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115화
제32화. 파트 분배(1)
무사히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난 다음 날.
오늘도 이른 새벽에 유키와 함께 운동을 나갔다가 돌아온 이연은 여전히 불 꺼진 거실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키. 오늘 우리가 몇 시에 회사 가기로 했지?”
“11시로 알고 있어요.”
“지금 시간은?”
“10시요.”
“그럼 우리가 여기서 몇 시에 출발해야 11시에 딱 맞춰서 회사에 도착할 수 있을까?”
갑자기 펼쳐진 퀴즈 타임.
유키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뒤에 정답을 말했다.
“여기서 최소 10시 반에는 나가야죠?”
“그런데 아직도 멤버들이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말해 무엇 할까.
“깨워야죠. 제가 3인실 맡을까요?”
“어. 아니, 잠깐. 내가 3인실 들어가서 깨울 테니까 네가 2인실로 가.”
중간에 이연이 말을 바꾼 이유가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는 습관을 지닌 리샤 때문이었다.
유키는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2인실 방으로 향했다.
이연도 곧장 3인실 방문을 열었다.
여전히 어두컴컴한 방 안.
깊게 한숨을 내쉰 이연은 돌아다니면서 한 명씩 잠을 깨우기 시작했다.
시우나 여솜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미 언니까지 늦잠 잘 줄은 몰랐어.”
무거운 몸을 일으킨 우미가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을 억지로 쓸어내리면서 미안함을 담은 미소를 흘렸다.
“어제 잠을 너무 늦게 잤나 봐. 미안해, 연아.”
하니엘 팀 내에서 부지런함 순위로 따지면 권이연이 1위, 양우미가 2위였다.
늘 이연과 함께 이른 아침에 눈을 떴던 우미.
그러나 요즘은 우미가 아니라 유키가 2위로 올라선 느낌이었다.
유키가 부지런해졌다기보다는 우미가 약간 게을러진 영향이 더 컸다.
이연이 우미의 작은 어깨 위로 양손을 올렸다.
마나를 살짝 흘리면서 안마를 하듯 주무르자, 우미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좋다. 예전에 안마 기술 같은 거라도 배웠었어?”
“따로 배운 적은 없고. 그냥 손 가는 대로 하는 거야.”
“그래? 그런 것치고는 너무 시원한데. 예전에 태국으로 가족 여행 갔을 때 받았던 마사지보다…….”
중간에 우미가 흠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말끝을 흐리더니, 결국은 입을 닫고 말았다.
우미의 입에서 먼저 가족 이야기가 나온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일까. 우미 본인도 놀란 모양인지 당황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어색하게 웃는 우미를 내려다보면서 이연은 여솜과 시우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민 같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털어놔도 돼. 원래 고민이라는 건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이 많이 줄어드는 법이거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안마를 계속 이어가던 이연의 손을 우미가 붙잡았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 연아.”
우미는 그녀의 한쪽 손을 붙잡고 천천히 자신의 어깨 위에서 내려놓았다.
말과는 다른 행동에 이연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가족이라는 분야에 한해서 세워진 우미의 마음 속 벽은 이연의 따스한 말에도 여전히 견고했다.
* * *
오늘 하니엘 멤버들이 LC 엔터테인먼트를 찾은 이유를 진세혁 프로듀서가 짧게 요약해 외쳤다.
“오늘은 설욕전이다!”
지난번에 멤버들에게 야심차게 곡들을 들려주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던 진세혁 프로듀서.
오늘 다시 두 번째 기회를 가지게 되어서 그런지, 진세혁은 설욕전에서 어떻게든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겠다는 의욕을 마구 불태우고 있었다.
리샤가 자신의 옷 상의를 손끝으로 붙잡고 펄럭였다.
“겨울 날씨 다 되어가는데 여긴 덥네, 더워.”
진세혁 프로듀서의 과한 의욕 때문에 그렇다.
작업실 온도가 후끈 위로 올라간 덕분에 멤버들은 한 명씩 차례로 겉옷을 벗어야 했다.
