 하나가 위험을 감지하고 구조를 시도했지만, 인상을 쓰며 막아서는 복만이에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그걸 본 강태준이 귓가에 낮게 읊조렸다.
“씁…… 임마 가만있어. 잘못하면 손모가지 날아간다.”
“시팔. 이것 좀 놓고…… 아악! 이봐! 이 개같은…… 악!”
“어이구야, 실수 손에 힘이 들어갔네. 어디 한마디 더 해 보시지?”
상황이 소란스러워지자 선내 순찰을 돌던 해양 경비원이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창백하게 질린 소년은 버둥거렸지만 이미 상황은 늦은 뒤.
눈치 빠른 경비원이 주머니를 뒤지자, 녀석의 가방에서 그간 훔친 전리품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어머! 진짜잖아?”
“저놈 삐끼였어?”
놀란 여자가 손을 입에 대고 놀란 표정을 짓자, 웅성거리는 소리에 사람들이 두루 몰려들었다.
“어머! 내 지갑!”
“이것도. 내 거네. 도둑놈의 자식이 이거 아주 몹쓸 놈이구먼.”
“이런 시팔 놈은 손목을 잘라 버려야 해!”
“자자! 거리를 좀 벌려 주십시오! 거 키 큰 양반, 은근슬쩍 손대지 말아요!”
어느새 분노한 군중에 둘러싸인 소년. 사방을 둘러싼 어른들이 훈계하듯 녀석을 윽박질렀다. 위축된 소년이 어버버하는 동안, 범인에 수갑을 채운 해양 경비원이 좌중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 사이 강태준이 묵광이 나는 지갑을 집어 공손하게 여자에 건넸다.
“여기 그쪽 지갑 맞지요?”
“아, 정말이네. 감사해요.”
이런 일이 처음이었는지 고개를 숙여 고마워하는 그녀.
잠시 후 흥미를 잃은 사람들이 흩어지자, 아까 다가온 해양 경비원이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모자를 벗었다.
“이놈 진짜 상습범이었는데, 겨우 잡았군요.”
“그 녀석은 이제 어떻게 됩니까?”
“일단 공범자가 있는지 추궁해 봐야죠. 하선 즉시 경찰서로 연행하겠습니다.”
수갑이 채워진 소년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쓸쓸히 퇴장하는 녀석을 뒤로하고, 선루에 서 있던 그녀가 강태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 감사합니다. 선생님.”
“되었습니다. 애초에 선생님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닙니다. 그보다 숙녀분 혼자 다니시다니 위험합니다. 설마 동행은 아무도 없습니까?”
“있긴 한데, 지금 객실에서 주무시는 중이라…… 사실 허락 없이 나왔거든요.”
원래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집사와 함께 왔는데 피곤한지 깨어날 줄 모른다고.
역시 귀한 집 아가씨였군. 강태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멀미 때문에 나오신 건가요?”
“아니요.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리지는 않는데 선실에만 있기가 답답해서요. 사실 이렇게 여객선을 타는 게 생전 처음이거든요.”
“그래요? 배를 처음 타봤다니. 천연기념물이군요. 내지에서만 사셨나?”
지금 같은 시대에 배를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다니, 신기해하는 강태준에 그녀가 변명하듯 말했다.
“네. 원래 본가가 서울인데, 아버지 임지가 갑작스레 바뀌시는 바람에…….”
“아, 부친께서 공직에 계신가 보군요.”
“뭐 대충,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럼 선생님은 부산에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그러자 옆에 있던 김복만이 갑작스레 끼어들었다.
“선박용 엔진이 필요해서요. 사실 배를 하나 마련했는데 엔진이 삭아서 그거 구하러 갑니다.”
“오, 그래요? 그럼 선주신가요?”
“선주는 무슨. 대충, 조그마한 나룻배나 운용하는 처지죠. 아직은 시작도 안 했습니다. 수리 마치는 대로 운송사업을 할 예정이긴 하지만요.”
“맞습니다. 배를 사는데 돈을 다 쓰다 보니 여유가 없더군요. 당분간은 긴축 재정이어야죠.”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치는 강태준에, 옆에서 구라를 치는 복만이.
여자가 손바닥을 모으고 눈을 반짝였다.
“와, 젊은 나이에 대단하네요. 청년 사업가분들이셨군요.”
“하하. 사업은 무슨 아직은 이렇다 저렇다 언급하긴 어려운 수준이죠.”
“그래도요. 그렇게 확고한 목표를 갖고 움직인다는 게 멋있는 거죠.”
허풍에 괜스레 쑥스러워진 강태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앞으로 차차 할 예정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때 뿌웅 하고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마침 삼천포에 도착했다는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사람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아씨 어디 계십니까?”
“아, 석태 아범이네요. 저 여기서 내려요. 들러야 할 곳이 있어서요.”
“아. 그렇습니까?”
은근히 아쉬운 마음이 든 강태준이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잠시 망설이던 여자가 서둘러 지갑을 꺼냈다.
“아, 그것보다 사례금을 드려야…….”
“하하. 뭘 이런 걸 다 괜찮아요.”
“제 마음이 불편해서 그러니 받아 주세요.”
“하하. 그럼 투자금이라 생각하고. 사양하지 않고 받겠습니다.”
강태준은 끝까지 거절하려고 했지만 잽싸게 끼어든 김복만이 옆에서 돈을 챙겼다.
도끼눈을 뜨는 강태준이었지만 눈치 없는 동생은 헤헤거리며 돈다발을 새기에 여념이 없다.
흐뭇이 그 모습을 보던 여자가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더니, 메모지에 뭔가를 써서 건넸다.
