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100화 (100/299)

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100화

제27화. 파이널 미션(6)

벨제브 팀이 준비한 마지막 곡, ‘H’.

제목 자체는 상당히 심플했다.

힙합에서 따온 알파벳일 수도 있고. 아니면 힙(Hip)을 강조하는 안무가 포함되어 있어서 거기서 따온 H가 될 수도 있었다.

타이틀곡의 유래까지 알진 못했다.

‘굳이 알 필요도 없고.’

이연이 관심 있게 지켜볼 만한 건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벨제브가 첫 곡 때처럼 두 번째 곡에서도 어떤 비장의 퍼포먼스를 준비했을지.

이것만 확인하면 되는 거였다.

그러나 이연은 무대를 보면서 벨제브 팀이 이번만큼은 정석대로 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느껴졌다.

첫 번째 무대에서 래퍼가 아닌 멤버가 랩을, 그것도 일본어로. 이런 실험적인 퍼포먼스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시라이시 유키를 중심으로 짜여진 무대여서 그런 거였다.

‘아마 일본어 랩을 하겠다고 먼저 말한 것도 유키 쪽이겠지.’

반면, 두 번째 곡은 철저하게 진절혜를 중심으로 구성된 무대다.

이번에야말로 이연이 예상했던 대로 진절혜와 벨제브 팀 멤버들은 정석 of 정석을 추구하는 무대를 선보였다.

‘이게 진절혜의 원래 스타일이긴 해.’

그래서인지 특별히 놀랄 건 없었다.

이미 앞에서 새로운 시도는 보여줬으니까.

마지막은 안전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이연과 하니엘도 동일하게 이 전략을 쓰기로 했다.

‘마지막 무대는 결국 깜짝 변수 없이 실력 대 실력 대결이 되겠네.’

오히려 이연이 바라던 매치였다.

앞선 무대와 달리 특별히 눈에 띄는 퍼포먼스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하니엘 멤버들은 벨제브의 1차 공연보다 2차 공연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안무 괜찮은데?”

“노래도 좋고.”

“나 아까부터 계속 어깨 들썩이고 있었잖아. 저 노래가 사람의 흥을 깨우는 그런 매력 같은 게 있나 봐.”

노래는 사람의 감정을 어느 정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을 어떻게, 얼마만큼 이끌어낼 수 있는지.

가수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벨제브 팀은 마지막 곡인 ‘H’가 지닌 힘을 최대한 다 발휘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물론 이연은 자신이 맡았더라면 저 노래를 더 잘 살릴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

이미 다 끝난 무대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연과 하니엘 팀은 더 좋은 무대를 준비해 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벨제브 팀의 마지막 무대를 보셨습니다. 그럼 이제 하니엘 팀의 두 번째 무대를 만나보시겠습니다!

드디어 하니엘의 턴이 돌아왔다.

이연이 먼저 일어서서 팀원들을 독려했다.

“가서 원 없이 즐기고 오자.”

팀원들은 이연의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라스트 스테이지.

이 단어가 연습생들에게 주는 중압감은 상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제브 팀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무대 위에서 보여줬다.

적어도 심사 위원들은 그렇게 느꼈다.

오채일 대표는 진절혜가 LC 엔터테인먼트에 처음 지원했을 당시의 일을 오랜만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절혜는 정말 필사적으로 오디션을 본다는 느낌이었는데. 방금의 무대가 그때 절혜가 나한테 보여줬던 그 모습하고 너무 비슷했어.”

“초심으로 돌아갔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난 개인적으로 이번 무대,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거든.”

모든 심사 위원들도 오채일 대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석호 트레이너가 비록 여태껏 모종의 이유로 진절혜의 일방적인 편을 들어주긴 했지만, 그걸 다 떠나서 객관적으로 봐도 이번 무대는 상당히 괜찮았다.

2라운드 때 잠시 흔들렸던 진절혜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온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석호 트레이너는 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입장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석호 트레이너의 혼잣말을 들은 민주린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어떤 입장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줘.”

궁금하긴 했지만, 뒤이어 하니엘의 무대가 시작되려고 했기에 민주린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한편, 오채일 대표는 벌써부터 기대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앞으로 우리 회사를 먹여 살릴 인재들이.”

옆에서 나현아 트레이너가 아직 데뷔가 확정된 것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하면 시청자들에게 오해받을지도 모른다고 경고를 줬다.

오채일 대표가 대중가요계에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인정하지만, 가끔 이 열정이 지나쳐서 지금처럼 작은 실수 같은 걸 저지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변인들이 나서서 잡아줄 필요가 있다.

그만큼 하니엘 팀의 무대가 많이 기대가 되니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니엘이 처음에 선보였던 오리지널곡 ‘첫사랑’이 남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면, ‘페어링’은 하니엘과 팬들의 유대를 강조하는 그런 곡이다.

지금까지 열심히 응원해 준 팬들을 위한 헌정곡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그들을 향한 고마운 마음을 잔뜩 담았다.

이번에도 센터를 맡은 이연이 가장 먼저 라스트 스테이지의 포문을 열었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한 걸음도 뗄 수 없었어.

그런 내가 다가와

쉴 수 있는 나무가 되어준 그대.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앞으로도 함께 할 거야.

