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18화
제6화. 팀플레이(5)
넓은 안무 연습실은 평소와 달리 카메라와 조명 장치, 그리고 다수의 스태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카메라 앞에는 총 32명의 연습생이 한자리에 모였다.
LC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일 넓은 안무 연습실을 촬영 장소로 잡긴 했지만, 제작진에 많은 연습생까지 있다 보니 공간이 마냥 넓게 느껴지진 않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연습생들 앞에 SSS 심사 위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보자마자 연습생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권이연도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다른 연습생들이 하는 것처럼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오채일 대표가 딱딱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인지 손을 흔들면서 일부러 환한 미소를 보냈다.
“다들 연습 잘했지?”
“예!”
“그래. 트레이너들한테도 우리 연습생들, 요즘 밤새워 가면서 연습 많이 하고 있다고 들었어. 아무쪼록 좋은 결과 있도록 다 같이 힘내보자. 힘‘밖’보진 말고. 하하하!”
“…….”
“…….”
“…….”
부장님 개그를 넘어선 대표님 개그에 연습생들은 순간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몰라 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때, 이은솔이 갑자기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힘‘내’도 아니고 힘‘밖’이라니요! 하여튼 우리 대표님, 유머 감각이 너무 좋으신 거 아닙니까? 너무 그러진 마세요. 그러다가 대한민국 개그맨들 일자리 없어집니다.”
이은솔의 오버 리액션에 오 대표의 입꼬리가 위로 향했다.
연습생들도 이은솔을 따라 억지로 웃었다.
물론 권이연은 웃지 않았다.
PD는 오 대표 모르게 스태프들한테 손으로 가위 모양을 보였다.
이건 편집하라는 뜻이었다.
재미없는 장면은 건너뛰고.
“바로 중간 점검 시작해 볼까요.”
민주린이 적절하게 커트를 하면서 진행에 나섰다.
첫 번째부터 차례대로 나와서 무대를 펼치기 시작했다.
다들 원곡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무대를 펼쳤다.
준비하는 기간이 짧은 데다가 원곡을 좋아하는 팬들의 팬심까지 사로잡고 싶다는 목표 의식이 느껴졌다.
진절혜가 속한 팀 역시 이와 비슷한 전략으로 갔다.
오 대표와 이은솔은 대부분 ‘열심히 잘했네요’라는 느낌으로 연습생들을 잘 달래주려 했다.
하지만 민주린은 냉철했다.
“누구의 무대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여러분들의 오리지널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아요.”
오늘도 그녀의 날카로운 일침은 계속 이어졌다.
“단순히 원곡 무대를 보고 따라 하는 거라면, 굳이 여러분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아마추어 댄서들이 훨씬 더 잘 따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안무 창작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그대로 따라 하는 게 제일 자신 있어서 저희에게 이런 무대를 보여준 건가요? 개인적으로 만족할 만한 무대가 하나도 없네요.”
쏟아지는 독설에 눈물을 보이는 연습생도 몇몇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팀의 차례가 다가왔다.
권이연과 양우미, 이비아, 그리고 앨리샤.
권이연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여태껏 민주린에게 호평을 받았던 연습생 팀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들이 출 곡은 민주린 심사 위원이 속했던 그룹 밀크티의 노래다.
엄청난 혹평이 예상되는 가운데에, 권이연이 중앙에 섰다.
그녀를 중심으로 좌측에 앨리샤가, 그리고 우측에 양우미와 이비아가 나란히 섰다.
그녀들의 대열에 연습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쟤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저게 스타트 포메이션이라고?”
“대열이 이상한 거 같은데? 잘못 선 거 아니야?”
오채일과 이은솔, 그리고 민주린도 당황했다.
그냥 일렬로 쭉 서기만 하는 대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원곡 버전도 이런 대형은 아니었다.
곡이 시작되기 전에 민주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본인이 어디에 서야 되는지도 모르는 건가요?”
팀원들이 권이연에게 시선을 모았다.
팀 리더인 권이연이 대표로 답했다.
“아니요. 이게 저희 포메이션입니다.”
“……네?”
민주린은 당황해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굉장히 많아 보이지만.
이번에는 이은솔이 먼저 나섰다.
“일단 연습 무대부터 본 다음에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선배님?”
“은솔 씨. 왠지 이 팀에만 열심히 실드를 쳐주려고 하는 거 같은데.”
“그, 그럴 리가요! 저는 모든 팀을 다 똑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래?”
이은솔이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일단은 무대부터 보고.
시작하기도 전에 포메이션이 어떻고, 노래가 어떻고, 안무가 어떻고를 논할 수는 없다.
민주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주를 듣자마자 심사 위원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거, 믹싱 단계까지 끝낸 거예요? 벌써?”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권이연 연습생이 직접 다 했습니다.”
연습생들은 미션에만 집중하고. 편곡이나 개사, 믹싱, 마스터링 등은 연습생들이 의견을 주면 거기에 맞춰서 해주는 전문 팀이 따로 포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권이연은 본인이 직접 다 작업하는 쪽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웬만한 프로들보다 빠르게 작업하는 데다가 결과물의 퀄리티 또한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이렇다 보니 제작진에서도 허락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연습생들에게도 기회는 언제든 열려 있다.
본인이 해보겠다고 하면 말리진 않는다.
단지 권이연처럼 자신 있게 나서는 연습생이 없을 뿐이지.