“저, 이거. 혹시 필요할 일이 있음 연락 주세요.”
메모지를 확인한 강태준이 되뇌듯 말했다.
“부경 변호사 사무소?”
“네. 삼촌이 운영하는 곳인데, 혹 법적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사실 제가 거기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거든요. 혹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요.”
“아, 감사합니다. 참고하죠.”
“그럼 이만…… 기회가 되면 또 봐요.”
인사를 마치고 사라지는 여자가 점점 멀어진다.
못내 아쉬운 기분에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상대가 안 보일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던 강태준이 이내 쪽지에 적힌 이름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설유하라. 이쁜 이름이네.”
“형님, 이거 보십시오. 무려 일천 환 (약 2달러)입니다.”
대통령 초상이 그려진 백 환권 10장에 희희낙락하는 복만이.
괜스레 그 모습이 미워진 강태준이 뒤통수를 딱 소리 나게 갈겼다.
“아니 왜 때립니까?”
“임마 전부 내놔. 은근슬쩍 숨기지 말고.”
“아니 형님 아까는 안 받는다면서.”
“이 짜식이, 그게 내 공이지 니 공이냐? 이런 건 확실히 해야지.”
졸지에 돈을 전부 빼앗긴 김복만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저녁 무렵, 여수에서 출발한 여객선은 새벽녘이 되어 부산 영도에 도착했다.
저녁 어스름 휘황하게 빛나는 부산항의 불빛들은 촌구석 젊은이에게 있어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한 별세계였다.
“와우. 대단하군요.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어이구 촌놈. 고작 이런 거에 놀라?”
“신기한 건 신기한 거죠. 와. 세상이 넓군요. 정말.”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강태준도 새벽 항구를 보기 위해 갑판으로 나갔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부산항은 과연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영도의 중심인 산 중턱 위 짙게 깔린 해무가 연기처럼 흘러나온 불빛들을 감싸 안는다.
항구 입구에서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들어선 집들은 마치 상자처럼 볼품없는 모양이다.
6.25 전쟁이 일어난 해, 부산은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되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피난민들이 지은 공간 꼭대기부터 판자촌들이 그득한 풍경을 둘러보며 강태준이 말했다.
“자 내리자고.”
“그럼 어디로 갈려구요?”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나. 일단, 이 근방서 노가다 뛸 곳부터 알아봐야지.”
“노가다요? 뭐 일자리 구하러 온 거 아닙니까?”
“임마, 기술도 뭣도 특별히 증명할게 없잖냐. 일단은 아무 데나 취직해야지.”
“허이구 참.”
강태준이라고 계획 없이 온 건 아니다. 당시 부산은 건설 경기가 엄청나게 호재였다.
전쟁 중 일선으로 물자를 보낼 교두보로써 미군들을 재울 숙소나 부대시설 공사로 하루 종일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던 것.
덕분에 부산은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바빴다.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곳은 신창동의 국제시장이었다. 광복 이후 전시 물자와 해외 동포들이 몰려들면서 처음엔 도떼기시장이라 불리다가 1950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까지 취급하게 되며 국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이 국제시장은 당시에 해외 양품, 군수 물자, 전자 제품 등 없는 게 없을 만큼 대단한 성세를 이루고 있었다.
‘설마 그렇게 호황인데 취직할 자리가 하나 없게?’
하지만 강태준이 자신했던 것과 달리 마땅히 취직할 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어려 보이는 얼굴이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스무 살이라고? 내 보기엔 영 아닌 거 같은데. 신원 보증인은 있고?”
“거 함께 온 동기는 힘 좀 쓸 것 같이 생겼다만 미안하이. 이쪽은 경력자 외에는 안 뽑거든. 어린 녀석은 다루기가 힘들다는 주의라. 자리가 없어.”
며칠간 여인숙을 빌려 생활하는 동안 계속 발품을 팔아 보았지만, 마땅히 취직할 장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몇 번을 돌아다녀도 답이 없자 초조해진 강태준.
하지만 복만이는 여전히 태연했다.
“다리 아프구먼. 오늘은 고만 좀 합시다.”
“한 군데만 더 찾아가 보고.”
“형님도 참. 벌써 날이 어둑해지고 있잖소. 정 안되면 인력 사무실을 찾아갑시다. 돈을 떼먹히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 밥값이라도 벌어 놔야지.”
“그래, 방법이 없다면 차라리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복만이의 말이 일리가 있다 생각한 강태준은 다음날부터 범일동 쪽에 있는 인력 사무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여인숙을 나와 아침 일찍 길을 나선 강태준. 날이 아직 초여름 궂은비와 해풍으로 추위가 살 속을 파고들었다.
영도다리 건너 광복동 일대로 가자, 자전거를 탄 배달부가 딸랑거리는 종을 매달고 우유와 신문을 나르는 모습이 보인다. 바람이 추워서인가 김복만이 코를 훌쩍였다.
“엣취, 여기 으슬으슬하네요. 초여름인데도 바람이 시리네.”
“일교차가 커서 그렇지. 앞으로 돈 벌면 바람막이라도 하나 사야겠군.”
얇은 옷깃을 세우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찰나, 갑작스레 복만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디 갔는지 찾아보니 녀석은 또 길거리 음식에 정신이 팔린 듯 골목길로 들어가 버리고 있었다.
‘아 진짜. 저놈 보게. 아주 매를 버는구먼.’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오로지 먹는 생각뿐이라니.
한 대 때려 줄 생각으로 빨라지던 발걸음은 갑작스럽게 우뚝 멈추었다.
허름한 석조 건물 위로 흰색 페인트로 카발 수리소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