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37화 (37/299)

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37화

제10화. 낯선 접촉(5)

설마 장고윤이 SSS 팬미팅 현장까지 따라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말했죠? 저, 이연 씨에 대해서 진심이라고.”

“…….”

다시 선글라스를 내리면서 얼굴을 가린 장고윤은 사인지를 조용히 내밀면서 이연을 응시했다.

이연은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사인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필요하신 메시지 있나요? 뭐라고 적어드릴까요?”

“먼 나라에 있는 그녀가 내게 와주기를…… 이라고 적어주실래요?”

장고윤이 말하는 ‘그녀’가 누구인지 이연은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다.

먼 나라라는 건 LC 엔터테인먼트일 확률이 매우 크다.

슥슥슥.

장고윤이 원하는 문구를 그대로 적어준 이연은 혹시 몰라서 추가로 물었다.

“성함도 적어드릴까요?”

“장고윤이라고 적어주세요.”

“그대로 적어드려도 되나요?”

“네. 멀리까지 이연 씨 사인받으러 왔는데. 제 정체 숨기겠다고 일부러 다른 이름으로 받으면 너무 아깝잖아요? 그리고 여기 관계자들이 사인지에 적힌 이름까지 검수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이 맞다.

SSS 제작진이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팬미팅 현장을 관리하려고 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사인을 다 받자마자 장고윤은 이연에게 다시 한번 눈웃음을 보냈다.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

이연의 사인만 받고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장고윤.

이연의 바로 옆에 앉은 앨리샤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저 사람도 네 지인이야?”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고민 끝에 이연이 들려준 대답은 이러했다.

“어, 일단은.”

* * *

팬미팅 행사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온 이연은 피곤한 몸을 침대 위에 눕힌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연락을 안 하고 있으면, 장고윤이 어떻게든 이연에게 다시 접촉해 올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팬미팅 현장까지 찾아올 줄이야.’

이연을 향한 집착이 그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대한민국 연예계는 넓은 듯하면서도 상당히 좁다.

특히나 이름 있는 연예 기획사의 캐스팅 매니저라면, LC 엔터테인먼트나 SSS 제작진 중에서도 그녀의 이름과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장고윤도 물론 이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행동에 임했다는 사실이 대단했다.

‘아주 화끈한 여자로군.’

나름 마음에 들었다.

서랍에 손을 뻗어 그녀가 건네준 명함을 다시 꺼내 든 이연은 그것을 한동안 만지작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마트폰으로 장고윤의 번호를 입력했다.

-여보세요. 장고윤입니다.

“저, 권이연입니다.”

이연의 목소리와 이름을 듣자마자 장고윤의 톤이 한 단계 올라갔다.

-어머, 이연 씨. 드디어 연락 주셨네요. 팬미팅 현장까지 찾아간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 말에 이연은 짧게 웃을 뿐이었다.

-시간하고 날짜, 장소는 이연 씨에게 맞출게요. 언제가 좋으세요?

이연이 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이유를 아직 듣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장고윤은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녀에게 만났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전화를 건 게 맞았기에 이연은 딱히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시간은 점심때가 좋을 거 같네요. 날짜는 내일로요. 왜냐하면 내일 저녁부터 바로 이은솔 선배님하고 연습 들어가기로 했거든요.”

-음방 미션 말씀하시는 거죠?

“네.”

장고윤과 만난 뒤, 바로 회사로 향하면 될 듯싶었다.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남았다.

-어디서 볼까요? 이연 씨 편하게 집 근처에서 보는 게 좋겠죠? 제가 차 끌고 가면 되니까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연의 머릿속에는 이미 계획이 다 있었다.

“렛플 엔터테인먼트에서 보도록 하죠.”

* * *

한창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마스트와 안경, 그리고 모자까지 깊게 눌러 쓴 이연은 마법으로 체온을 내리면서 더위를 식혔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서 10분 정도 걸었을 때.

거대한 빌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가 렛플 엔터테인먼트인가 보네.’

입구 근처에 보이는 황금색 금붕어 조각상 두 개.

이것만 보고 찾아오면 된다고 장고윤이 알려줬다.

그녀의 말대로, 두 마리의 황금색 금붕어가 역동적인 동작으로 서 있었다.

심지어 크기도 크다.

조각상을 눈으로 한 차례 빠르게 훑은 이연은 걸음을 회사 안쪽으로 재촉했다.

연예 기획사이다 보니 회사로 들어가는 단계부터 철저한 검증이 필요했다.

“어떻게 오셨을까요?”

경비원의 물음에 이연은 장고윤이 건네준 명함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장 실장님 만나러 왔습니다.”

“7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근데…….”

경비원은 이연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차라리 이게 낫다.

이연이 렛플 엔터테인먼트와 몰래 접선을 했다는 건 가급적 비밀로 해야 하니까 말이다.

이연은 빠른 속도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혼자 탄 엘리베이터.

7층에 도착하자,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동시에 바로 앞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장고윤이 이연에게 싱긋 미소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사람들에게 안 들키고 잘 오셨죠?”

“네. 덕분에요.”

장고윤은 오늘, 이연과 만나기로 한 사실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딱 한 명만 빼고 말이다.

미팅룸으로 들어서자, 중년의 남성이 이연에게 명함을 건네면서 말했다.

“윤기성 팀장입니다. 오늘 이연 씨 오신다고 들어서 저도 같이 자리하게 되었는데…… 괜찮으시죠?”