전주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권이연과 팀원들.
그러나 안무 대형만큼 곡 상태도 이상했다.
연습생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발라드 느낌이 짙은데?”
“원곡은 이렇게 느리지 않았잖아.”
“설마 진짜로 발라드로 편곡한 거야?”
보컬에 댄스 퍼포먼스까지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줘야 하는 무대 위에서 하필이면 발라드를 택한 그녀들.
곡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심사 위원들의 표정은 가관이 되었다.
그러나 장르 문제와는 별개로.
“노래는…… 잘 부르는데요? 특히 권이연 연습생이요.”
이은솔이 오 대표와 민주린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 대표는 공감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단, 민주린은 그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권이연의 보컬 능력은 이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린은 그녀에게 이보다 더한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것을 과연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이건 권이연의 역량에 달렸다.
팀 리더답게 권이연의 청아한 보컬이 팀원들을 이끌었다.
도입부를 지나 후렴구에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곡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강렬한 일렉 기타의 사운드.
“이거…….”
“락 발라드잖아!”
평범한 발라드가 아니었다.
거친 사운드가 안무 연습실 전체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이에 따라 부드럽고 단아하게만 느껴졌던 권이연의 창법도 달라졌다.
-나를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보여줘, 너의 사랑을.
Last chance-!
시원시원하게 내뻗는 고음의 향연에 심사 위원, 연습생, 그리고 제작진 모두가 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
1절 후렴부가 끝나고 간주 부분이 시작되자, 이들은 스탠딩 마이크를 치워 버렸다.
빠르게 대열을 갖춘 네 명의 연습생들이 여전사가 된 것처럼 박력 있는 안무를 선보였다.
간주 사이에 댄스 퍼포먼스를 보여주자는 것이 권이연이 준비한 아이디어였다.
이렇게 하면 보컬, 댄스, 그리고 반전을 통해서 보여주는 화려한 퍼포먼스까지.
모든 것을 갖추게 된다.
연습 무대가 끝나자, 심사 위원들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무대가 너무 별로여서가 아니었다.
상상 그 이상을 본 탓에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서 나오는 액션이었다.
오 대표가 먼저 말문을 뗐다.
“어…… 그러니까 그게…….”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건 이은솔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대신해서 민주린이 권이연을 지목했다.
“이거, 편곡한 거 권이연 연습생이죠?”
“네.”
“‘라스트 찬스’는 댄스곡이잖아요. 근데 어째서 ‘발라드’로…… 아니지. ‘락 발라드’로 편곡할 생각을 했나요?”
“민주린 선배님께서 원곡을 발라드로 부르고 싶어 했다는 걸 알게 되어서입니다.”
연습생들의 술렁이는 소리가 커졌다.
이때, 민주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단순히 심사 위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무대를 이렇게 바꾼 건가요?”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물론 무대를 평가하는 건 심사 위원들이다.
하지만 모든 무대를 다 심사 위원들의 역량에 따라 평가하고 결정하는 게 아니다.
당장 팀 미션만 하더라도 관중들의 평가가 반영될 예정이다.
단지 심사 위원들한테 잘 보이기 위한 무대는 필요치 않다.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진절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권이연도 끝이네.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권이연이 보고 있는 건 당장 눈앞의 수가 아니었다.
“선배님께서는 이 곡이 발라드로 나와야 할 곡이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거죠?”
“네?”
당돌한 그녀의 말에 오히려 민주린이 당황했다.
“편곡을 하면서 느꼈던 겁니다만, 코드 하나하나가 댄스보다는 발라드에 더 어울리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곡이 만약에 발라드로 나왔더라면, 대중들에게 이전보다 더 큰 호응을 이끌어냈을 거라는 사실을요.”
“…….”
단순히 심사 위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장르를 변경한 게 아니다.
곡이 발라드 쪽과 더 잘 어울려 보여서.
그래서 권이연은 편곡의 방향성을 결정했다.
오 대표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밀크티의 전반적인 그룹 활동 내역을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권이연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우리 연습생이 정확하게 꿰뚫어 본 거 같은데. 주린이 생각은 어때?”
굳게 닫혀 있던 민주린의 입이 어렵사리 열렸다.
“본 무대, 기대하고 있을게요. 이대로만 계속해 주시면 좋겠어요.”
연습 무대 평가 중에 처음으로 호평이 나온 순간이다.
* * *
드디어 SSS 대망의 팀 미션 무대가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는 순간.
공개 녹화인 대신에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제작진들은 사람들에게 절대로 오늘 무대의 내용을 발설하지 않을 것을 약속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현장을 찾은 주형운과 양인박은 이런 스태프를 향해 힘 있는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하고 답했다.
두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권민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해라, 새끼들아.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쪽팔려 죽겠네.”
“야, 권민준. 이연 누나 응원하러 왔는데 쪽팔릴 게 뭐 있어. 다른 연습생들 응원에 묻히지 않게끔 우리 한 명 한 명이 마치 백 명인 것처럼 열심히 응원해도 모자를 판국에. 안 그러냐, 인박아?”
“그렇지. 민준이 너, 응원 도구는 제대로 챙겼지? 무대 시작하자마자 바로 꺼내라. 알겠지?”
“어휴, 이 녀석들 진짜…….”
그냥 혼자 올 걸 그랬나.
권민주는 뒤늦게 밀려오는 후회를 다시 한번 한숨으로 표출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