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제63화. 광고 여신(2)
이연을 위한 의상이 워낙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던 터라 일정 시간별로 계속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이연이 최근 겪었던 모든 일정 중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의상을 갈아입은 하루로 기억될 것 같았다.
마지막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때.
여태껏 진행했던 것과 전혀 다른 부류의 촬영이 펼쳐졌다.
“저희 채널에 올라갈 인터뷰 영상 촬영할 거니까 가운데에 와서 앉아주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사전에 협의가 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연은 스태프의 지시에 따라 자리를 이동했다.
박도수 매니저가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제작진한테서 받은 사전 질문지를 다시 이연에게 가져다줬다.
질문에 대한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평소에 루띠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로 입은 옷 스타일은 무엇인지.
의류 업체다 보니 이쪽에 치중된 질문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뻔한 질문들이지만, 이연은 오히려 이런 것들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전 프로그램들은 걸파이트에 관한 질문만 계속 했었는데.
루띠앙 영상 촬영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물론 걸파이트에 대한 내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딱 두 개. 여기에 관련된 질문이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연은 이 두 가지 질문 중 하나를 직접 본인의 목소리를 통해 언급했다.
“걸파이트 무대의상 콘셉트는 주로 누가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적혀 있는데요. 이때는 그때그때 다릅니다. 제가 떠올릴 때도 있고, 막내 멤버들이 떠올리는 경우도 있고. 2라운드 1차 미션 때에는 여솜이하고 리샤가 생각한 것들을 위주로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의상팀에 넘겼던 걸로 기억해요.”
아무래도 의류 브랜드를 통한 인터뷰 촬영이니까.
이런 식으로 걸파이트 내에서와 자신들 간의 접점을 만들어서 질문을 유도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걸파이트에 관한 이야기는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해할 만한 내용들이니까.
이런 식의 질문이 하나 더 있었다.
“의상을 제작해 주는 업체 선정 기준은…… 글쎄요. 이건 제가 의상팀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좋은 기회가 생긴다면 루띠앙과의 콜라보도 같이 진행하고 싶네요.”
꼭 가수들과 협업하라는 법은 없다.
이렇게 의류 브랜드와도 콜라보를 이어갈 수 있다.
걸파이트뿐만 아니라 하니엘이 서는 모든 무대에서도 이런 식의 협업은 언제든 가능하다.
게다가 루띠앙이라면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명품 브랜드고.
하니엘이 이 협업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모든 촬영을 끝낸 이연은 다시 원래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기나긴 하루를 마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박도수 매니저와 함께 현장을 벗어나기 전에 이연은 오늘 하루 자신과 같이 고생한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촬영감독과 루띠앙 관계자들이 직접 나서서 이연을 배웅해 줬다.
“걸파이트, 꼭 우승하세요!”
“저희도 열심히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어딜 가든 요즘은 늘 응원하겠다는 말을 듣는 중이다.
이제 파이널 라운드만 남은 상황이라서 그런지 유독 더 이런 말을 자주 접하게 되는 거 같았다.
박도수 매니저가 차에 오르면서 이연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엄청 관심 많이 보내는 거 같은데. 부담스럽진 않아?”
“연예인이니까 이런 관심 정도는 감당해야죠.”
그리고 이연은 이런 거에 딱히 크게 동요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들의 시선에 큰 부담을 느낀다면, 가수는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이연의 모습에 박도수 매니저는 크게 안심했다.
“네가 흔들리면 팀 전체가 흔들리니까.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너만큼은 멘탈 꽉 붙잡아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박도수 매니저가 멤버들을 챙긴다, 챙긴다 해도. 같은 멤버가 중심을 잡아주는 것보다는 효과가 덜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하니엘은 이연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큰 상황이다.
만약 이연이 무너진다면.
팀 전체가 무너진다.
이연은 이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을 꺼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 ‘천재지변’이라는 게 무서워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박도수 매니저도 머릿속이 많이 복잡할 것이다.
걸파이트 시즌 2는 하니엘에게 있어서 단숨에 4세대 탑 티어 걸 그룹으로 올라설 수 있는 계단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기에 회사 차원에서도 걸파이트 우승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다른 회사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야말로 걸 그룹 간의 진검승부.
이 싸움에서 누가 승리할 수 있을지.
이연조차 쉽사리 예상할 수 없었다.
* * *
이연의 이름을 딴 루띠앙 리미티드 에디션을 예약할 수 있는 특별 페이지가 열렸다.
그러나 열린 지 1분도 안 돼서 홈페이지가 다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였다.
하나하나가 다 고가의 명품들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릴 줄은 루띠앙 측도 예상을 못 했다.
온라인 예약도 이런데.
오프라인 현장 판매 당일에는 어떨지. 벌써부터 예상이 가기 시작했다.
예약 페이지가 다운되었다는 소식이 기사를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퍼지자, 이를 접한 비아가 옆에 앉아 있는 이연을 바라보면서 부럽다는 어투로 말했다.
“언니, 좋겠네.”
“뭐가.”
“언니 거, 벌써 다 완판되었다잖아. 난 이거 비싸서 물건 많이 남을 줄 알았는데.”
우려와는 달리, 없어서 못 구할 정도였다.
벌써부터 프리미엄이 형성되려는 조짐도 보였다.
덕분에 루띠앙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연은 완판 소식보다 다른 쪽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걸파이트 시즌 2, 파이널 라운드에 관한 일정이었다.
