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노을 지는 밤,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바다.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주홍빛으로 빛나는 바다는 생물처럼 금빛 비늘을 번뜩이며 큰 숨을 몰아쉬고 있다.
석양에 비춘 빛이 부서지며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고 갈매기 떼가 오가며 허공에 끼룩거리는 울음을 뱉었다.
그사이 엔진이 움직이자 늙고 병든 배는 다시 털털거리며 지평선을 헤쳐나갔다.
좁은 해협을 통과하며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전진해 나가는 화물선
배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파도에 치인 물보라가 하늘 높이 튀어 오른다.
선장인 강태준은 해협 사이에 놓인 암초를 확인하고 신호를 보냈다.
“좌현에 장애물, 우현으로 10도!”
선수 위 망원경을 든 강태준이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방향을 살짝 튼 배는 이후 별다른 문제 없이 호르무즈 해협을 넘어섰다.
적막한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 신기루처럼 나부끼고 항해사가 안심한 듯 지껄였다.
“한고비 넘겼구먼.”
“그보다 식사가 준비되었답니다. 강 선장님.”
“벌써? 빠르군. 어서 가 보자고.”
식당으로 내려가는 순간, 갑작스러운 소리와 함께 폭죽 소리가 울렸다.
빵!~
머리 위로 형형색색의 종이와 함께 인공눈이 뿌려지자 미리 대기하던 2등 항해사가 살갑게 고깔모자를 씌워 주었다.
“캡틴,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니 뭘 이런 걸?”
“생일이면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설마 저희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았습니까?”
“에이 귀빠진 날이 무슨 대수라고.”
쑥스러워하는 강태준이 어깨를 으쓱하자, 조리장이 특별요리를 따로 대령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알싸한 향의 정체에 반색하는 강태준이었다.
“아니 이건 마라탕 아녀?”
“솜씨 좀 발휘해 봤습니다. 자주 해 본 요리가 아니라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겠네요. 자자 한입 드셔보시죠.”
과연 요리사가 자신한 대로 냄비 한가득 야채에 고기와 해산물, 소시지가 추가되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둥실둥실 떠오른 완자가 먹음직하게 둥둥 뜬 모습이 절로 침샘을 자극한다.
이 해역에서 마라탕을 보다니.
맨 처음 조심스럽게 국물 맛을 본 강태준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크아, 달짝지근한 것이 일품이구먼.”
사골육수 맛에 알싸한 향이 가미된 탓인지 한국인 입맛에 맞았다.
“무사 항해를 위하여!”
“위하여!”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중, 항해사가 문득 물었다.
“근데 캡틴,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면 뭐 하실 겁니까?”
“이제 회사는 그만둬야겠지. 본사 지시에 항명했으니 방법이 있겠나?
욱해서 본사에 대고 내질렀으니 사표를 쓰는 거 외에 방법이 있나.
사실 10년 차 참치잡이 선장인 그가 이렇게 전쟁지역 화물 운반선을 맡게 된 건 여러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었다.
강태준은 만 2년 전까지만 해도 운 좋게 대어를 만나 평소보다 수개월이나 만선을 앞당겼던 유능한 선장이었다.
그렇게 뜻밖의 행운에 기분 좋게 귀환 전문을 보냈던 그.
하지만 장장 1년 8개월의 조업을 마치고 가족들과 회포를 풀 일만 기다리던 그에게 도착한 답신은 의외의 내용이었다.
-귀선의 성공적인 조업 성과를 치하하며,
“어시장이 비수기라 어가가 최저로 곤두박질친 상황이니 어가 조정을 위해 귀환을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보류하기 바람. 연중 어획물 가격이 인상될 시점인 3~4월에 귀환을 맞추면 매출이익이 클 것이니, 어획한 물량은 운반선에 이송한 뒤 계속 조업할 것을 명하는 바임, 이상.”
강태준은 눈을 의심했다. 상투적인 문구가 적힌 통신문은 기대를 배반하는 내용이었다.
추가 조업에 필요한 서포트는 확실히 하겠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발언에 선장으로서는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수 없었다.
“계약이 끝났는데, 귀항을 미루라니. 이게 무슨 개방귀 같은 소리야.”
만선 후, 국내로 복귀하기로 한 것은 엄연한 계약사항이다. 헌데 발해 원양에서는 당최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본사에서는 선원들의 귀항 기회를 묵살하고 오로지 회사의 수익만 생각한 야만적인 수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그렇다고 회사의 부당한 지시를 선원들이 고분고분 따랐다 해서 추가적인 상여금을 나눠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노릇.