팬들을 나무에 빗대어 표현한 가사가 객석에 앉은 모든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심사 위원들 역시 이들의 노래에 귀를, 이들의 진심에 마음을 기울였다.

팬들이 있어야 가수가 있는 법이다.

‘페어링’에는 이런 하니엘 멤버들의 마음이 여실히 담겨 있었다.

조용히 노래를 듣던 민주린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나현아 트레이너도 마찬가지였다.

“아…… 갑자기 눈물이 다 나네.”

혹시 몰라서 미리 휴지를 챙겨 온 게 다행이었다.

나현아 트레이너와 민주린이 몰래 눈물을 훔치는 동안, 오채일 대표와 이석호 트레이너는 말없이 하니엘 멤버들의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오채일 대표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과연 가수가 아닌, 아직 데뷔조차 못 한 연습생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까.

처음에는 이런 의심이 마음 한쪽 구석에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LC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싶다고 했을 때에도 오채일 대표는 사실 많이 부정적이었다.

그래도 연습생들에게 한 번이라도 방송에 나오게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기회가 될 테니까.

이런 이유에서 그는 마지못해 승낙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당시의 결정이 올해 자신이 한 일 중에 가장 유의미한 선택이었음을 이 무대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감동적인 무대를 본 게 얼마 만일까.

대표라는 직함을 떼고, 순수하게 관객 입장으로 돌아가 무대를 즐겼던 적이 최근에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직 연습생들만이.

아니, 오직 하니엘 멤버들만이 만들 수 있는 무대.

오채일 대표는 지금 자신이 이 무대를 보고 있는 걸 영광으로 여기기로 했다.

* * *

하니엘 팀의 마지막 무대까지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이제 최종 투표까지 단 5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직 투표하지 않으신 분들은 어서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이은솔의 재촉에 잠시 투표하는 걸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 다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동안 무대를 마친 연습생들은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 SSS 공식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무대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그 전에 이연은 잠깐 화장실에 들르기 위해 홀로 대기실을 나섰다.

화장실 안에 들어서자, 미리 와서 손을 씻고 있던 시라이시 유키가 그녀를 반겼다.

“어머, 이연 씨.”

“무대 잘 봤어요, 시라이시 양.”

“그건 오히려 제가 하고 싶은 말인걸요. 하니엘 팀 마지막 무대 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거 때문에 눈 화장 다시 하느라 애 좀 먹었어요.”

권이연이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만큼 자신들의 무대가 너무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이연은 슬쩍 시라이시 유키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가 싱긋 웃으면서 이연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지금쯤이면 투표 끝났겠네요.”

“그러게요. 결과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는데.”

“누가 이길까요?”

시라이시 유키의 직접적인 질문에 이연은 이렇게 답했다.

“잘 모르겠네요.”

그러자 시라이시 유키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졌다.

“정말로 모르시나요?”

사실 이연은 알고 있었다.

마지막 무대를 마치고, 본능적으로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파이널 라운드의 승자가 누가 될지.

공교롭게도 시라이시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은 듯했다.

그럼에도 이연은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결과는 나와봐야 아는 거니까요.”

이에 대해 시라이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다 씻고 나중에 보자고 말을 하면서 화장실을 나서려고 할 때.

이연의 한마디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저희가 우승하면, 베네핏 쓰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아주 찰나의 순간, 시라이시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누구한테 쓰실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이번에는 이연이 역으로 시라이시가 했던 질문을 그대로 던졌다.

“정말로 모르시나요?”

“…….”

시라이시는 대답하지 못했다.

궁금한 게 있기 때문이었다.

“왜 그걸 저한테만 미리 말씀해 주시는 건가요?”

사실 큰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시라이시 유키를 위한 약간의 배려였다.

“시라이시 양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요.”

베네핏은 같이 데뷔할 추가 멤버를 상대팀에서 데려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지녔다.

그러나 이 베네핏이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베네핏을 B라는 연습생에게 사용했다고 치자.

그러나 이런 경우의 수가 생길 수도 있다.

만약 A가 베네핏을 거부한다면?

자신은 하니엘 팀과 같이 데뷔하기 싫다고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연은 파이널 무대를 준비하면서 이에 관한 걸 서윤철 PD에게 직접 물었던 적이 있었다.

경우의 수를 다 따져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윤철 PD가 들려준 대답은 이러했다.

그러면 베네핏은 없는 거로 된다고.

A가 베네핏을 자신에게 쓰는 걸 거부한다면, 다른 B, C 연습생을 추가로 연달아 지목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안 된다고 했다.

오직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

그 한 번의 기회가 유효타가 될지, 아니면 무의미한 시도가 될지는 지목당한 연습생에게 있다고 했다.

그만큼 베네핏을 쓸 상대를 고를 때 신중하게 하라는 뜻이었다.

덧붙여 서윤철 PD는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했었다.

모든 연습생의 꿈이 데뷔하는 건데, 과연 그 베네핏을 거절할 연습생이 있을까요?

이에 대해 이연은 이렇게 답했다.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법이라고.

그래서 이연은 시라이시에게 미리 말을 하기로 한 것이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결정해 주세요.”

시라이시 유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사실 이연 씨의 이런 면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어요.”

“어떤 건가요?”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아쉬움이 스쳤다.

“어쩌면 이 경쟁은 처음부터 저희에게 승산이 없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그렇게 말을 남기고서 시라이시 유키는 자신의 연습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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