“내일부터 다시 고생길 열릴 예정이니까 일찍 자둬.”
비아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지만, 그래도 이연의 말이 옳다는 걸 알기에 얌전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이연은 내일 방송 일정에 대해 다시금 머릿속으로 정리에 나섰다.
‘오후 2시에 녹화 시작하고. 이때 1차 미션 공개할 거라고 했지.’
파이널 라운드 역시 1, 2라운드와 마찬가지로 1차, 2차, 그리고 마지막 3차 팀 미션으로 진행된다.
이미 경연 프로그램만 두 번째 참가하는 이연이었으나.
‘이번 건 뭐가 나올지 예상도 안 되네.’
SSS와 비교해서 걸파이트 시즌 2는 어떤 미션이 나올지. 예상이라는 걸 할 수가 없었다.
정점을 찍었던 것은 리더 미션, 그리고 파트 미션이었다.
설마 팀을 뒤섞어서 미션을 수행할 줄은 몰랐다.
하니엘이 2위에 그치게 되었지만, 그나마 얻어가는 게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많이 아쉬울 뻔했다.
‘파이널 라운드에서는 리더, 파트 미션 같은 게 안 나오겠지.’
이미 2라운드에 많이 등장했었으니까.
이제부터는 각 팀 간의 순수 기량 싸움이다.
가장 견제되는 건 역시 아이비제이 트윙클이다.
제일 적은 인원수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비제이 트윙클은 늘 이연의 앞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역할을 해왔다.
MAYO도 있지만, 아이비제이 트윙클이 보여주는 포스에 비하면 약간 부족한 느낌이었다.
파트 미션에서 혜원의 한마디에 이리저리 휘둘렸던 경험을 생각하면 이연은 아직도 치가 떨렸다.
파이널 라운드에서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는 1차 팀 미션 내용이 중요하다.
오랫동안 머리를 굴리던 이연이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이나 자러 가자.”
미리 생각해 본다고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거 같았다.
그럴 바에야. 비아에게 말했던 것처럼 미리 잠이라도 자두는 편이 이득일지도 모른다.
* * *
걸파이트 시즌 2, 파이널 미션의 첫 녹화를 앞두고 각 팀의 대기실에는 알 수 없는 긴장이 흘렀다.
하니엘 멤버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도 다르지 않았다.
여솜이 두 손으로 자신의 심장 부근을 지그시 누르면서 혼잣말을 흘렸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터질 거 같아.”
근처에 있던 리샤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대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오늘은 그냥 다 같이 모여서 미션 내용만 확인하고 그럴 거라며.”
녹화가 끝난 이후부터는 각 팀별로 시간을 활용해서 무대를 준비하면 된다.
그럼에도 여솜은 쉽게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우미도 여솜과 같은 심정이었다.
“이제부터 파이널 라운드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더 긴장되잖아.”
사람들의 관심도 예상보다 훨씬 높은 상황이었다.
프로그램에 나와서 가볍게 흘린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대한민국 전체에 많은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연이 나서서 긴장하는 멤버들을 다독여 줬다.
“벌써부터 너무 긴장하진 마. 긴장해야 할 순간은 아직 훨씬 많이 남았으니까.”
위로가 되면서도 안 되는 것 같은 애매한 말이었다.
곧 촬영이 시작될 거라는 스태프의 말에 하니엘 멤버들은 스튜디오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입장은 7위를 차지한 팀부터 역순으로 올라가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니엘은 끝에서 두 번째.
무대 뒤에서 다른 팀이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간접적으로 접했다.
하니엘의 바로 앞 차례를 맡은 MAYO의 등장이 끝났다.
스태프가 출발해도 좋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거울로 이루어진 기다란 복도를 따라 걷는 멤버들.
시우가 복도를 이리저리 살피면서 물었다.
“원래 이런 게 있었나요?”
“없었지.”
걸파이트 시즌 2가 초미의 관심 대상 프로그램으로 떠오르면서 외부 자본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회차를 거듭할수록 스튜디오는 점점 더 화려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미러로 꾸며진 복도 역시 이것의 일환이었다.
거울벽 앞에 선 멤버들이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점검하듯 옷매무새를 살폈다.
“연이 언니.”
유키가 손을 뻗어서 이연의 왼쪽 어깨에 달려 있는 작은 리본을 손수 고쳐줬다.
“고마워.”
“천만에요.”
유키는 알고 있었다.
이연과 자주 엮여야 자신도 그만큼 카메라에 얼굴을 많이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일부러 이연을 도와주는 척했다.
이연도 당연히 유키의 이런 속내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고 도와주겠다는 동생의 손길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
‘하여간 여우야, 여우.’
복도를 통과해서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선배 그룹들이 뜨거운 환호성을 보내면서 하니엘을 반겼다.
하니엘 멤버들은 선배들에게 깍듯이 예우를 차리면서 자신들의 지정석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이런 등장이 어색하게 짝이 없었는데.
녹화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 보니까 이제는 선배들의 환영식이 익숙해졌다.
마지막으로 아이비제이 트윙클이 빈자리를 채웠다.
모든 그룹들의 등장 퍼포먼스가 끝나고.
민주린이 마이크를 들고서 스튜디오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오늘도 민주린의 시원한 목소리가 첫 스타트를 끊었다.
“걸파이트 시즌 2, 대망의 파이널 라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드디어 이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