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제52화. 체인지 미션(1)
체인지.
단어의 뜻을 직역한다면, 무언가를 바꾼다는 의미다.
바꾼다는 말에 이연은 머릿속으로 나름의 추측을 펼쳤다.
‘혹시 멤버들을 섞으려고 그러나?’
그러면 경연이 성립되지가 않는다.
걸파이트라는 프로그램은 팀 대 팀전을 콘셉트로 다루는 방송이다.
그런데 각 그룹의 멤버들을 서로 섞는다는 건, 이 ‘팀’이라는 개념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이연은 걸파이트 제작진이 굳이 이런 혼란을 자처하진 않을 거라고 보고 있었다.
본인들 고생길만 자처하는 꼴이 될 테니까 말이다.
머릿속에 커다란 의문부호를 품은 아이돌들을 향해 민주린이 직접 답안을 공개했다.
“체인지 미션. 간단하게 말해서, 각 그룹의 노래가 그 팀의 1라운드 경연곡이 되는 겁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걸려 있습니다.”
조건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연은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본인이 소속되어 있는 그룹의 노래는 고르면 안 됩니다.”
오직 타 그룹의 노래만 선곡할 수 있다.
이연의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체인지 미션의 내용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1라운드 마지막 그룹 미션의 점수를 매길 평가단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네?”
“저희가 선배님들을 평가한다고요?”
스튜디오가 빠르게 혼란으로 물들어갔다.
그녀들의 이해를 돕게 도와주기 위해서 민주린이 예시를 하나 들었다.
“예를 들어서 아이비제이 트윙클이 MAYO 팀을 지목했다고 하죠. 그러면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은 MAYO 팀이 여태껏 발표했던 곡 중에 하나를 골라서 무대를 꾸미면 됩니다. 그리고 그 무대 평가는 MAYO 팀이 직접 하게 될 겁니다.”
이것이 체인지 미션 내용의 전부였다.
“평가에 대한 기준은 원곡을 부른 그룹이 알아서 정해주시면 됩니다. 그 점수들을 합산해서 최종적으로 1라운드 마지막 그룹 미션의 순위가 정해집니다.”
어찌 보면 여태껏 보여준 경연 방식 중 가장 잔인하다고 볼 수 있다.
평가를 받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서로가 서로에게 굉장히 많은 부담이 된다.
하지만 그건 당사자들의 문제일 뿐.
‘보는 입장에선 재미있겠네.’
이연의 생각대로다.
시청자들이 봤을 때에는 상당히 흥미진진할 것이다.
어떤 그룹들이 서로 매칭될지. 이것도 궁금할 테고 말이다.
다 좋은데.
이연은 약간 납득이 가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이것에 대해 물어보려고 하던 순간.
“질문 있습니다.”
먼저 손을 든 이가 있었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혜원이었다.
“네, 혜원 씨. 말씀해 보세요.”
“저희는 총 7팀인데, 그러면 지난번처럼 한 팀이 비게 되지 않나요?”
이연이 지적하고 싶은 부분을 정확히 짚어냈다.
혹시 저번처럼 밀크티 멤버들이 참전하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민주린은 전혀 다른 대답을 들려줬다.
“체인지 미션은 중복 선택이 가능합니다. 다시 한번 예를 들자면, 아이비제이 트윙클을 제외한 여섯 개 팀이 전부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곡으로 1라운드 무대를 꾸미겠다고 하면, 그것도 가능해요.”
대신에 혜원과 지현, 미수는 여섯 번의 점수를 매기는 고충을 겪게 될 것이다.
중복 선택이라는 경우의 수를 열어둔 덕분에 이연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아직 공개되지 않은 하나의 룰이 더 남아 있었다.
“1라운드 첫 번째 미션과 두 번째 미션을 통해서 아이비제이 트윙클, MAYO, 그리고 하니엘. 이렇게 세 팀이 베네핏을 얻었습니다. 기억하시죠?”
“네.”
“지금부터 베네핏 내용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베네핏을 가지고 있지 않은 멤버들의 경우에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여기에 해당되는 그룹 멤버들만 귀를 쫑긋 세웠다.
“세 팀은 각자 원하는 팀을 하나 지명합니다. 여기서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나는 다른 팀들과 같은 그룹의 곡으로 경쟁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원한다면 본인이 선택한 그룹의 노래들을 대상으로 ‘중복 금지’를 걸 수 있습니다.”
다른 팀이 자기네 그룹과 동일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다만, 이 중복 금지는 선택 사항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니고요. 다른 팀들과 같은 그룹의 곡으로 경쟁을 펼치고 싶다면, 베네핏을 포기하시면 됩니다.”
1라운드 마지막 그룹 미션답게 내용이 꽤나 복잡했다.
비아와 리샤는 이미 이해하기를 포기한 상태였다.
리더님께서 알아서 잘해주시겠지. 그렇게 믿고 따를 생각이었다.
한편, 우미가 이연에게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 베네핏 사용해? 말아?”
“일단은 어떤 그룹의 곡부터 고를지 먼저 정하고. 베네핏을 쓸지 말지는 그다음에 생각하자.”
추가로 미랑이 손을 들었다.
“선배님! 그러면 베네핏을 가진 사람들에게 우선 지명권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네. 맞습니다.”
“만약에 베네핏을 소유한 팀끼리 선택이 겹치게 된다면요?”
“선택 순서는 3팀이 나와서 미니 게임을 통해 정할 겁니다. 미니게임에서 이긴 팀이 먼저 그룹을 지명하고 베네핏을 써버리면, 이후에는 중복 선택이 불가능합니다.”
베네핏을 가진 팀끼리도 우선순위가 존재한다.
이걸 알게 된 이상.
