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회귀
어슴푸레하게 멀리서부터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몸이 수렁으로 서서히 빠져나가는 기분.
물에 적신 휴지처럼 풀린 몸은 마치 해파리처럼 흐물흐물 용해되어 가고 있었다.
한없이 깊은 곳으로 빠지는 듯한, 서늘한 감각이 명치에 엉겨 붙고 있다.
이게 바로 죽음인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니, 살아왔던 기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UDT 출신으로 머구리 일을 하다 스크루에 호스가 끼어 죽은 아버지. 빚쟁이에 쫓겨 야반도주했던 일.
암에 걸린 어머니의 뒷바라지를 위해 대양에 뛰어들었던 일.
명태잡이를 하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하고 IMF때 투자했다 대차게 말아먹은 주식까지.
‘덕분에 노후 자금까지 다 날렸지.’
생각하면 열이 뻗치는 일. 강태준이 주구장창 배를 타게 된 것도 선택보다는 필연이랄까.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다사다난했던 인생은 험로의 연속이었고 배는 도피처이자 그의 절반이었다.
그래. 힘들게 아등바등 사느니 이렇게 훅 가도 상관없지 않을까.
해저의 어두침침한 그늘이 의식을 잠식해 들어간다.
그렇게 눈을 감는 순간 윙윙거리는 고함이 뇌 속을 뒤흔들었다.
“강태준, 이 빌어먹을 불효자가. 어서 눈을 떠!”
“형. 눈 떠요!”
순간 강태준의 뇌리에 이 회장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득의양양하기 짝이 없는 이억수의 모습이 뇌리를 파고든다.
‘그래서 이대로 포기하는 건가?’
울컥, 끓어오를 듯한 분노가 폭풍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그래,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강태준은 억지로 힘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살기 위해 날아오르는 참치 떼처럼 의식이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번뜩!~
눈을 뜨자 낯선 공간. 놀라움에 입을 막는 간호사의 동공이 흔들린다.
뿔테 안경에 가운을 입은 의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기적입니다.”
“사…… 살았습니다. 살아났어요!”
눈물로 눈이 퉁퉁 부은 아주머니 한 분이 그를 끌어안았다.
“아이구, 이놈아 살았구나. 살았어!”
“여기는? 어딥니까?”
“누구, 누구세요?”
“아이고, 죽다 살더니 정신이 나갔네, 아이고…….”
충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
오래된 기억 속 누군가와 오버랩된다.
* * *
“보호자 분 진정하시고요, 충격으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증이니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해 주십시오.”
“기억 상실요? 혹시 뇌 손상이라도.”
“그런 건 아니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쇼. 뇌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서서히 돌아올 겁니다.”
금방 퇴원한다고 했지만, 의사는 요양이 필요하다며 극구 퇴원을 말렸다.
병원복을 입은 채, 천천히 병원 복도를 도는 강태준을 보며 간호사들이 수군댔다.
“우리 병원 환자 중에 저런 훈훈한 청년도 있었나?”
“저번에 물귀신 돼서 실려 온 청년 있잖아. 아 물속에 투신했다. 기억을 잃었대. 자살 시도를 했었나 봐.”
“어머 그 청년이었어? 잘생긴 청년이 안타깝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
한 마디씩 지껄이는 간호사들이 힐끔힐끔 훔쳐보는 모습이 신경이 쓰였다.
‘에휴, 다 들린다, 이것들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그는 동명이인의 몸속으로 환생했다. 그것도 저체온증으로 사망 판정을 받고 영안실로 옮겨지기 직전에 부활한 것.
피부부터 검게 그을린 중늙은이가 아니라. 젊고 건강한 육체를 가진 건장한 청년으로 생동감이 느껴지는 곱상한 얼굴과 달리 탄탄하게 부풀어 오른 팔뚝이 귀공자를 연상케 한다.
세월의 무게로 풍화된 예전과는 사뭇 다르달까. 하지만 흘러나온 기억의 무게는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이, 몸뚱어리도 사연이 무척 기구하군.’
이 새 육체의 아버지는 거제의 멸치잡이 어장을 가지고 있던 지방의 대유지였다. 대지 1천 평에 99칸 기와집을 가지고 있을 만큼 탄탄한 집안에 마가 낀 것은 전쟁 때문. 철도 관급 공사를 수주한 이후 침목 공사를 마쳤는데 정부로부터 공사대금을 수령하기 직전 6·25사변이 터져 버린 것이다.
화폐 가치가 박살 난 마당에 돈 받을 겨를이 있겠는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갖고 있던 배까지 징발당했다. 어업길이 막힌 멸치어장은 빚더미에 도매금으로 넘어가 버렸다.
덕분에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집안 재산은 모두 압류당했다.
수 대에 거쳐 잘나가던 집안이 그야말로 단박에 박살이 난 것.
