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93화
제26화. 마지막 준비(4)
중간에 연습생들을 당황하게 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파이널 무대 준비는 계속 진행되었다.
‘첫사랑’ 안무를 맞춰보기 위해 오늘은 실제로 무대 위에서 입을 의상까지 갈아입고 연습실을 찾은 하니엘 멤버들.
노래 제목에 맞게, 그녀들은 풋풋함이 절로 느껴지는 학교 교복풍의 의상을 입고서 거울 벽 앞에 섰다.
우미가 이연의 양어깨를 붙잡고 가운데로 이끌었다.
“연이가 센터니까 여기 서야지.”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리는 치마의 감촉은 언제나 그렇듯 이연에게 당혹감과 낯설음, 그리고 부끄러움을 동시에 선사했다.
안에 속바지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치마가 펄럭이면서 안의 속바지가 보일 때마다 마치 속옷을 보이는 그런 느낌이 매번 들었다.
안무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연은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꾹꾹 누르면서 최대한 아래로 끌어 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골반에 딱 걸린 탓에 치마는 더 이상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습생들의 신체 사이즈에 딱 맞게 제작한 의상팀의 뛰어난 실력이 이럴 때에는 문제였다.
이연의 바로 뒤에 선 비아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이 언니는 유독 치마를 싫어하더라?”
“그러게. 예전의 연이는 치마 입는 거 엄청 좋아했는데. 예쁘다고 그랬잖아?”
그거야 전(前) 권이연의 취향일 뿐이고.
루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는 현(現) 권이연은 단언컨대 절대로 그런 취향이 아니었다.
오직 바지다.
레깅스까지는 허용 범위지만, 치마는 아직 적응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도 두 번째 무대 의상은 바지라서 그나마 다행이네.’
두 번째 곡인 ‘페어링’의 경우에는 바지를 입을 멤버와 치마를 입을 멤버가 나뉜다.
그래서 이연은 잽싸게 자신이 바지를 입겠다고 의상팀에게 열심히 어필했다.
이연의 노력이 통한 덕분에 결국 그녀는 바지 배정을 확정받게 되었다.
물론 의상팀은 이연이 치마를 입어야 예쁘게 나올 거 같다고 수차례 권고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연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멤버들이 이연에게 더 이상한 말을 꺼내기 전에.
“연습 시작하자. 다들 집중해.”
‘첫사랑’ 반주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이연은 멤버들을 향해 머릿속에 있는 잡생각들 다 버리고 오로지 안무 동작만 떠올리라고 강조했다.
이 곡 하나만 연습하는 게 아니다.
아직 ‘페어링’ 안무는 다 맞춰보지도 못했고, 여기에 12명의 연습생이 모여서 부르는 단체곡도 준비해야 한다.
그만큼 제작진이 기간을 넉넉하게 주긴 했지만, 이것도 어느새 반절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은 자칫 방심하는 순간 금방 지나가게 마련이다.
이걸 이연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연습으로 배정된 시간만큼은 다른 거에 한눈팔지 않고 무대 준비에만 열중하고 싶었다.
황유성 트레이너가 없을 때에는 이연의 주도하에 안무 연습이 시작된다.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서로 몸이 심하게 부딪치지 않도록 신경 써. 이거, 어려운 동작이니까 이 파트에서는 특히 더 집중하고. 봐봐. 대열 흐트러져 있잖아.”
웬만한 족집게 강사 부럽지 않을 만큼 날카로운 지적을 날리는 이연.
같은 연습생이지만, 가끔씩 멤버들은 이연이 이석호나 황유성처럼 안무를 담당하는 트레이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때가 지금이다.
“비아! 또 스탭 꼬였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어가려고 해도 나 못 속인다는 거 알지?”
“저 언니는 진짜…… 매의 눈이 따로 없어.”
“혼잣말하는 것도 다 들려.”