어쩐지. 진세혁 프로듀서가 반팔을 입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가 멤버들에게 코드와 가사가 적힌 악보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수정된 부분은 따로 체크해 뒀으니까 확인하면 돼.”
“우와…… 하나도 모르겠다.”
“나도.”
전문 지식에 약한 비아와 리샤의 입에서 벌써부터 앓는 소리가 나왔다.
반면, 이연이 보여준 능력에 자극을 받아서인지 최근에 작곡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우는 다른 내용들보다도 코드 쪽을 더 관심 있게 훑었다.
“연 언니가 말씀하신 대로 수정하셨네요?”
“어. 다른 것들도 다 실험해 봤는데, 이연이가 알려준 것보다 더울리는 게 없더라. 지금 이 흐름이 제일 자연스러워. 뭐, 글자만 봐선 무슨 의미가 있겠냐. 일단 한번 들어봐. 츄라이, 츄라이!”
진세혁 프로듀서의 말이 맞다.
백 마디 말보다는 한 번의 실천이 효과적이다.
같이 일하는 스태프에게 음악 틀어달라고 신호를 보내자, 익숙한 반주가 흘러나와 작업실 전체에 메아리쳤다.
“크게 수정되었다고 보기에는 좀 그렇고. 아까 시우가 말한 것처럼 이연이가 알려준 그 부분만 고쳤어. 그래서 변화가 막 다이나믹하게 느껴지진 않을 거야.”
그래도 확실히 코러스 2 파트는 나아졌다.
적어도 이연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프로듀서님한테 제 생각 말씀드리기를 잘했네요.”
“그렇지. 언제든 괜찮은 아이디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 이연이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말해도 돼. 나는 이런 거, 막 프로듀서로서의 자존심 내세워서 안 된다느니 뭐니 하는 스타일은 전혀 아니니까. 언제나 열린 귀, 오픈 마인드! 오케이?”
“네, 알겠습니다.”
수다만 좀 줄이면 참 괜찮은 프로듀서일 텐데.
이연은 속으로 이 말도 같이 해줄까 말까 고민했지만, 음악에 관한 피드백은 아니었기에 그냥 참기로 했다.
노래가 다 끝나자, 멤버들이 동시에 박수를 쳤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찐 프로님!”
“그래서 이 노래 제목은 뭐예요?”
“아, 내가 제목 적어둔다는 걸 깜빡했구나.”
진세혁이 다급하게 볼펜을 찾았다.
그러면서 제목에 대해 질문한 여솜의 악보 상단에 뭔가를 끄적였다.
“H, U, G…… 허그?”
“어. 맞아. 그게 이번 곡 타이틀이야.”
허그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이연은 왜 이런 제목이 탄생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가사만 봐도 그렇다.
‘그대의 상처를 내가 보듬어줄게요’라든지. ‘내 품에 안겨요’ 같은 문장이 자주 나오는 것만 봐도 절로 포옹이라는 단어가 연상된다.
멤버들도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편이었다.
“요즘은 긴 제목보다 이렇게 짧고 임팩트 있는 단어를 강조하는 추세인 거 같더라고요.”
“맞아, 맞아.”
“기억하기도 쉽고.”
외우는 게 쥐약인 비아와 리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목이었다.
이것으로 타이틀곡은 확정되었다.
이제 중요한 순서가 남았다.
“자, 이거.”
진세혁 프로듀서가 멤버들에게 아직 돌리지 않은 종이를 추가로 더 건넸다.
여솜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이게 뭐예요?”
“각 파트별로 나눠서 표기해둔 거야. 한 명이 노래 하나를 통째로 다 부를 수는 없으니까. 파트 나눠야지.”
이번 곡에서 어떤 멤버가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할 수 있느냐.
이를 정하는 파트 분배의 시간이 찾아왔다.
* * *
파트 분배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어떤 파트를 맡느냐에 따라 자신의 존재감을 대중들에게 계속 각인시켜줄 수도 있고, 반대로 아예 묻혀 버리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대의 중심이 되느냐, 병풍 멤버가 되느냐. 이 차이를 가르는 게 바로 파트 분배다.