수산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태준은 하는 수 없이 대학을 휴학했고, 신안의 외갓집에 돌아와 눈칫밥을 먹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하지만…… 이런 갑작스런 상황 변화는 문약한 도련님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했다.
그래서 계속되는 비관 끝에 결국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나약해 빠진 놈이군. 어린놈이 목숨을 함부로 버려서야 쓰나.’
강태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부유함이라곤 경험해 본 적도 없는 강태준이 보기에는 이 정도로 절망하는 건 부잣집 도련님은 철없는 투정일 뿐이었으니까. 어찌 되었든 이 몸은 사지도 멀쩡하고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강태준이 보기에는 복 받은 놈이 분명했다.
매일같이 지극 정성으로 그를 돌보는 어머니부터 친근한 사촌 동생까지 있었으니.
“자. 아, 해라.”
“저 혼자 먹을 수 있다니까요.”
“병자가 무슨, 자 오늘 잡은 오골계야. 보신에 좋다더라.”
속으로 부담을 느끼는 강태준이었지만 매일같이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어머니를 보니 도저히 거절할 수 없다. 그렇게 며칠간 병원 침실에 누워 지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여유 있게 살던 것이 얼마 만인지. 조금 여유를 갖게 되자 주어진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이 청년의 몸으로 계속 살아야 한다는 걸…… 강태준은 가만히 손으로 비치는 햇살을 손으로 가렸다 다시 잡아 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해 보면 전생의 삶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인생 아니던가. 빚에 빚. 아버지 약값 대랴. 집세 마련하랴. 허리가 빠지게 허덕이던 나날들. 그나마 딱 한 번, 제대로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려다가 픽 하고 죽어 버렸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넘어서야 진짜 빛을 보게 될 줄이야.
‘아이러니하구먼. 토사구팽을 당하는 시점에 바로 과거로 돌아오다니.’
혹시 시간 여행자의 혈통이라도 있는 건지. 어쩌면 고달팠던 전생에 대한 보상일지도. 회귀의 원인을 고찰해 보는 강태준이었지만 어떤 원리든 이미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선이 아니다. 기적에 의문을 가져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 돈에 짓눌려 아등바등하다 죽은 인생, 이번 생엔 돈을 버는 게 답이다.’
돈으로 모든 걸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할 수 있다.
살기 위해 자본의 노예로 살아온 강태준에게 가난이 뼈가 사무치는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 강태준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근현대사의 사건 리스트를 하나씩 노트에 적어 두었다.
일기를 쓰듯 사건을 써 내려가다 보니, 어느덧 노트 한쪽이 빼곡히 찼다. 강태준은 스스로 정리한 노트를 복기하듯 다시 보며 생각에 잠겼다.
‘수업 시간에 졸지 않아서 다행이군. 근데 이거 해 볼 만한 거 같은데?’
이만승의 하야, 사카린 사건, 한일국교 정상화, 쿠바혁명, 5.16, 증권파동, 경부고속도로 건설, 베트남 전쟁, 중동진출, IMF, 9.11테러 이후의 세계변화 등등 근 현대사를 조망하면서 찾아낸 결론은 하나.
결국 강태준의 승부처는 대양에 있다.
사업을 하려면 얕은 지식이나 흐름만으로는 쓸모없다는 건 이미 경험을 통해 아는 사실. 그가 다른 건 몰라도. 뱃일만큼은 자신 있지 않나. 더욱이 지금은 전시, 임시수도인 부산에 온갖 물류가 집중되면서 급성장하는 시점이니 나라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경제인으로서 자기의 역할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양재벌,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한국 발전사의 주역이 되는 거다.’
목표를 정하니 가슴이 설레며 부풀어 오른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살기 위해 억지로 선택한 길이 아닌 자기의 길을 개척하는 거다.
물론 복수도 겸사겸사 해야 겠지. 이억수 그 자식을 생각하면 피가 끓을 지경이니까. 하지만 그냥 단순히 죽이는 수준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걸 복수라고 하기엔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압도적인 재력으로 성공해서 찍어 눌러 버리는 것. 놈이 그토록 좋아하는 돈의 힘으로 파멸시키는 것이 더 제대로 된 복수가 아닐까. 더 내려갈 수 없는 나락까지. 영원히.
생각을 정리한 그 날부터 강태준은 몸 관리를 시작했다. 새 인생을 제대로 즐기려면 건강이 우선. 다행히 젊고 생명력 넘치는 몸은 꽤 튼튼했고 주의를 조금만 기울이니, 금세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퇴원일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가 말했다.
“오늘 퇴원이구나. 몸은?”
“괜찮습니다.”
“딱히 이상은 없습니다.”
“다행이구나. 일단 집에 들어가면 외삼촌부터 뵙자꾸나. 따로 할 말이 있으시단다.”