비아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그렇게 ‘첫사랑’ 안무 연습에 한창 매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현아 트레이너가 하니엘 팀의 안무 연습실을 찾았다.
“연습 잘하고 있니?”
“안녕하세요!”
보컬 담당인 나현아 트레이너가 안무 연습실을 찾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가 있었다.
“단체곡 나왔어. 가이드곡 파일 가져왔으니까, 다 같이 모여서 한번 들어봐.”
“드디어 나왔나요?”
“어. 잘 나왔더라.”
나현아 트레이너가 직접 노래를 틀어 연습생들에게 들려줬다.
제목은 ‘우리의 꿈’.
데뷔라는 목표를 줄곧 좇아온 연습생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그런 제목이었다.
장르는 발라드. 그래서 따로 안무 연습을 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에 정해야 할 게 있었다.
“각자 어느 파트를 부를지 결정해야 하는데. 일단은 각 팀별로 희망하는 파트들을 지원받기로 했거든? 찐 프로듀서님이 여기 종이에다가 노래 파트별로 나눠뒀으니까, 노래 자세히 들어보고 희망하는 곳에 자기 이름 적어두면 돼. 다 적으면 매니저님한테 제출하렴.”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나 먼저 가볼게.”
연습생들끼리 자유롭게 회의할 수 있도록 나현아 트레이너는 일부러 자리를 비켜줬다.
그녀가 떠난 뒤.
멤버들은 노래를 들으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반면, 연시우는 별다른 고민이 없었다.
그녀는 무조건 랩 파트를 담당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1절이냐. 2절이냐. 이지선다의 갈림길에 놓였다.
“저쪽은 랩 담당이 누구였죠?”
비아가 동갑내기 친구의 궁금증을 직접 해결해 줬다.
“규은 언니.”
“맞다, 그랬지. 규은 언니가 택할 만한 건 피해서 골라야겠네.”
머릿속으로 노래를 되새기느라 얌전히 있던 리샤가 막내의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왜? 이것도 경쟁이잖아. 언니라고 양보하고 그런 거 없으니까 네가 원하는 파트 있으면 신청해.”
“저는 둘 중에 어느 파트가 더 눈에 띌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요. 그래서 그냥 평화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생각이에요.”
이연도 시우와 같은 생각이었다.
랩 파트는 비중이 나름 공평하게 잘 분배된 것 같다.
문제는 보컬 파트다.
우미가 보컬 쪽에 관해 먼저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2절 후렴구 B파트. 여기가 내가 봤을 때에는 하이라이트인 거 같은데? 음도 가장 높고. 고음 파트가 아무래도 사람들한테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밖에 없잖아.”
이 파트를 맡는 사람이 단체곡의 메인 보컬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여솜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나는 이거 생방 무대에서 잘 소화할 자신 없어.”
“나도.”
“음이 너무 높아. 괜히 돋보이려고 욕심부렸다가 삑사리라도 나면 역풍 제대로 맞을지도…….”
하니엘 팀의 서브 보컬들은 무난하게 다른 파트를 선택할 예정이었다.
“연이는 메보 파트 신청할 거지?”
우미의 말대로 이연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단지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다.
마침 시우가 그 신경 쓰이는 것을 직접 언급했다.
“절혜 언니도 그거 하려고 할 거예요.”
“알아.”
알면서도 이연은 당당하게 2절 후렴구 B파트 밑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만약에 포지션이 겹친다.
그러면 답은 하나뿐이다.
“서로 메보 자리 두고 오디션 보면 되는 거지.”
반드시 카메라 앞에서만 경쟁하라는 법은 없다.
이렇게 카메라가 없을 때에도 연습생들은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늘 경쟁한다.
그게 그녀들에게는 일상이 되었다.
* * *
오늘은 처음으로 12명의 연습생이 한자리에 모여 단체곡인 ‘우리의 꿈’을 연습해 보는 날이다.
