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92화
제26화. 마지막 준비(3)
야심한 시간에 다시 회사로 출근한 이석호 트레이너는 곧장 오채일이 기다리고 있는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
“괜찮아. 나한테 할 말 있어 보이던데. 술은 어디서 마실까?”
“제가 추천하는 곳 어떻습니까?”
“어디?”
“양소식당, 오랜만에 거기 이모님이 만들어주시는 모둠전이 먹고 싶습니다.”
양소식당은 오채일 대표에게도 특별한 장소다.
이제 막 회사를 차리고 한창 힘든 시기를 보냈을 시기에 양소식당에서 먹었던 모둠전에 소주 한 잔이 그에게는 특별한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채일 대표는 자신의 회사 직원들이 막 입사를 했을 때, 꼭 한 번씩 그곳에 데려가서 맛을 보게 해줬다.
이석호의 제안에 오 대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석호와 오 대표는 차를 타고 양소식당 뒤편에 위치한 주차장으로 향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빨간 앞치마를 두른 양소식당의 사장이 오 대표를 보면서 크게 기뻐했다.
“엄머나?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그러게요. 자주 못 찾아뵈어서 죄송해요, 이모님. 이 친구하고 소주 한잔하려고 왔는데, 괜찮죠?”
“당연히 괜찮지! 저기, 저쪽 가서 앉아요. 저기서 마시면 사람들 눈에도 잘 안 띄거든요.”
오채일 대표가 유명 인사가 되고 나서부터 이런 식으로 일부러 구석진 자리로 안내를 해주곤 했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일까.
좁은 가게 안에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많아 보이지 않았다.
“안주는 뭘로 줄까?”
“모둠전 세트 하나 주세요.”
“알았어. 금방 가져다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등받이도 없는 낡은 의자에 앉은 이석호 트레이너는 쓴 미소를 지으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대표님하고 진짜 오랜만에 오네요.”
“그렇지. 네가 우리 회사에 입사한 지 한…… 9년? 8년? 얼마나 됐지?”
“이제 햇수로 10년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오래됐어?”
“예. 제가 둘째 낳기 전에 입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랬어. 내가 자네 둘째 아들 돌잔치에도 가고 그랬었는데. 그때 애기가 마이크 집었던가?”
“네, 맞습니다.”
“나중에 가수 되겠다고 하면, 자네한테 댄스 레슨 받으면 되겠다고 우리가 엄청 기뻐했었지. 기억나?”
“물론이죠.”
아직 모둠전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들은 추억을 안주 삼아 먼저 술잔을 기울였다.
“크……! 좋네, 오랜만에 이렇게 둘이 마주 앉아서 옛날이야기 하니까 그때 기억도 새록새록 나고. LC가 당시에는 진짜 뭣도 없던 회사였는데.”
“그래도 태공 씨도 있고, 나름 굵직한 가수분들 많이 보유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태공이 없으면 나 회사 차리지도 못했지. 따지고 보면 걔가 개국공신이야. 그다음에 자네 같은 우수한 인재들이 들어와서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우리 회사가 쭉쭉 클 수 있게 되었고.”
“과찬이십니다, 대표님.”
겸손을 차리는 이석호와 달리, 오채일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과찬이라니. 사실을 말하는 거야. 나 혼자서 어떻게 LC를 지금 이 자리까지 키웠겠어? 회사 이전에 사람이 있는 법이야. 사람이 없으면, 회사도 없지.”
“그렇죠.”
벌써 3잔째.
빠른 속도로 소주잔을 비워내는 이석호를 보면서 오채일은 혀를 여러 번 찼다.
“아직 안주도 안 나왔는데. 뭘 그렇게 급하게 마셔. 혹시 마누라하고 싸우기라도 했어? 그래서 이 시간에 날 보자고 한 거야?”
“차라리 그랬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한번 욕먹고, 무릎 꿇고 사과하고 끝나면 될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저지른 부정행위는 그거 가지고는 도저히 책임을 질 수 없는 무거운 일이었다.
모둠전이 나오는 타이밍까지 이석호는 기어코 혼자서 소주 한 병을 전부 비워냈다.
오채일 대표가 김치전 하나를 직접 이석호 트레이너의 앞 접시에 올려놨다.
“먹으면서 마셔. 그러다가 내일 회사 출근 못 하겠다고 전화하지 말고.”
“……대표님.”
“왜.”
오채일도 이석호의 술 템포를 맞춰주느라 본의 아니게 달리고 말았다.
살짝 취기가 올라올 때쯤.
이석호가 예전에 오채일 대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이번에 SSS에 참가했던 연습생들…… 대표님이 언젠가 데뷔 무대 만들어주고 싶다고 그러셨던 거, 기억하시나요?”
“뭐…… 그런 말을 하긴 했었지.”
32명의 연습생 모두가 SSS에 출연하면서 데뷔라는 목표를 향해 밤새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오채일 대표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노력하는 자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고.
비록 모두가 다 승자가 될 수 없는 시스템이지만, 나중에라도 오채일 대표는 열심히 노력한 그녀들을 위해서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연습생들의 의욕과 열정이 오채일 대표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 약속, 꼭 지켜주시면 안 될까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왜냐하면…… 제가 LC 엔터테인먼트에서 퇴사하기 전에 대표님께 간곡히 드리는 마지막 부탁이라서요.”
“뭐어?”
오채일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퇴사.
