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244화 (244/299)

244화

제68화. 새로운 도전(2)

이연 입장에선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내놓은 대답은.

“네. 그렇게 할게요.”

Yes였다.

홍류현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 먼저 가서 제작진 쪽에 대본 보내 달라고 연락해 두겠습니다.”

“언제 보내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바로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달라고 해. 연이 회사 왔을 때 대본까지 아예 쥐여주게.”

“네, 대표님.”

홍 실장이 자리를 비움으로 인해 회의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오채일 대표가 이연에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조언을 건넸다.

“대본 보고 나서 ‘아, 이건 힘들겠다’ 싶은 생각이 들면, 솔직하게 못하겠다고 말해도 돼. 너한테 이거 반드시 하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이연의 본업은 가수다. 물론 연기 쪽에도 활동 영역을 넓히면 더 좋긴 하겠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가 둘 다 놓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특히 연예계에는 더더욱.

그래서 오채일 대표는 이연에게 마지막까지 심사숙고해서 결정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회의를 마치고, 이연은 회사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휴게실을 찾았다.

그사이, 멤버끼리 모여 있는 단톡방에 이연의 안부를 묻는 메시지들이 가득 올라와 있다.

멤버들은 이연이 혹시 뭐 잘못해서 회사로 불려간 거 아니냐면서 걱정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멤버들한테도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직 하겠다고 확실하게 정한 건 아니었기에 일부러 말을 아꼈다.

오늘 대본을 보고. 할 만하다 싶으면 그때 모든 걸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박도수 매니저가 두툼한 대본을 들고 이연이 있는 곳을 찾았다.

“자, 여기.”

“양이 꽤 되네요?”

“에피소드 1편 분량이니까.”

제목 미정의 드라마 대본. 옴니버스식으로 진행되는 작중에서 이연은 8회 때 등장할 핵심 인물, ‘강단비’를 연기할 예정이었다.

캐릭터 설정부터 확인했다.

“동아리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 중인 여대생…… 윤성준 PD님이 왜 저를 강단비 역할로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알 거 같네요.”

박도수 매니저도 이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 보면 알겠지만, 작중에서도 노래 부르는 신이 제법 나와.”

일반 배우에게 맡기기에는 어려운 역할일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노래 실력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밴드 활동을 하다가 같은 대학교 선배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연은 문득 이 선배 역할을 맡을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선배 캐릭터는 누가 맡기로 한 거예요? 혹시 정해졌나요?”

“어.”

박도수 매니저가 맨 앞장을 가리켰다.

“거기 등장인물 옆 칸에 이름 쓰여 있을 거야.”

이연과 사랑을 나눌 배우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이은솔(진성우 역)]

그나마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 선배하고 자주 엮이네.’

고민이 깊어져 갔다.

* * *

대본을 정독해본 결과.

이연은 박도수 매니저에게 출연하겠다는 대답을 들려주기로 했다.

일단 그 유명한 윤성준 PD답게 시놉시스가 상당히 좋았다.

남녀 간의 사랑,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선을 대사에 절묘하게 담아내고 연출한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 무대 섰을 때가 떠오르네.’

이연이 루웰 시절 당시에 뮤지컬 식으로 연기했던 작품이 하나 있었다.

‘기사 웬리’라는 작품으로, 왕의 딸을 사랑했던 서민 출신의 기사 웬리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 있었다.

그것을 뮤지컬 방식으로 각색해서 사람들 앞에 선보였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당시 웬리 역을 맡았던 루웰이 보여준 연기는 대륙 전체를 휩쓸고도 남을 정도로 엄청난 호평을 이끌었다.

윤성준 PD의 대본은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만들었다.

부잣집 후배 강단비를 사랑하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대학생 진성우.

결국은 둘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결말까지. 기사 웬리의 엔딩과 똑같았다.

혹시 윤성준 PD가 기사 웬리를 집필한 원작 소설가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흡사했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

이연이 이례적일 뿐. 이런 케이스가 둘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윤성준 PD의 작품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뒤, 이연은 마음먹었던 대로 멤버들한테 이 사실을 알렸다.

연기에 도전하겠다는 그녀의 선언에 멤버들은 기뻐하면서 한편으론 걱정하기도 했다.

“연이 언니, SSS 때 표정 연기 안 좋다고 쌤들한테 극딜 받은 적 있었잖아.”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니까. 그리고 이런 경험 한번 해보면, 나중에 무대에서 표정 연기 할 때 더 자연스러워지겠지.”

실전 경험만큼 뛰어난 스승은 없다.

그래서 이연은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언제든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이번 드라마 출연도 이 도전의 일환이다.

우미가 추가로 궁금한 걸 물었다.

“상대 배우는?”

“은솔 선배님.”

“뭐? 진짜?”

이은솔의 이름이 나오자, 비아와 리샤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깃들기 시작했다.

비아가 리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속삭였다.

“거봐, 언니. 내가 뭐라고 했어. 연이 언니하고 은솔 선배님, 분위기 심상치 않다니까.”

“둘이 설마……?”

이연이 두 사람을 향해 눈을 흘기면서 경고했다.

“이상한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이런 식으로 오해를 받을까 봐 상대 배역은 숨기려고 했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방송으로 나가면 누군지 다 알게 될 테니까. 사실상 숨기는 게 큰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 이연은 그냥 본인 입으로 직접 밝히는 것을 택했지만.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둘이 키스하는 장면도 있어? 응?”