서로 친한 관계라 할지라도, 아무래도 이때만큼은 서로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진세혁 프로듀서도 이걸 잘 안다. 담당해본 아이돌 그룹이 한두 그룹도 아니고. 꽤나 여럿을 담당해 봤기에 그가 먼저 말문을 뗐다.
“일단은 내가 메보, 서보, 래퍼별로 나눴어. 메보는 이연이 맡을 거지?”
이에 관해서만큼은 전 멤버 다 이견이 없었다.
“연이 언니가 라이브도 그렇고. 제일 안정적이니까요.”
“저도 연이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케이. 그러면 만장일치로 이연이가 하는 걸로…….”
이연도 딱히 싫다고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한눈에 봐도 자신이 아니면 다른 멤버들이 소화하기 힘든 파트들이 몇 개 보였기 때문이다.
그냥 부르면 잘 부를 만한 파트들이지만, 아이돌은 격한 안무와 함께 이걸 라이브로 소화해야 하는 직종이니까. 이걸 따진다면, 권이연이라는 픽이 제일 확실했다.
메인 보컬답게 맡는 파트도 서브 보컬들에 비해서 많았다.
이연은 하니엘 팀을 상징하는 멤버나 다름없다. 그렇다 보니 그녀의 비중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케이. 그럼 서보들 차례로 넘어갈까? 서로 ‘이건 내가 부르고 싶다’ 하는 파트들 있으면 말해봐.”
메인 보컬 파트를 제외한 나머지 파트들을 지목하면서 실시간으로 지원자를 받았다.
다들 하나도 겹치지 않고 의견 충돌할 일 없이 잘 끝났다…… 라는 해피 엔딩이 나왔다면 참 좋았을 테지만.
일곱이나 되는 멤버들이 한날한시에 조금이라도 맞물리는 일 없이 의견을 조율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욕심이 나는 파트가 있을 테고. 이 파트는 대부분 인기가 많다.
그만큼 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지금 당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여기 B파트 희망하는 멤버들이 여솜이하고 우미, 비아, 유키. 이렇게 넷이네?”
인기가 상당히 많은 파트였다.
프로듀서로서 이럴 때가 참 난감하다.
그렇다고 네 명이 동시에 이 파트를 부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때, 우미가 손을 떼면서 말했다.
“그럼 제가 먼저 양보할게요. 나머지 셋이서 논의한 다음에 정해보면 될 거 같아요.”
이연이 우미의 표정을 살피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언니가 동생들한테 평소에도 많이 양보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아는데, 이런 것까지 양보할 필요는 없어. 이건 자기가 잘 부를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 파트는 그냥 말해. 그게 좋아.”
양보만 하다가 나중에 한 소절도 못 부르고 끝나면 책임져줄 사람도 없다.
물론 멤버 하나가 아예 파트를 못 받은 경우는 없겠지만, 그래도 본인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욕심을 내는 게 좋다.
진세혁 프로듀서 역시 이연의 의견에 크게 동의했다.
“이연이 말이 맞아. 이런 건 눈치 볼 것 없이 그냥 하고 싶으면 말해도 돼. 너희 노래잖아? 퀄리티를 높이려면 어느 파트에 어떤 멤버가 잘 어울리는지를 확실히 검증하고 결정해야지.”
다른 멤버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죄송하다고 말을 하고선 뗐던 손을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켰다.
이렇게 해서 후보는 총 넷.
진세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동원하기로 했다.
“그럼 넷이서 돌아가면서 이 파트 한번 불러보자. 부르고 난 다음에 누가 잘 어울리는지 정하면 되지.”
리샤가 손뼉을 한번 마주치고선 파이널 무대 준비 당시의 일화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때도 메인보컬 자리 두고 연이하고 진절혜하고 서로 붙었었는데.”
그 당시와 다른 차이가 있다면.
오늘은 팀 대 팀이 아닌 내전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