화난 강태준은 통신장이 보는 앞에서 통신문을 북북 찢어 버렸다.
“서…… 선장님!”
“이억수 이 개자식이, 누굴 머가리로 아나?”
씩씩거리던 그가 항해사를 향해 소리 질렀다.
“지금 당장 귀환한다!”
“회항이라니, 그럼 회사가 가만있겠습니까?”
“이 배의 선장은 나야. 연안선 한번 안 타 본 선주가 감히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이번 문제는 내가 오롯이 책임지겠다.”
꼭지가 돈 강태준이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렸다. 간부 일동과 선원들을 모아 놓은 뒤에 본사의 부당한 지시를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이번 회사의 명령은 명백한 근로계약 위반이니 따를 수 없다. 우리 발해 산타마리아호 선원 모두는 원칙대로 승선 계약 기간이 종료되는 대로 귀항할 것이다.
선장이 회사의 명령을 어기고 뱃머리를 돌리자, 발해 원양 본사는 호떡집에 불이 난 것처럼 발칵 뒤집혔다. 하달한 지시를 선장이 정면으로 거역한 건 창사 이래 처음 있는 일.
발해 원양에서는 통신실이 떠나가도록 선수를 돌리라 독촉했다.
물론 강태준은 대꾸 없이 묵살했고.
협박이 통하지 않자 회사에서는 선장인 강태준에 당장 하선해 항공편으로 귀국하는 대신 어선의 지휘권을 1등 항해사에게 넘기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강태준 선장은 지금 단독 복귀하고 회항을 중지하라, 거부 시 귀국과 동시에 형무소 행이다.
본사 조업 연장 지시가 떨어졌지만, 기어이 명을 씹고 회항한 배는 초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밤 부산 묘박지에 닻을 내렸다. 하지만 입국 수속을 끝내기 무섭게 선원 과장과 임무를 이어받을 후임 선장이 들이닥쳤다.
승선 계약은 이미 파기된 상태. 인도양의 횡파와 싸우며 채운 어획물과 대일 판매와 뒤처리도 강태준의 손을 영영 떠난 것이다.
강태준을 비롯한 원양 어선 간부들은 항구에 입항하는 즉시 곧장 회사의 고발조치로 경찰서로 입건되어 부산 부민동 검찰 청사를 들락날락해야 했다.
사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유는 괘씸죄. 회사의 지시에 불응하고 자의로 항로를 돌렸다는 죄로 회사에 의해 고소당한 것.
그러나…….
까다롭고 강도 높은 조사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혐의없음 판정을 내렸다.
아무리 막강 재력을 자랑하는 이억수 회장이라도 세상에는 상궤라는 것이 있다.
승선 계약상 조업 기간이 종료된 시점에 선원들 동의 없이 조업을 강제로 연장하는 것은 순리에 벗어난 행위다.
더욱이 강태준이 회사가 제시한 목표액보다 두 배가 넘는 어획고를 달성한 것도 참고사항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이억수로서는 개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망신을 당하고 가만있을 이 회장이 아니다. 검찰에서 혐의없음으로 강태준이 풀려났단 소식을 들은 이 회장은 거품 문 게처럼 날뛰었다.
“뭐라고? 혐의 없음? 항명이 무슨 죄인지 몰라?”
“하지만 검찰이 요지부동입니다.”
“시팔놈이. 니 월급 주는 놈이 검찰이야? 뒤지고 싶어?”
체면을 제대로 구긴 이 회장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이 회장은 치졸하게 나왔다.
숙박비와 상륙비, 가족에게 선지급하는 생활비까지 전부.
운항에 소요된 기름값에 물값과 주부식 비용, 어구 구매비, 입항세와 파나마 운하를 드나드는 데 지불한 통행료까지 공동 경비라는 명목으로 청구할 목록에 포함시켜 버린 것.
하지만 강태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애초에 회항할 때부터 이런 부조리한 일쯤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도는 각오했었다.
그렇게 회사와의 길고 지루한 싸움이 계속 중이던 찰나, 천운이 닿았는지 문제가 터졌다.
[미국, 이라크 전면 공격!]