“없어. 쓸데없는 기대하지 마.”

만약에 있었다면, 이연이 먼저 출연하고 싶다고 이야기도 안 했을 것이다.

비아가 ‘칫’ 하고 혀를 차면서 아쉬움을 드러냈다.

한숨을 푹 내쉰 이연은 비아에게 작게 꿀밤을 먹이면서 말했다.

“내일 아침에 스케줄 있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잠이나 자. 또 늦잠 자지 말고.”

“알았어, 알았다고.”

방송 준비하랴, 막내 멤버들 챙기랴.

하니엘의 리더는 오늘도 바쁘다.

* * *

데뷔 앨범 당시, 하니엘 그룹으로 생애 첫 예능 데뷔를 가졌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이돌 쇼, 줄여서 아이쇼.

코미디언 김운혁과 원스텝 멤버인 종현, 그리고 솔로 가수인 유미가 오랜만에 스튜디오에서 하니엘 멤버들을 반겼다.

“걸파이트 시즌 2, 우승팀이죠! 하니엘입니다! 큰 박수로 환영해주세요!”

여기저기서 팡파레가 울려 퍼졌다.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카메라 앞에 선 멤버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의 천사, 하니엘입니다!”

그녀들이 나왔으니. 걸파이트 시즌 2에 관한 이야기를 안 꺼낼 수가 없었다.

“쟁쟁한 선배님들을 제치시고 우승을 차지하셨잖아요. 소감이 어떤가요?”

이번에는 이연 대신 우미가 소감을 읊었다.

“당시에는 저희가 우승할 줄 몰라 가지고…… 우승팀이 발표되었을 때 머릿속이 막 새하얗게 되더라고요. 애들은 막 울고. 연이 덕분에 어찌어찌 마무리 지을 수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연 씨 혼자서만 침착하시더라고요.”

“네. 연이는 어느 때든 늘 침착해요. 가끔 보면 저보다 더 언니 같다니까요.”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대신에 언니가 아니라 오빠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연은 지적 대신 방송용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광고 제의도 엄청 들어오신다면서요?”

“네! 오늘도 오전에 하나 찍고 왔어요.”

“오, 진짜요?”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MC들은 일부러 크게 놀라는 액션을 취했다.

방송이니까. 당연한 행동이었다.

유미가 후배들을 보면서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 저희 프로그램에 나오셨을 때는 다들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들 같아 보였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보니까 독립했던 내 자식들을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에요.”

하니엘 멤버들이 유미를 향해서 작은 애교를 선보였다.

그 모습에 유미의 표정은 한층 더 밝아졌다.

“주변에서 축하도 엄청 많이 해줬죠?”

“네. 길거리 다닐 때도 그렇고요. 요즘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SSS에서 우승했을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 주니까.

그리고 유명 프로그램에서도 계속 그녀들을 찾고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하니엘의 주가는 나날이 상승 중이었다.

김운혁이 멤버들을 보면서 장난기 가득한 멘트를 건넸다.

“우승까지 하셨으니까. 오늘은 첫 출연했을 때보다 더 난이도 높은 미션들로만 내줘야겠네요.”

“에이, 선배님! 쉬운 걸로 해주세요!”

“맞아요, 저번에도 어려운 것투성이였잖아요.”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네?”

하니엘 멤버들의 애교 섞인 부탁에 김운혁은 난색을 드러냈다.

“이거 참……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쉬운 걸로 갑시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어려운 일들은 걸파이트 파이널 미션 때 충분히 겪었으니까.

당분간은 쉬엄쉬엄 가도 괜찮다.

* * *

오늘은 걸파이트 시즌 2에 참가했던 팀 리더들이 모여서 후기 방송을 따로 녹화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걸파이트 녹화 현장을 찾은 미랑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와…… 느낌 너무 이상해! 연아, 이거 봐봐.”

미랑이 민소매 아래로 드러난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

얇은 팔에 닭살이 돋아 있었다.

“추우세요, 선배님?”

“추워서가 아니라. 간만에 여기 와서 그런가 봐.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네.”

차라리 어느 한 감정만 딱 들면 편할 텐데.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들이 몰려오다 보니까 혼란스러웠다.

다른 그룹 리더들도 미랑과 비슷했다.

반대로 혜원은 미랑이 아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연 쪽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못 본 사이에 군데군데 많이도 바뀌었다면서 주변을 둘러보던 혜원이 이연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연아. 여기 와서 앉아.”

순간 미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배님. 언제부터 연이한테 말 놓게 되셨나요?”

“결승 무대 끝나고부터?”

“……그래요? 죄송한데. 연이는 제 옆에 앉기로 했거든요.”

“정말이야, 연아?”

혜원과 미랑.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파밧! 하고 튀기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신경전에 휘말린 이연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혜원이든 미랑이든. 둘 중 한 명을 택해봤자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3의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오늘은 채미하고 같이 앉기로 해서요. 죄송합니다.”

채미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우리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나눴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그전에 이연이 나서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아까 그렇게 말했잖아. 맞지?”

“…….”

무언의 압박에 채미는 강제적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여야만 했다.

이연이 이렇게 무서워 보인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