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황제의 서신이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연회를 준비했으니 그대들은 준비를 끝마치는 대로 바로 출발하도록 하거라. 연회의 시작과 끝은 그대들이 도착하는 날에 맞춰서 유동적으로 조정할 것이다.]
“….”
잔치를 열 테니 북부에서 이 서신을 받으면 발에 불이 나도록 달려오라는 황제의 명령.
그것이 서신에 떡하니 적혀 있었다.
“엄청 갑작스러운 내용이네요.”
에탄이 서신에 적혀 있는 내용을 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이런 내용의 서신을 황제가 보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하나. 꼭 축제를 열고 싶어서 안달난 어린이 같구만.”
그때. 데이른 공작이 서신의 내용을 옆에서 확인하고는 픽 웃었다. 오래 전부터 황제를 봐왔던 그이기에, 지금 황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서신을 보냈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거였다.
“오라고 하면 가야지. 황제가 오라고 하는데 그걸 거절할 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
“그건 그렇죠.”
데이른 공작의 말에 에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부르는 걸 무시했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손해를 볼 게 분명했다.
아니. 그 이전에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황제가 원정군을 위해서 지원해준 막대한 물자를 생각하면 말이다.
‘그때 당시에 제국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새삼 느꼈지.’
무지막지한 물자들을 보고 에탄은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물자들이 없었다면 원정이 힘들었을 거야.’
식량은 물론이고 마법사들을 위한 아티팩트까지. 제국에 있는 귀중한 자원이란 자원들은 모두 원정대에 투입됐다.
덕분에 원정대에 무지막지한 인원이 들어와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에탄과 나머지 이들은 마계에 있는 마족들을 모두 섬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연회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회에 대한 걱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긴장됐다.
제국의 황제가 직접 초대하는 연회는 흔치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황제가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지도 가늠이 안 가고. 그 사람도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격이니까.’
에탄조차 가늠이 안가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다고 에탄은 생각했다.
“긴장해라. 녀석이 또 너에게 어떤 말을 할지 모르니까.”
데이른 공작이 그런 에탄을 향해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같이 가는 건데요?”
에탄이 그런 데이른 공작을 향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치. 자신은 아니라는 듯 대하는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
데이른 공작이 에탄의 말에 몸을 멈칫했다. 에탄이 그런 데이른 공작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이 사람은 못 미덥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 *
그렇게 에탄은 황제의 서신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를 데리고 제국으로 향했다.
북부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눈서리 모양이 각인되어있는 마차들이 줄줄이 제국으로 향하는 모습은 상당히 예술적이었다.
“가는 길에 도적 떼가 나오면 재밌겠군.”
데이른 공작이 마부석에 앉아, 그 긴 행렬을 지켜보면서 한마디를 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파엘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 마차에 타고 있는 자들만으로도 어지간한 왕국은 지도에서 지워버리고도 남을 무력이다.
“이런 마차를 습격하는 도적이라면, 그건 도적이 아니라 마왕군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음. 그것도 일리가 있다.”
파엘의 말에 데이른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지금 이 마차를 습격해서 유의미한 피해를 주기 위해서는, 일단 드래곤 보다 마법에 능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그리고 마법을 무력화시킨다고 해도… 얼음 산맥의 힘을 다루는 아린이와 에탄 도련님을 이겨야 합니다.”
“음.”
데이른 공작이 이어지는 발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에탄과 아린이가 가지고 있는 검술의 힘도 이겨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이겨낸다고 해도… 신경질 내는 드래곤 로드가 앉아있지.”
“그렇게까지는 말 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드래곤 로드님이 들으시면 공작님을 반죽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요.”
파엘이 데이른 공작의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거리를 벌렸다.
“파엘. 네 녀석은 내 수하인데 지금 나를 피하는 거냐? 드래곤 로드가 그렇게 무서워서? 어차피 다 늙어 빠진 드래곤이 뭐가 무섭다고….”
“…공작님?”
“맞지 않느냐? 솔직히 그 자식이 나를 이리저리 부려먹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뒤를….”
“뭐?”
“뒤….”
“…….”
데이른 공작이 파엘의 손짓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흐음!”
