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제71화. EXIT(2)
앞으로 가면 갈수록 연기는 점점 짙게 차올랐다.
처음에는 발목 높이까지만 깔려 있던 연기가 조금씩 조금씩 올라오더니, 이제는 아예 안개처럼 스튜디오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로 안.
양 옆에는 벽이, 그리고 앞과 뒤에는 뭐가 있을지 모르는 공간이 있으니까 공포심은 더욱 극대화되었다.
채미가 이연의 왼쪽 팔을 끌어안고서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여기, 머리만 쓰면 되는 프로그램 아니었어?”
“이런 콘셉트 같은 게 종종 나오더라.”
시즌 1 때에는 좀비들도 나왔었다.
아무리 프로그램이 재미있다고 한들. 매번 같은 분위기, 같은 콘셉트, 같은 패턴만 나오면 후반으로 갈수록 시청자들의 흥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방송을 업으로 삼고 있는 홍지홍 PD와 제작진이 이걸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지금처럼 공포면 공포, 스릴러면 스릴러, 이런 식으로 콘셉트를 정해서 매 회마다 변화를 주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끊임없는 노력이 시즌 3라는 결과물로 이어지게 된 거였다.
“선배님.”
이연이 정우재를 찾았다.
“어, 연아. 왜?”
“제 거 손전등은 좀 작은 거여서요. 큰 걸로 대신 바꿔주실 수 있나요?”
이연이 앞장서서 걷고 있는 중이었기에 큰 손전등이 그녀에게 가는 게 맞았다.
정우재는 본인이 들고 있던 손전등을 그녀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정말로 괜찮겠어? 내가 앞장설까?”
“아니요. 괜찮아요, 선배님. 그리고 선배님은 무서운 거 싫어하시잖아요.”
“아니, 그거야 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이연 앞에서 자신의 약한 면모가 여지없이 드러나니까 창피하기도 하고. 굉장히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연은 정우재를 향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사람마다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약점 같은 게 있으니까요. 저도 그렇고요.”
“너도 싫어하는 게 있어?”
“네. 말씀은 안 드리겠지만요.”
이연의 성격상, 자신의 약점을 다른 사람들한테 먼저 이야기하고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정우재는 그녀의 약점이 뭔지 궁금했다.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것보다도 더.
* * *
앞서 걸어가던 이연의 앞에 막다른 길이 가로막았다.
“여기, 막혔네요.”
“진짜네?”
“이상하다. 여기서 막히면 안 되는데.”
출연자의 말대로, 이곳이 막다른 길이면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갈림길이 나왔던 것도 아니고. 한 길만 쭉 따라서 왔는데, 길이 막혀 있다면 미로 세트장 설계 오류라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홍지홍 PD와 제작진의 장인정신을 떠올리면, 이런 어설픈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을 터.
혜원이 손전등 불빛을 이곳저곳 비추기 시작했다.
“벽에 숫자 입력하는 장치가 있네요.”
“여기에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이 벽이 열리는 건가?”
“아마도요.”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힌트라고 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분명 뭔가 힌트가 될 만한 게 있을 텐데.
그러나 보이는 거라곤 미로 벽뿐이었다.
손전등을 비추던 이연이 눈이 일순간 가늘어졌다.
“채미야. 잠깐만 옆으로 나와봐.”
“응? 왜? 뭔데? 설마 나 있는 쪽에 뭐 있어?”
채미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연은 대답 대신 채미의 어깨 위치의 벽에 계속 불빛을 비췄다.
벽에 작은 돌기 같은 것들이 솟아 있었다.
이연이 손끝으로 벽을 더듬기 시작하자 혜원이 물었다.
“스위치라도 찾았어?”
“스위치는 아니고, 힌트는 찾았어요.”
힌트라는 말에 출연진 모두의 이목이 이연에게 쏠렸다.
무인 카메라 역시 이연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연이 방금 전 자신이 더듬은 돌기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보시면 이 부분만 미묘하게 튀어나와 있잖아요.”
“엇, 그러네!”
대충 훑어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확실히 티가 난다.
“만져보시면, 점자처럼 숫자가 표기되어 있어요. 4, 5, 1, 0. 한번 눌러보세요.”
“4510, 4510…….”
이연의 지시를 받은 정우재가 손을 뻗어 숫자를 입력했다.
그러자, 벽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와, 대박!”
“이연이가 해냈네, 해냈어!”
EXIT란 프로그램은 누가, 얼마나 많은 단서를 찾아 활약상을 펼치느냐에 따라 비중이 달라진다.
숨겨져 있던 숫자 힌트를 찾아냄으로 인해 첫 난관부터 대활약을 펼친 이연.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박도수 매니저한테 했던 말을 출연진에게도 고스란히 들려줬다.
“제가 2시간 안에 탈출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오늘은 조기퇴근 각이다.
* * *
이연이 앞서 말했던 대로, 그녀의 손을 거칠 때마다 제작진이 몇 날 며칠 머리를 싸매며 고민했던 난관들이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서호명이 이연에게 혹시 스태프들로부터 미리 힌트 받은 거 아니냐는 의혹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연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이연 못지않게 혜원 역시 자신의 비중을 확실히 챙겨가고 있었다.
“여기, 액자 뒤에 보관함 있어요.”
“잘했어, 혜원아!”
“혜원이가 엄청 꼼꼼하네. 저 액자, 아까 나도 살펴봤었는데. 뒤쪽까지 확인해야 하나는 생각은 전혀 못 했어.”
두 여성의 활약 덕분에 출연진은 파죽지세로 미로를 통과했다.
