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제77화. 천사 리더(3)
동서남북 팀의 연습 결과를 직접 본 스태프들의 평가는 좋았다.
그러나 이연이 보기에는 아직 한참 멀었다.
완성도만 놓고 본다면 지금 단계로 절대 무대에 올라선 안 될 정도였다.
물론 이연의 기준이 유독 높은 것도 있지만.
하니엘의 곡에 대해서 이연만큼 정확하게 평가를 내려줄 사람이 없다.
연습생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연이 손으로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성윤아 연습생을 가리켰다.
“1절 싸비 파트에서 정지선 연습생하고 동선 꼬여서 부딪칠 뻔했죠?”
“……네.”
그 순간에는 최솔림이 센터로 앞에 선 채로 안무를 펼치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어느 한 인물만 바라보지 않고 무대 전체를 보면, 최솔림 말고 다른 연습생들이 저지른 자잘한 실수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물론 최솔림 역시 몇 가지 실수를 저지르긴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실수보다 다른 팀원들의 실수가 훨씬 치명적이었다.
“뒤에 가려져서 카메라에 안 보인다고 그냥 대충 하고 넘어갈 생각이라면, 다른 곡으로 바꿔서 연습하셨으면 좋겠어요.”
“…….”
“…….”
“……죄송합니다, 선배님.”
연습생들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불쌍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오냐오냐 달래주기 위해 특별 심사 위원 제의를 받아들인 게 아니었으니까.
서윤철 PD 또한 이연에게 바라고 있던 역할이 바로 이런 거였다.
호랑이 심사 위원.
이미지로 따지면 미랑이 연습생들에게 호통치고 강하게 나갈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정작 미랑이 혜원과 이연에 비해 더 마음이 약한 편이었다.
어제도 그랬다.
연습생들이 사소한 안무 실수 몇 개를 저질러도 미랑은 할 수 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다시 한번 해보자, 이런 식으로 연습생들을 다독여 줬다.
그러나 이연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만약에 ‘연습생이니까 실수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들도 너그럽게 생각해 줄 거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프로그램에서 자진 하차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무대에 오르는 이상, 신인이니 기성이니. 이런 건 단지 단어의 차이일 뿐, 무대를 보는 사람들 입장에선 똑같은 ‘가수’로 여겨질 테니까요.”
“…….”
“기억하세요. 무대에 선다면 누구든 프로입니다. 여러분들이 팬들에게 받고 싶은 건 환호와 박수갈채지, 안쓰러움과 동정심이 아니잖아요. 제 말이 틀렸나요?”
연습생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이연의 말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는 걸 연습생들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준비하죠. 아까도 말했다시피 파트 분배부터 새로 하는 게 좋겠어요.”
하니엘은 7명, 동서남북은 5명이다.
그렇다 보니 파트 재분배는 필수다.
이연의 말대로 한다면, 지금까지 연습했던 걸 전부 초기화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시간도 얼마 없는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연습생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이연은 연습생들에게 ‘반드시 해라’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저는 여러분들의 무대를 평가하는 심사 위원일 뿐이니까 어디까지나 조언만 할 겁니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여러분들의 몫이에요. 물론…….”
이연의 목소리에 살짝 힘이 실렸다.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여러분들이 져야겠죠.”
2라운드 첫 번째 미션부터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게 된 동서남북 팀.
이연은 그녀들이 충분히 상의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서윤철 PD가 이연의 뒤를 따라 안무 연습실을 나왔다.
“고생했어요, 이연 씨.”
“저는 그냥 앉아 있다가 보고 들은 거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걸요. 고생이랄 것도 없었어요.”
“그래도 일부러 시간 내서 연습생들 무대 봐주러 왔으니까요. 그리고 피드백도 굉장히 순화 많이 한 거 같던데요. 저는 거기서 이연 씨가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내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하하!”
명색이 아이돌인데. 그러면 큰일이다.
물론 마음 같아선 더 직설적인 표현도 사용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뜻이 연습생들에게 잘 전달되기만 하면 오케이였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하기로 했다.
무조건 말을 세게 한다고 능사는 아니니까 말이다.
이연은 조용해진 안무 연습실을 가만히 응시했다.
“파트 분배부터 다시 할지 어쩔지 잘 모르겠네요.”
남은 시간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이연의 제안을 거절하고 기존에 하던 걸 그대로 고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무대에 정답이란 없으니까.
서윤철 PD가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면서 자신의 추측을 슬쩍 흘렸다.
“아마 이연 씨 말대로 할 겁니다.”
“그럴까요?”
“네. 최솔림 양 성격이라면, 무대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조건 따를 테니까요.”
지금까지 서윤철 PD가 봐온 최솔림이란 여자의 성향은 그랬다.
추가로 이연이 아직 최솔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정보도 같이 들려줬다.
“SSS 시즌 2 촬영 들어가기에 앞서서 연습생들에게 개별로 설문을 받은 게 있었거든요. 공통 질문 중에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가 있다면 적어주세요’라는 게 있었는데, 최솔림 양이 거기에 누구 이름을 적었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이연은 누군지 알 것 같은 느낌이 왔지만, 구태여 자신의 입으로 말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이연 씨를 가장 좋아하는 선배로 적어서 제출했더라고요.”
역시 이연의 예상이 적중했다.