“네. 상관없어요. 다른 직원들에게만 비밀로 해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여기 앉으시죠.”

이연의 맞은편에 장고윤과 윤기성, 두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안경과 마스크, 모자를 벗은 이연.

그녀의 모습에 윤기성은 감탄을 삼켰다.

“실물이 훨씬 예쁘시네요! 카메라가 이연 씨의 아름다움을 다 못 담아내나 봅니다. 좋은 장비 좀 쓰지…… 쯧쯧!”

“팀장님. 이연 씨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말은 속으로만 담아두세요.”

“어, 어흠! 죄송합니다, 이연 씨. 제가 너무 주책이었네요.”

이연은 괜찮다면서 윤 팀장의 사과를 받아줬다.

연예계에 10년 넘게 종사하면서 수많은 여배우들, 여성 아이돌들을 봐 왔던 윤기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연의 미모는 가히 톱급이라 할 수 있었다.

장고윤이 윤 팀장에게 잔소리를 했지만, 그의 반응을 보면서 내심 속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윤 팀장이 제정신을 차리고서 말을 이어갔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계약 조건이겠죠?”

“예, 아무래도요.”

“방송을 보니까 이연 씨는 뭐라고 해야 할까. 실속파이신 거 같더라고요.”

좋은 말로 실속파지,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속물이었다.

하기야. 사전 인터뷰 단계에서부터 부상으로 주어지는 차의 가격이 얼마인지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윤 팀장이 말한 부분은 티비에 방영되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SSS 공식 채널에만 올라가 있는 장면이다.

웬만한 팬심이 아니면, 일반 사람들은 대개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챙겨보지 않는다.

윤 팀장도 장고윤처럼 SSS에 매우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희도 이연 씨나 절혜 씨 같은 연습생이 있었더라면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없이 그냥 무조건 데뷔시켰을 텐데 말이죠. 아쉽습니다.”

장고윤이 다시 한번 헛소리를 하는 윤 팀장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깊숙하게 쿡 찔렀다.

“팀장님. 자꾸 이야기 다른 곳으로 새어가게 만들지 마세요.”

“알았다니까. 그만 좀 찔러. 나, 옆구리 약하다고.”

“약한 거 알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만약에 옆에서 장고윤이 윤 팀장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온종일 잡담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냈을지도 몰랐다.

계약 조건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윤 팀장이 이연에게 물었다.

“혹시 생각하는 조건이 있을까요?”

LC 엔터테인먼트 계약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안다면, 이들은 그보다 더 높게 제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타 업체의 계약 사항을 외부로 발설하는 건 위반 행위다.

그래서 윤기성은 간접적으로 이렇게 이연에게 물어본 거였다.

이연의 대답은 간단했다.

“글쎄요.”

선제시는 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윤 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그가 슬쩍 장고윤에게 눈짓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장고윤은 이연에게 놀라운 조건을 제시했다.

“이연 씨가 원하는 대로 조율해 드릴게요.”

“제 마음대로 해주시겠다는 건가요?”

“네. 대신에 계약 기간은 좀 길게 잡을 수도 있어요.”

연습생을 상대로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이연이 요즘 화제성이 높은 인물이라는 건 이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인기가 얼마나 갈지는 모른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대중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스타가 나올 수는 있지만, 롱런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윤 팀장과 장고윤은 이연에게 거는 기대가 굉장히 큰 모양인지 다시 한번 자신들이 제시할 조건을 강조해 말했다.

“소위 말해서 백지 수표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되겠군요.”

“이연 씨가 편한 대로 다 맞춰 드릴 테니까 저희와의 계약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연의 입꼬리가 위로 향했다.

이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연의 목적이 달성된 거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대답은.

“죄송합니다.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죠.”

거절이었다.

* * *

다음 스케줄로 인해 먼저 회사를 나선 이연.

한편, 윤 팀장은 장고윤과 함께 야외 휴게실에 나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당연히 이연 씨가 우리 조건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네.”

“그러게요.”

장고윤도 이건 예상 못 했었다.

후우.

긴 담배 연기를 뿜어낸 윤 팀장이 방금의 일을 다시금 머릿속으로 리플레이시키면서 물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이연 씨가 우리 회사를 별로 안 좋아하나?”

“아니요.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던 걸로 보였어요.”

“장 실장은 뭐 때문이었는지 이유를 알 거 같아?”

“대충은요.”

계약 조건을 듣자마자, 이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장고윤은 권이연이 지었던 그 미소가 미팅이 진행되는 내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도심 풍경을 내려다보던 장고윤이 천천히 자신의 추측을 읊었다.

“저희가 당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당했다고? 뭐가?”

“이연 씨는 연예계에서 자신의 몸값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어서 일부러 저희를 찾아왔던 거 같아요. 그래야 나중에 LC 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하든, 뭘 하든. 그럴 때에 어느 정도 기준을 삼거나 하나의 거래 수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저쪽은 이렇게 불렀는데. LC는 이것밖에 못 부르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윤 팀장은 이 가설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아직 연습생밖에 안 되는 병아리 아가씨가 그런 줄타기 방식을 어떻게 알겠어?”

“왜요. 연예계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는데. 있을 수 있죠.”

만약에 정말로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이연 씨, 저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인물이 되어 있을 거예요.”

재능에 사회적인 눈치까지 보유하고 있는 완벽에 가까운 이연.

비록 타 업체에 속해 있지만, 장고윤은 그녀의 성장이 기대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