순식간에 3분의 2 지점을 돌파했다.
촬영이 시작된 지는 이제 1시간 20분밖에 안 지난 상황.
서호명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쯤 제작진이 엄청 초조해하고 있겠지?”
“설마 우리가 이렇게 잘할 줄 알았겠어요?”
“맞아.”
정우재가 고정 출연자들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형들 덕분이 아니라 순전히 혜원이하고 연이 덕분이잖아요. 왜 형들이 잘난 척을 하시는 거예요.”
“아니, 뭐…….”
“우, 우리는 다 같은 동료잖아. 너의 활약이 곧 나의 활약이고. 나의 활약은 나의 활약이고. Understand?”
정우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녹화 시작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공포스러운 세트장 분위기 때문에 한 걸음도 못 움직이던 고정 출연자들.
반면, 게스트로 자격으로 온 혜원과 이연은 그런 거 일체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처럼 퍼즐 풀이에만 집중했다.
이연이 든 손전등 불빛이 커다란 문 위쪽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본 미로 벽과는 완전히 다른 디자인이었다.
‘여기서부터 뭔가가 있을 거 같은데.’
이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괴성이 들리더니,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귀신 분장을 한 봉제 인형들이었다.
“으아아아악!”
“어, 엄마야!”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게스트의 활약을 등에 업고 자신만만해 하던 고정 출연자들은 다시 겁쟁이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채미도 비명과 함께 이연과 좀 더 바짝 밀착했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사람은 이연, 그리고 혜원. 단 둘뿐이었다.
오히려 두 사람은 방금 하늘에서 쏟아진 봉제 인형들을 보면서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뒤통수에 숫자 적혀 있네요.”
이연도 혜원과 비슷한 타이밍에 숫자를 발견했다.
“딱 여섯 개니까, 이거 조합해서 숫자 입력하면 문 열릴 거예요.”
남자 출연자들은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들을 두 여성 아이돌은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을 보였다.
서호명은 이연과 혜원, 이 둘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요즘 애들, 진짜 독하네.”
귀신보다 이연, 혜원의 무반응이 더 무서웠다.
* * *
미로의 마지막 관문 앞에 서게 된 출연자들.
최후의 퍼즐답게, 여러 사람들의 협력이 요구되는 그런 난관이 펼쳐졌다.
“한 명은 물속에 들어가서 비밀번호 확인해야 하고. 다른 한 명은 저기 저 천장에 매달려서 해야 하는데.”
수영을 잘하고 오랫동안 잠수할 자신이 있는 사람과, 고소공포증이 없는 사람이 필요하다.
“물속에 있는 건 제가 확인할게요.”
이번에도 이연이 먼저 나섰다.
그러자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혜원이 손을 들었다.
“그럼 위에 건 제가 맡겠습니다.”
오늘 녹화의 처음과 끝을 이연과 혜원, 두 사람에게 맡기기로 했다.
잠수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이연은 미리 준비되어 있는 방수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풍덩!
산소통도 없이, 그대로 물속으로 잠수했다.
이연의 긴 머리카락이 물속에 흐트러졌다.
다른 출연자들은 투명한 수조 벽을 통해서 물 안쪽의 상황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물속에 들어가 있는 이연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인어공주 보는 거 같네.”
서호명이 솔직한 심정을 담아 말했다.
안 그래도 정우재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인지, 고개를 격하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흐트러짐 없이 바닥에 깔려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우산 둘에 눈사람 모양 하나.’
기호를 확인한 이연은 다시 수면 밖으로 나왔다.
“이연아! 뭐라고 적혀 있었어?”
“숫자 뭐야?”
출연자들이 숫자를 묻자, 이연은 손을 휘저으면서 그런 게 아니라는 뜻을 보였다.
“숫자가 아니라 기호예요. 우산 두 개하고 눈사람 하나.”
“우산? 눈사람? 그게 뭐야?”
“뭘 뜻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건 여섯 개의 숫자였다.
난데없이 숫자가 아닌 사물 기호가 나타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연은 얼추 눈치챘다는 듯이 담담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숫자를 말했다.
“448이에요.”
“448? 어떻게 알아?”
“우산 기호가 똑바로 세워진 삼각형 형태로 있었거든요. 밑에 손잡이까지 포함하면 숫자 4를 연상하게끔 생겼어요. 눈사람은 동그라미 두 개가 위, 아래로 붙어 있으니까 숫자 8이고요.”
간단한 추리였다.
때마침 천장 위까지 올라갔던 혜원이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207이에요.”
“448207…… 오케이. 입력해 볼게.”
여섯 개의 숫자를 입력하자, 굳게 닫혀 있던 무거운 철문이 열렸다.
동시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들이 탈출에 성공한 출연자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서호명과 출연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탈출, 성공!”
서호명의 선창에 따라 다른 출연자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이연과 혜원의 맹활약 덕분에 오늘의 녹화도 무사히 탈출 성공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홍지홍 PD는 이연, 혜원을 보면서 쓴 미소를 지었다.
“두 분한테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방탈출 프로 그 자체던데요?”
항복 선언을 하는 홍 PD를 보면서 이연과 혜원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한편.
정우재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시 23분.
촬영이 2시 반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이연의 말대로 정말 2시간 안에 모든 촬영이 다 종료된 셈이었다.
출연진, 제작진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면서 고생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건네는 이연.
정우재는 손목시계와 이연을 번갈아 보면서 감탄했다.
“하여간 진짜…… 대단한 여자네.”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여자라는 걸 느끼긴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느낌은 더 짙어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