외삼촌이라면 일단 이 몸이 신세를 진 집주인.
하긴 조카가 자살 소동까지 벌인 마당이니 할 말이 많기도 하겠지.
심호흡하고 안방에 들어간 강태준이 무릎을 꿇고 정좌하자 물끄러미 바라보는 외삼촌.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외삼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편히 앉아라. 몸은 좀 어떠냐?”
“이제 괜찮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너는 우리 집 장손이나 마찬가지야. 아무리 힘들어도 허튼 생각하지 말고, 네 애미 생각해서 딴생각 하면 안 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알아들었다 믿는다. 내가 널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이것 때문이다.”
강태준에게 내준 것은 두툼한 돈 봉투였다. 느닷없는 돈더미에 강태준이 물었다.
“이건 뭡니까?”
“한 학기 등록금이다. 근래 마음이 심란한 것 같으니, 학교부터 복학하거라.”
“예? 복학이요?”
“내 듣기로 전시라도 대학은 정상적으로 개강한다더라. 앞으로 대학교 등록금은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보마.”
아버지 빚 때문에 투자한 재산을 통으로 날린 외삼촌 입장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대인배적인 행보다. 솔직히 좀 탐이 나는 금액이었지만 강태준은 눈을 딱 감고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이건 마음만 받은 셈 치지요. 외삼촌.”
“복학하지 않겠다는 소리냐?”
“그게 아니라 이왕 휴학한 것 한두 학기 후에 다시 복학하겠습니다. 저도 어엿이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인데 제 생활비 정돈 스스로 벌어야죠.”
“돈부터 벌겠다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냐?”
“어장 배를 타려고 합니다.”
“그게 진심이냐?”
외삼촌의 눈이 신기하다는 듯 이채를 띄었다. 빙의 전 이 몸의 주인은 수산대를 간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함이었지 직접 몸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것.
하지만 강태준에게는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네…… 배 타고 몇 달만 힘들게 벌다 보면 몇 달 안에 학자금은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집에서 노는 백수도 못 할 짓입니다. 간만에 몸도 근질거리던 참이거든요.”
“하지만 굳이 배를 탈 필요는 없지 않느냐? 어차피 복학하면 실습으로 때울 텐데?”
“실습만 나가서는 현장을 모릅니다. 부족한 점은 미리 경험으로 때워야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졸업 후엔 원양어선 선장에 지원해 볼까 하거든요.”
“원양어선이라고?”
“옆 나라 일본에서는 참치잡이 배가 엄청 인기라고 하더군요. 외항선으로 한번 다녀오면 도쿄의 집 한 채 값은 벌 정도라는데 조만간 한국에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미리 소형어선이라도 한 번 더 타서 경력을 쌓아 놔야죠.”
“원양어선을 타겠다? 네가?”
“예. 돌아가신 아버지의 멸치어장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어느 정도는 고생을 감수해야죠.”
당시에 수산대 4년 과정을 수료하면 졸업 후 어선갑종 2등 항해사 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원양어업 초창기 실제 경력 있는 선장이 드물었던 만큼, 몇 년만 뺑이 칠 것을 각오하면 몇 내 선장까지 고속 승진할 가능성이 크다.
강태준의 확실한 구상에 외삼촌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한 번 저세상 갔다 오더니, 이제 철이 들었구나.”
“예. 저도 성인입니다. 이제 밥값은 해야죠. 아버지도 내심 그걸 바라셨을 겁니다.”
“네 아버지가 봤으면 뿌듯해했겠구나.”
외삼촌은 흐뭇하면서도 내심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가겠다고 하는 것에 찡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도 잠시, 표정을 고친 그가 곧 근엄하게 타이르듯 말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장한 일이구나. 허나 뱃일은 위험하고 고된 일이야. 쉬이 의지만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한 번 죽었던 몸인데, 그 정도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결심은 확고합니다.”
평생 한 일이 고기잡인데 그것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그런 자신감은 다음 말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게 아니다. 의기는 가상하다만 지금 마땅한 배가 없는데 어떻게 배를 타겠느냐?”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죽다 살아나더니 지금이 어느 시절인지 잊어버렸나 보구나. 지금은 다름 아닌 전시다. 쓸 만한 배들은 모두 전쟁에 징발당해 탈 배를 구하기 마땅치 않다는 말이지.”
아연실색했던 강태준이 입을 벌렸다. 딱히 대꾸할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러니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빨리 복학해서, 학교 졸업장을 따두는 게 먼저 아니겠느냐. 학부 졸업장이 있으면 취직할 곳도 널리겠지. 그편이 낫지 않겠느냐?”
“하지만 외삼촌.”
“네 의견은 나도 존중하마. 하지만 복학이 먼저다. 알아듣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그럼 물러가 보거라. 어차피 복학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쉬엄쉬엄 공부라도 해 두는 게 좋지 않겠니?”