나현아 트레이너의 주최로 연습실에 모인 각 팀의 멤버들.
“현아 쌤은 언제 오신대?”
“잠깐 화장실 가셨으니까 금방 오시지 않을까?”
“……그래?”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촬영 말고 하니엘과 벨제브 팀의 멤버들이 이렇게 한 공간에 나란히 있던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팀 멤버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서로의 눈치를 보곤 했었다.
경쟁자라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꿈’을 연습할 때에는 일시적으로 같은 팀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의사소통 정도는 할 줄 아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이연은 생각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보는 게 좋겠지?’
하니엘의 리더니까.
이연이 입을 열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
시라이시 유키가 먼저 반응했다.
“우리, 서로 너무 딱딱하게 있는 거 아니에요? 경쟁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LC 엔터테인먼트 식구 아니에요. 그렇죠?”
능숙한 한국어 솜씨를 뽐내며 말하는 시라이시 유키.
그녀가 먼저 스타트를 끊을 줄은 예상 못 했다.
그래도 유키 덕분에 이연이 말을 꺼내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시라이시 양 말이 맞아요. 지금 저희 분위기 보면 분명 트레이너님도 한 소리 하실 거예요. 같이 무대에 서야 하는 사이끼리 이게 뭐냐고. 그러니까 ‘우리의 꿈’ 연습할 때만큼은 서로 적이라는 생각을 잠깐 지우도록 하죠. 어때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먼저 나섰던 유키가 곧장 이연의 말을 옹호했다.
“네, 좋아요! 여러분들도 어때요?”
벨제브 멤버들과 하니엘 멤버, 모두가 다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활약 덕분일까. 아까보다는 그래도 분위기가 좀 나아진 편이었다.
마침 화장실에서 복귀한 나현아 트레이너가 미안하다면서 키보드 앞에 자리를 잡았다.
“어머, 나 없는 사이에 서로 이야기라도 좀 했나 봐? 다들 표정이 좀 풀렸네?”
굳이 분위기를 느끼지 않아도 연습생들 표정만 보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연은 슬쩍 유키 쪽으로 잠깐 시선을 돌렸다.
마침 유키도 이연을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두 여성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유키가 입꼬리를 스윽 말아 올리면서 짙은 미소를 보냈다.
반대로 이연은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고개만 아주 살짝 움직였다.
‘진절혜가 해야 할 역할을 시라이시, 저 사람이 해주네.’
하기야. 진절혜가 붙임성이 좋은 사람도 아니고.
성격상 먼저 친근하게 말을 붙이거나 하는 타입은 결코 아니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시라이시 유키는 확실히 벨제브 팀의 또 다른 주축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한 것으로 보였다.
만약에 그녀가 없었더라면.
‘벨제브 팀은 진작에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네.’
한 명씩 저렇게 눈치가 빠르고 행동력 있게 나서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시라이시 유키. 보면 볼수록 탐나는 사람이야.’
이연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나현아 트레이너가 보컬 분배에 대해 언급했다.
“겹치는 파트는 거의 없네. 다른 부분은 충분히 조율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역시 메인 보컬 포지션이 가장 큰 문제네.”
예상대로 권이연과 진절혜가 동시에 2절 후렴구 B파트에 본인의 이름을 나란히 적고 말았다.
사실 나현아 트레이너도 이런 일이 반드시 발생할 거라고 보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보컬 쪽에 욕심이 많은 연습생들이니까.
그래서 미리 대안도 가져왔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가위바위보로 정하는 건 너무 성의 없잖아. 그렇지?”
경쟁이 붙은 두 당사자가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그렇다고 답했다.
이연뿐만 아니라 진절혜도 얼추 예상하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서로가 원하는 파트를 정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현아 트레이너가 씨익 웃었다.
“오디션 한번 해볼까? 이연이하고 절혜, 둘 다 앞으로 나오렴.”
유닛 대결 이후 간만에 다시 한번 일대일 대전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