거기에는 뇽뇽이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면서 데이른 공작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뇽뇽이의 옆에는.
“오호.”
드래곤 로드가 뇽뇽이의 마법으로 공중에 부양하면서 함께 떠있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드래곤 로드가 데이른 공작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면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늙어 빠진 드래곤이라… 하하하! 이거 참 재밌는 말이야. 그래. 내가 좀 나이가 많기는 하지. 드래곤들 중에서도 제일 오래 살아남은 녀석이니까.”
드래곤 로드가 데이른 공작이 했던 말들을 아주 천천히 되씹었다. 그러면서 두 눈을 번뜩했다.
드래곤이 분노했을 때 보이는 눈동자, 그 눈동자가 데이른 공작을 꿰뚫어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커험. 흠.”
데이른 공작이 그걸 깨닫고는 시선을 회피했다.
“…….”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한 마디라도 잘못 했다가는 자신이 잿더미로 변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하거라. 그러라고 있는 입이 아니더냐? 설마 지금 입이 안 벌려진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면 내가 모든 힘을 이용해서 네 녀석의 입을 최대한으로 열어주마.”
“….”
“어째서 침묵하는 거지?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아주 신나게 누군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거 같은데.”
쓰으윽.
드래곤 로드가 말을 끝마치고는, 데이른 공작의 머리 위로 몸을 움직였다. 뇽뇽이의 마나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게 드래곤 로드였다.
“그… 흠.”
데이른 공작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드래곤 로드를 보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벌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벌린 이유는 간단했다.
이 이상 침묵을 유지했다가는 영원히 말을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데이른 공작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지금 여기서 데이른 공작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하는 것뿐이었다.
화르륵!
그때. 드래곤 로드가 양손에 뜨거운 화염구를 만들었다. 보기만 해도 땀이 날 정도로 엄청나게 뜨거운 불덩어리.
“이걸 날릴까 말까 심히 고민이군.”
그런 화염구를 데이른 공작에게 던져버릴지 드래곤 로드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쓰윽.
“어디서 불타는 냄새가 나고 있어서 왔더니… 여기였군요.”
그때. 에탄이 드래곤 로드와 데이른 공작이 있는 마차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런 에탄의 옆에는 아린이가 함께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설마 데이른 공작님이 드래곤 로드님에게 무례를 저질렀나요?”
“흠!”
아린이의 물음에 데이른 공작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단번에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각이 많이 날카로워졌군.’
아린이와 뇽뇽이는 마계 원정을 다녀온 이후로 꽤 많이 성장했다. 거기에는 어린아이의 눈치로는 파악할 수 없는 묘한 기류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작님….”
그리고 그만큼 아린이는 더 무서워졌다. 데이른 공작을 쥐어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데이른 공작이 아린이의 반응에 눈을 감았다. 정말 일부로 들으라고 말한 건 아니었다.
“그런 말 몰라요? 앞에서 하지 못할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아빠가 알려줬어요.”
“…….”
“그런데 데이른 공작님은 책임지지 못할 말을 했고, 드래곤 로드님이 그걸 들어버렸네요.”
데이른 공작이 입을 꾸욱 다물었다. 겨우 열렸던 입이 아린이에 의해서 닫히는 모습이 에탄의 눈에는 상당히 예술적으로 느껴졌다.
“두분이서 진솔한 대화 나누시죠. 저희는 모두 마차에서 자리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타고 가야 하는 마차는 넘치니까요.”
그때. 에탄이 데이른 공작과 드래곤 로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드래곤 로드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그렇게까지?”
반면 데이른 공작은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버렸다. 설마 이 마차 안에 자신과 드래곤 로드, 이렇게만 남길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에탄. 다시 한번 생각을….”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아무래도 나와 그대는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는 거 같군.”
드래곤 로드가 에탄을 설득하려는 데이른 공작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 두 눈을 빛내면서 데이른 공작을 빤히 쳐다보고는.
“한번 대화 좀 해보자고.”
싱긋 웃으면서 뒷말을 이어줬다.
그 순간 데이른 공작은 깨달았다.
자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입이라는걸.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시기였다. 데이른 공작이 후회를 돌이키기에는 드래곤 로드가 가진 분노가 너무 막강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