‘미니게임에서 무조건 이겨야겠네.’
미니게임의 정체는 제비뽑기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순번을 정할 때 제비뽑기를 가장 많이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연은 언제든 투시 마법을 발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커다란 변수가 발생했다.
“우선 미니게임에 나설 참가자들부터 지목하겠습니다. 각 팀의 최연장자들이 나와주세요!”
최연장자라는 말에 하니엘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어느 한 곳으로 쏠렸다.
우미가 앉아 있는 방향이었다.
“……나?”
우미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면서 멤버들에게 물었다.
멤버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비아와 리샤가 우미의 왼쪽, 오른쪽 어깨를 토닥여 주면서 말했다.
“가서 이기고 와, 언니!”
“지면 알지? 선배님이라고 봐주는 거 없어!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니까!”
기합을 넣어주는 동생들의 모습이 참 고맙긴 하지만.
우미는 아직도 자신이 하니엘 대표 선수가 되었다는 사실에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MAYO에서는 미랑, 그리고 아이비제이 트윙클에서는 리더 혜원이 출격했다.
베네핏이 없는 팀들조차도 이 세 팀의 격돌에 매우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연은 우미에게 소리 없는 응원을 보냈다.
일단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이기고 난 다음에 전략을 짜든 말든 할 수 있다.
‘제비뽑기겠지?’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작진이 이연의 이런 바람을 한 번 꼬고 말았다.
“미니게임 내용을 공개하겠습니다!”
민주린의 외침에 따라 화면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이번에는 체인지 미션처럼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게임이 공개되었다.
[팔씨름]
우미의 표정에 절망이 깃들었다.
* * *
팔씨름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이연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갔어야 했는데.’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번 대표는 우미가 맡게 되었다.
한편, 미랑은 팔씨름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리샤 못지않은 운동량을 자랑하는 편이었다.
힘쓰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미랑은 경쟁 상대인 우미와 혜원을 빠르게 훑었다.
둘 다 이길 수 있다.
미랑의 얼굴에 자신감이 깃들었다.
MAYO 팀 멤버들 역시 미랑이 팔씨름 선수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에 큰 환호성을 보냈다.
“우리 언니, 파이팅!”
“반드시 이겨야 해! 우리 팀의 명예를 걸고!”
미랑이 걱정하지 말라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반면, 아이비제이 트윙틀 쪽에서는 미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아쉬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연은 그런 그녀들의 반응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팔씨름 대결을 펼치는 참가자들이 셋이다 보니 한 명은 부전승으로 자동 결승 진출을 확정 지을 수 있다.
이것은 가위바위보로 정하기로 했다.
세 아이돌이 모여 열심히 가위바위보를 한 결과.
“부전승 자리는 혜원 씨가 차지했네요.”
이연은 기뻐하는 혜원을 보면서 쓴웃음을 삼켰다.
혜원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도 좋은 편이네.’
저 가위바위보 한 방으로 최소 2위는 확정 지은 셈이니까.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한다.
1라운드는 우미와 미랑의 대결.
양 팀의 응원전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와중에 우미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미랑의 손을 마주 잡았다.
미랑이 그런 우미에게 넌지시 말했다.
“너무 겁먹지 마. 금방 끝날 거니까.”
“……그 말 때문에 더 무서워질 거 같아요, 선배님.”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심판은 민주린이 보기로 했다.
“준비…… 시작!”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연은 이 시합의 결과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시작 신호와 동시에 우미의 팔이 뒤로 넘어갔다.
안간힘을 써보면서 버텨보려 했던 우미였지만, 역시 미랑 앞에서는 무의미한 저항이었을 뿐이다.
이연은 우미의 축 처진 어깨를 다독이면서 말했다.
“괜찮아. 잘했어, 언니.”
“나 대신에 네가 나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연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건 혜원과 미랑, 저 둘의 싸움이다.
누가 봐도 미랑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였다.
그럼에도 이연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서로를 마주 보는 형태로 앉은 채 두 손을 꼭 마주 잡은 혜원과 미랑.
두 사람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이연은 저 투샷이 남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미랑은 말없이 혜원을 응시하면서 강한 승부욕을 불태웠다.
반면, 혜원은 옅은 미소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 미소가 미랑의 승부욕에 기름을 부었다.
“준비, 시작!”
민주린이 스타트를 알리자마자 미랑이 초반부터 우위를 점하기 위해 모든 힘을 오른팔에 쏟았다.
그러나 이변이 발생했다.
“……어?”
혜원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미랑은 크게 당황했다.
이 경기를 지켜보는 아이돌들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미, 미랑 언니! 뭐 하는 거야!”
“너무 방송각 잡으려고 하지 말고 일단 이겨!”
방송도 방송이지만, 경쟁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다.
미랑도 잘 안다.
그러나 그녀가 방송을 생각해서 일부러 이런 쇼를 하는 건 아니었다.
미랑이 다시 한번 안간힘을 쥐어짰다.
그럼에도 혜원의 팔은 여전히 굳건했다.
상대방이 억지로 힘을 소모하기를 기다렸던 걸까.
미랑의 팔에 힘이 빠지는 순간.
혜원이 행동에 나섰다.
그녀가 힘을 주자, 미랑의 팔이 허무하게 반대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민주린이 혜원 쪽을 가리키면서 외쳤다.
“아이비제이 트윙클, 승!”
같은 멤버들은 혜원이 이길 줄 알았다는 듯이 그녀를 얼싸안고 크게 환호했다.
반면, 미랑은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 모양인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 모든 상황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본 이연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보통 여자가 아니네.’
겉으로 봤을 때에는 덜렁거리고, 옆에서 챙겨줘야 할 타입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호랑이가 발톱을 숨겨도 너무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