일전에 이석호 트레이너는 단 한 번도 퇴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채일은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업무 강도가 너무 높았나? 하긴. 티비 프로그램이라는 게 원래 그렇거든. 미안해. 그래도 이제 딱 한 화밖에 안 남았잖아? 조금만 참아줘.”
“아니오, 대표님.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면?”
“…….”
이석호 트레이너는 오랜 고민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몹쓸 짓을 했거든요.”
“몹쓸 짓?”
“죄송합니다. 이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앉기 전에, 권이연은 이석호 트레이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웬만하면 오채일 대표한테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리지 않는 게 좋다고.
이건 권이연이 그간의 인생 경험을 통해 생각해 낸 조치였다.
오채일의 성격상, 이 일을 알게 되면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두게 될 것이다.
자신이 왜 이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왜 말리지 못했을까 하면서 말이다.
오채일 대표에게 마음의 족쇄를 주고 싶지 않다면,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는 권이연의 충고가 이석호의 뇌리에 박혔다.
오채일이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얼마나 몹쓸 짓을 저질렀기에 퇴사까지 하겠다는 거야.”
오채일은 자신이 아무리 닦달한다고 한들,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듣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석호도 나름 고집이 센 남자였기 때문이다.
“하…….”
오채일 대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네 표정을 보니까,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해도 소용없을 거 같은데.”
그 말이 맞음을 알리듯 이석호는 무거운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대표님. 아니, 선배님. 애들한테 어떻게든 꼭 기회를 주세요. 다들 정말 열심히 노력했으니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이석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다.
이번에는 오채일 대표가 연거푸 술잔을 비워냈다.
탁!
거칠게 소주잔을 내려놓은 오채일 대표가 조건을 걸었다.
“대신에 네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나중에라도 꼭 나한테 말해줘라. 알겠냐.”
“예, 선배님……!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됐고. 술이나 마시자.”
처음에는 가볍게 마시고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이석호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이상, 오채일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 * *
하니엘 팀의 첫 번째 곡인 ‘첫사랑’ 첫 안무 연습의 날이 밝았다.
LC 엔터테인먼트 회사 근처에 위치한 헬스장에서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푼 이연은 안무 연습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아의 속사포 질문을 받게 되었다.
“언니, 언니! 그 소식 들었어? 응?”
“무슨 소식.”
“그러니까 어떤 거냐 하면……!”
비아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안무 연습실의 문이 열렸다.
원래는 이석호 트레이너가 와서 하니엘 팀의 안무를 봐주기로 했으나.
전혀 다른 사람이 왔다.
“안녕, 얘들아. 마침 다 모여 있었네?”
이석호 트레이너와 마찬가지로 LC 엔터테인먼트 내에서 댄스 트레이너를 맡고 있는 황유성이 대신 그녀들 앞에 섰다.
“‘첫사랑’ 안무 시안은 다들 봤지? 수정할 동작이 몇 개 있는데, 너희가 먼저 봤던 거에 약간만 고칠 예정이니까 익히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시간 없으니까 바로 시작할까?”
“저기…….”
리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어, 리샤야. 왜? 궁금한 거라도 있어?”
“오늘 석호 쌤이 와서 안무 봐주시기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연습생들의 이목이 리샤에게 향했다.
그녀들도 뭔가를 미리 들은 듯한 눈치였다.
황유성 트레이너가 ‘그게 말이지’라고 말하면서 머리를 잠깐 긁적였다.
“석호 선배님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회사를 관두기로 하셨거든. 그래서 앞으로 연습생들 안무 봐주고 하는 것은 나하고 다른 트레이너 쌤들이 나눠서 담당할 거야. 인수인계는 충분히 다 했으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되고.”
퇴사 소식에 연습생들은 역시나 하는 표정이 되었다.
비아가 이연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것 역시 이석호 트레이너의 퇴사 여부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던 거였다.
당연히 이연도 오늘 이곳에 와서 처음 들었다.
그러나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석호 트레이너의 성격이라면, 내가 그냥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고 마음 놓고 편히 있을 그런 사람은 아니지.’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지려고 할 거 같긴 했다.
그게 퇴사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이미 한번 크게 부정행위를 저질렀는데, 앞으로 또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이석호 트레이너도 이런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는 아예 지금의 지위를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나름의 속죄를 하려고 그러는 거겠지.’
그 와중에 이번에는 우미가 황 트레이너에게 추가로 물었다.
“그러면 파이널 무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트레이너님이 심사 위원이시잖아요.”
“방송은 그대로 출연하실 거야.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날 무대를 처음 본 사람이 느낀 감정을 가지고 평가를 하겠다고 그러시더라.”
시청자들의 실시간 투표와 심사 위원들의 평가를 합해서 데뷔조를 정하는 과정이다 보니 이석호 트레이너의 출연 여부가 굉장히 중요했다.
그래도 SSS 심사 위원 자리까지 내려놓진 않아서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이석호 트레이너가 더 이상 편파 판정을 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 말이다.
그러나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연습생들 입장에선 그의 갑작스러운 퇴사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러실까, 석호 쌤.”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 아니야?”
“회사 측 일은 아닌 거 같고. 아무래도 개인 사정 때문에 그러시는 거 같은데?”
“괜히 걱정되네.”
마음이 우왕좌왕하는 멤버들을 향해 이연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우리 할 거 하면 되는 거야. 다들 트레이너님 말씀에 집중하자.”
그녀들에게 있어서 이석호 트레이너의 향후 거취보단 데뷔가 더 중요하다.
그걸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