9.11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마침 회사 소속 화물선인 랑데부 호가 이번에 이라크의 바스라항에 입항하기 위해 입국 수속 대기를 타던 중 외국인 선장을 포함하여 약 10명의 선원이 전쟁 구역이라 못 들어가겠다고 버티게 되었다.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에 마땅히 일을 맡을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강태준에게 밀린 정산금을 지불하고, 그간의 분쟁을 마무리하는 대가로 전쟁지역에서의 선박 운항에 협조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송명섭이 아쉬운 듯 다시 물었다.
“그럼 앞으로 갈 곳은 있으시고요?”
“차차 찾아봐야지. 송사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그래도 이제 다른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그럼 이번에 받는 수당이 퇴직금이 되겠군요.”
“그렇지…… 뭐.”
사실 발해의 라이벌인 해신그룹 쪽은 물론 머스크나 MSC 같은 세계적인 회사에서까지 러브콜이 왔지만, 강태준은 구태여 입밖에 열지 않았다. 아직 세부적인 사항이 네고되지 않은 데다 떠나기 전에 스카웃을 언급하는 건 시기상조였다.
‘해신그룹은 덩치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합리적인 회사지. 하지만 해운사 쪽도 괜찮아.’
선적 수는 발해 원양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어획량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 무엇보다 오너인 오재갑부터가 이름 날리는 명선장 출신으로 누구보다 선장의 애환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조건도 파격적이다. 하지만 이참에 조업에서 떠나 화물선이나 모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옆에 앉은 갑판장은 아무 말 없이 곡주만 들이킬 뿐이었다.
“아까부터 말이 없군. 나만 잘리는 건 아닐 텐데, 자넨 이 일 끝나고 어쩔 건가?”
“뭐 저는 은퇴하려고요. 이제 나이도 있고, 애들 생각하면 배 타는 것도 못 할 짓이죠.”
“이거 자네한테는 미안하이. 쓸데없이 말려들게 해서.”
그 말에 갑판장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성님 잘못은 하나도 없수다. 어차피 이번 항차만 끝나면 고향에 돌아갈 참이었습니다. 기력이 쇠해서 험한 일은 더 못하겠더라고. 더욱이 이번 일로 목돈도 생기지 않았소?”
“앞으로 계획은?”
“특별히 생각해 둔 건 없지만 산 입에 거미줄이나 치겠소. 정 안되면 낚시로 소일거리 하면서 어선 수리업이라도 열어야지.”
“요트 말인가?”
“배 타는 건 질렸거든. 그간 모은 돈도 있으니 이제는 뭍에 정착해야죠.”
“그건 그래.”
분위기가 가라앉자 일등 항해사인 송명섭이 손바닥을 치며 등을 떠밀었다.
“피곤하실 텐데, 이제 한숨 붙이시죠. 출항 후부터 하루 3시간도 못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생일이니 번은 제가 서겠습니다.”
“그럴까? 간만에 그럼 수고 부탁하겠네.”
식사를 너무 빨리 마친 탓인지 별로 피곤하지는 않았다.
무료해진 강태준은 항상 그러했듯 바둑책을 펼쳤다.
평소처럼 명인전 기보를 읽다 깜빡 잠자리에 든 강태준.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단잠을 자는 강태준에게 누군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캡틴, 캡틴 일어나세요. 어서요.”
“무, 무슨 일이야?”
비몽사몽 중인지라 경황이 없던 강태준. 코앞에 나타난 사람은 송명섭이었다.
다급한 듯 억지로 그를 깨우는 모습에 강태준도 눈꺼풀을 떴다.
“아직 움직일 수 있으시군요. 약이 덜 들었나 봅니다.”
“수면제라고.”
“조리장이 음식에 수면제를 풀었습니다. 설명은 나중에, 지금은 빨리 도망쳐야 해요.”
그래서 몸이 무거웠나. 약 기운에 취한 강태준이 억지로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부축을 받아 선장실을 나오는 순간, 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영어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선원들은 전부 처리했나?”
“다들 기절해 자빠졌습니다. 이 정도 용량이면 코끼리도 못 버팁니다.”
피가 식는 느낌에 멈칫거리기도 잠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튀었다!”
“어디 갔어?”
강태준은 빠르게 뛰었다.
그때쯤 코앞에 사람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조리장이었다. 앞치마를 입은 채인 조리장이 엉겁결에 소리를 질렀다.
“여기다!”
“이런 시벌.”
달려드는 조리장에 송명섭의 주먹이 얼굴 한복판에 꽂혔다.
벌렁 쓰러진 조리장이 신음하자 구둣발로 아래턱을 냅다 까 버린 강태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조리장이 정신을 잃자, 송명섭이 외쳤다.