“그래서 최솔림 양이라면, 이연 씨가 이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들은 웬만하면 다 수정하려고 할 겁니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후배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PD님도 그러셨나요?”
“물론이죠.”
이연과 서 PD가 동시에 웃음소리를 흘렸다.
* * *
중간점검이 끝난 다음 날.
오전 스케줄을 끝낸 이연은 하니엘 멤버들과 같이 숙소로 돌아가 쉬기 전에 먼저 회사를 방문했다.
다음 주에 있을 스케줄을 전체적으로 한번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들의 복귀를 미리 기다리고 있던 홍류현 실장이 빠르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주말에 음방 녹화 2곳 예약되어 있고. 그 전날 오후에는 야외 촬영 있으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도록 해. 그날 날씨 상황 봐서 실내 녹화로 바꿀 수도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알아두고.”
“네, 알겠습니다.”
멤버들은 스마트폰이나 개인 태블릿 PC를 이용해서 홍류현 실장이 알려주는 일정을 따로 기록했다.
스케줄에 관해선 박도수 매니저가 일일이 다 챙겨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방송 준비까지 챙겨주진 못한다.
모니터링이라든지. 출연할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 숙지 등 그녀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분야들이 있다.
그래서 이 시간만큼은 다들 회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이연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회의실 바깥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홍류현 실장이 이연의 반응을 눈치채고 왜 그러냐며 물었다.
“아까부터 밖에 누가 계속 서 있는 거 같아서요.”
“응?”
홍류현 실장이 박도수 매니저에게 한번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박도수 매니저가 문을 열자, 놀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연의 귀에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이연이 박도수 매니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솔림 씨?”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
“그…….”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한테 볼일 있어서 온 거예요?”
“…….”
최솔림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그러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중요한 회의 중이신 거 같아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기야. 연습생 입장에서 보면 한창 회의가 진행 중인데 멋대로 문을 열고 이연을 불러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회의를 눈앞에 두고서 마냥 기다리고 있기만 했다.
이연이 홍류현 실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 솔림 씨하고 이야기 좀 하고 와도 될까요?”
“어. 괜찮아. 안 그래도 좀 쉬었다가 할까 했었는데. 마침 잘됐네.”
홍류현 실장은 타이밍이 좋았다는 식으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최솔림이 자기 때문에 괜히 회의를 망친 게 아닐까 하는 자책감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배려를 한 셈이었다.
최솔림을 데리고 따로 장소를 이동한 이연은 그녀에게 자신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SSS 제작진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여성만의 자리가 마련되는 건 좀처럼 없는 기회다.
최솔림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연에게 미리 챙겨 온 종이 다발을 건네면서 말했다.
“선배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파트 재분배, 다시 해봤거든요.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 싶어서요.”
이연의 조언에 따라 파트를 다시 분배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놀라운데.
이연을 직접 찾아와서 검토를 받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다.
제 발로 찾아온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이연 역시 대충 보여주기식이 아닌 진지함을 담아 재분배된 파트를 평가하기로 했다.
“B파트는 메인보컬보단 서브보컬 쪽으로 빠지는 게 더 좋을 거예요. 메인보컬이 맡는 분량이 너무 많아지면, 사람들에게 다양한 음색을 들려줄 수 없게 되니까요. 물론 잘 부르는 사람이 계속 부르면 안정적이긴 할 텐데. 그만큼 노래가 단조롭게 느껴지는 단점도 생기거든요.”
동서남북 팀은 멤버 수가 다섯 명으로 적은 편이다.
그래서 다섯 명이 파트를 순차적으로 계속 돌리면서 노래를 부르게끔 해야 듣는 사람들에게 좀 더 풍성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최솔림은 이연의 조언을 곧장 받아 적었다.
“명심할게요, 선배님.”
그렇게 파트 재분배에 대한 짧은 회의를 모두 마친 두 여성.
최솔림이 이연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많이 바쁘실 텐데, 제 부탁까지 들어주셔서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그만큼 좋은 무대를 보여주시면 돼요. 가수는 무대로 답하는 게 제일이거든요.”
이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최솔림에게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
지금도 그러했다.
다시 한번 이연에게 감사를 표한 뒤에 최솔림은 먼저 걸음을 옮겨 휴게실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전에 이연이 또 하나의 울림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리더가 너무 착하기만 하면 안 돼요.”
“네?”
“1라운드 미션에서 심사 위원분들한테 무대 평가받을 때, 일부러 실수한 거죠? 팀원이 안무 틀린 거 최대한 감추려고요.”
“…….”
“왜 그러셨나요?”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최솔림의 입이 마침내 천천히 열렸다.
“저는 이미 상위권에 있으니까…… 실수를 저질러도 투표에 큰 영향은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대신에 미영이는 방송 비중도 많이 낮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미영이라는 연습생, 1라운드에서 떨어졌죠?”
“…….”
“팀원들을 챙기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본인까지 자처해서 실수를 남발하면 결국 무대 전체를 망치는 꼴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본인도, 팀원들도. 다 같이 죽는 결과밖에 안 나와요.”
이연이 결국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천사도 좋지만, 때로는 악마보다 더 독해져야 할 때가 있어요. 리더라면 특히 더. 그걸 명심하세요.”
최솔림뿐만 아니라 이연 스스로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