더 이상 고집을 부리기도 뭣한 강태준도 일단은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당분간 유예를 받고 책상에 앉았지만 막상 전공 서적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자가 가득한 것은 둘째고 세로쓰기로 된 책이라서인지 당최 읽히지 않았던 것이다.
‘에휴, 답답해서 미치겠구만.’
하얀 것은 종이고, 검은 건…… 먹물인가. 대충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골방에 처박혀 있다 보니 좀이 쑤셔서 못 참겠다. 책 앞에서 씨름하던 그에게 갑자기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 안에 있어?”
“있다. 들어와라.”
눈치를 보며 사과 접시를 들고 들어온 녀석은 사촌 동생인 김복만이다. 복만이는 중등학교 5학년에 불과했지만, 씨름을 오래 해서인지 덩치는 산만 한 녀석.
강태준을 살피던 녀석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설마 대낮부터 자고 있었냐?”
“자기는 무슨. 잠시 졸았을 뿐이야. 그보다 갑자기 뭐냐?”
“고모가 형 과일 갖다 주래. 그보다 입가의 침이나 닦고 말하시던가. 눈꼽 좀 떼고.”
“오 땡큐.”
강태준이 사과를 받아들고 포크를 들자. 혀를 끌끌 차던 복만이가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며칠 하는 척하더니 또 농땡이여? 하긴 형이 제대로 공부할 인간은 아니지.”
“뭐 이 자식이 그냥!”
강태준이 머리를 쥐어박으려고 하자 엉겁결에 방어 자세를 취하는 복만이.
“여어. 형 지금 때리면 아쉬운 쪽은 형일 텐데? 지금 배 찾고 있다며? 나, 배가 어딨는지 알아.”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에 슬쩍 손을 푸는 강태준
“진짜로? 구라 아니고?”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형.”
“그게 어디 있는데?”
“음…… 맨입으로는 좀 그렇고. 요새 용돈이 좀 부족해서리…….”
우물우물 핑계를 대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었지만, 맨입으로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강태준이 10환짜리 지폐를 꺼내 손바닥에 쥐여 주었다.
“옛다.”
“에게. 겨우 10환?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그럼 깽값부터 줄까. 빨리 가자 임마. 대가리 확 깨지기 전에…….”
“사람이 성급하긴…… 알았다. 따라와 그럼.”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바닷가로 향하는 두 사람.
해변을 따라 걷자 흰 조개껍질과 자갈이 가득한 해안 사구가 보였다. 흰 모래가 덮인 바닷가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하늘은 비췻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파도에 닳아 반질반질해진 자갈밭을 지나자, 후미진 개펄을 끼고 작은 조각배들이 어깨를 맞대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동안 걷기만 하는 것이 무료했는지 땅을 보며 걷던 복만이가 물었다.
“근데 형, 형은 대체 왜 큰 배 선장이 되고 싶은 거야?”
“왜, 너두 관심 있냐?”
“아니, 형이 그랬잖아. 배 한번 나가면 집 사 온다고. 뱃놈이 그렇게 잘 버는지 궁금해서.”
“버는 놈은 잘 벌지. 외항선은 꽤 짭짤해. 지금 일본에서는 튜나라는 물고기가 폭발적인 인기인데, 그게 톤당 200달러에 팔리거든.”
“톤당 200달러. 그러면 엄청난 거 아녀?”
지금은 1953년. 한국의 GDP가 100달러조차 안 되던 시절이니 당시 200달러라면 어마어마하게 큰돈. 하지만 김복만의 관심은 돈보다는 다른 쪽에 있었다.
“야. 그렇게 비싼 생선이 있음 한번 먹어 보고 싶네. 얼마나 맛있으면 그렇게 비싼가?”
“너는 어찌 그리 처먹는 것 외에 생각이 없냐?”
“에이, 형. 옛말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이 좋다지 않아? 먹는 게 남는 거야.”
“말이 씨가 된다. 임마.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렇게 투덕거리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흙집 같은 움막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고기잡이가 한창일 때 소금물로 멸치를 삶는 움막이었다. 아직 회복이 덜 되었던가. 슬슬 다리가 아파 오자 강태준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이쯤이면 많이 온 거 같은데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내 봐 둔 곳이 있으니.”
자신감 넘치는 복만이의 말에 강태준은 입을 닫았다. 과연 잠시 후 걸음을 재촉하던 일행 앞에 넓은 개펄이 드러났다. 썰물 때가 되었는지 밖으로 나온 돌게들이 활발히 돌아다니는 가운데, 빠꼼히 고개를 드러낸 무언가가 시야에 잡혔다.
“저기야!”
순간 강태준은 못 박은 듯 멈추어 섰다. 과연 물이 빠진 개펄 한가운데 난파선 한 척이 끌어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