“앞으로 뛰십쇼!”
“뭘 어쩌려고?”
“일단 구명정부터 내려야죠. 나머진 그담에 생각하자고요.”
강태준은 냅다 뒤따라 뛰었다.
갑판 위로 올라서는 순간, 커다란 물체 하나가 송명섭의 어깨를 강타했다.
“윽!”
비틀거리는 순간 총소리가 대기를 찢었다. 보안요원이 총을 겨눈 채 노려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송명섭이 흉부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입으로 붉은 피를 흘렸다.
총에 맞은 그가 이윽고 이쪽을 돌아보더니 나무토막처럼 쓰려졌다.
“명섭아!”
뒤따라온 보안요원들이 묵묵한 눈빛으로 강태준을 포위했다.
그때 옆구리를 강타하는 통증.
잭나이프에 옆구리를 깊게 찔린 강태준이 칼을 찌른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찌른 상대는 갑판장인 이용학.
고통과 함께 밀려오는 배신감에 강태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니가 왜?”
“그냥 조용히 뒈지시지 그러셨습니까? 형님. 그럼 이런 꼴 보지 않고 가셨을 텐데.”
“네가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설마 이억수 그놈이…….”
“저도 살길 찾은 거지요. 폐선 정리해서 보험금도 받고, 반란군도 처리하면 일석이조 아니겠습니까? 누군가는 피를 묻힐 사람이 필요한 거죠.”
“너 이 새끼 배신을……!”
“배신은 그쪽이 먼저 했지요. 형님. 듣자 하니 해신 쪽에 스카웃 되셨다면서? 근데 왜 말 안 했습니까? 그럼 나는…… 나는 어쩌라고.”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분노와 욕망이 휘몰아치고 있다.
헛웃음을 삼킨 강태준이 체념하듯 물었다.
“그래서 이억수, 그 인간이 얼마 주기로 했냐?”
“먹고 살만큼은 받았죠. 일 끝나면 건물 하나는 준다아입니꺼.”
“건물 하나라 내 몸값이 그 정도였나? 이억수가 열 받긴 했나 보군.”
“아주 꼴받았지. 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슈. 뭐 알잖소. 이억수 그 양반 계산 하난 확실한 거.”
무력화된 강태준은 곧바로 결박당했다.
잠시 후, 코가 박살 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조리장이 보고했다.
“폭발물 설치했습니다. 배에 구멍을 뚫었으니 곧 가라앉을 겁니다.”
“잘했구먼. 이대로 빨랑 하선하자고. 어차피 오래 못 버티니까.”
이용학이 배 기둥에 꽁꽁 묶은 강태준을 힐끔 돌아보더니 이내 입가를 비틀었다.
보슨 스토어에서 인화 물질을 잔뜩 꺼낸 녀석들이 내용물을 뿌렸다. 잠시 후, 기름을 가득 뿌린 선상 위는 휘발유 냄새가 진동하는 곳으로 변했다. 일을 마친 이용학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항상 배와 선장은 같은 운명이라고 하셨죠? 잘 가십쇼. 저승행 로얄석으로 준비했소이다.”
“이놈…….”
“고맙소 형님. 형님 덕에 내 모히토 가서 몰디브 마 한잔할랍니다.”
강태준을 내려다보던 그가 이선 직전 이죽거리더니 불붙은 라이터를 집어 던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서서히 번지자 구명정이 서서히 멀어져갔다.
불길이 커지는 것을 보면서 망연자실하는 강태준.
흐릿해지는 눈을 치켜뜨며 강태준은 마른기침을 뱉었다.
아까 찔린 복부에서 붉은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선박에서 사용하는 각종 페인트와 희석제 고인화성 솔벤트와 신나가 섞여 인화성 가스로 채워졌고 스파크가 튀었다. 날름거리는 불길에 휩싸인 랑데부 호의 선체는 순식간에 불꽃으로 뒤덮었다. 거뭇한 유독가스가 시야를 가리자, 강태준은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제길…… 이게 끝인가?’
마지막 항해가 황천 항해라니. 절망적인 상황에 강태준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망망대해에 화재라니.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발버둥을 치려 해도 피를 너무 흘려서인지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잠시 후, 갑판에서 시뻘건 화염이 치솟는 것과 함께 연기가 허공을 메우더니,
천지를 뒤엎는 굉음이 쿵 하고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배는 천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