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25화
525화. 전설로 남을(14)
“그냥 솔직하게 말할 거야. 미워하셔도 어쩔 수 없어. 팬들은 소중해. 정말 소중하지만, 소영이는 더 소중해.”
이성진은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팬들이 들었으면 섭섭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강한결도 그걸 문제 삼지는 않았다. 팬이 정말로 감사하고 소중한 존재인 건 맞지만,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라 생각하는 아내와는 분명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여기에는 이성진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족을 원하는 친구.
진짜 피가 이어진 가족을 원하는 게 이성진이다.
그래서 이성진에게 애정 결핍도 있었다. 요즘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예전에 같이 숙소 생활할 땐 가끔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성진아. 혹시 우정혁 선생님한테는 말했어? 만약 문제 심각해지면, 가장 피해 보실 분인데.”
“했지. 선배님은 찬성이래. 너무 이르지만, 그래도 책임지는 게 맞다고 말씀하셨어. 그로 인해 생길 문제는 내가 헤쳐나가야 한다고 하셨고. 그리고 만약 결혼식 올리면, 사회도 봐준다고 그러셨어.”
“아 정말?”
“응.”
역시, 우정혁 선배님이다.
짧게 설명했지만 분명 깊게 생각했을 거고, 길게 얘기했을 거다. 아끼는 후배의 앞길을 생각해 주셨을 게 분명했다. 이성진이 그런 말을 안 했다고 해도, 그랬을 거란 믿음을 주는 사람이 우정혁이다.
“회사에도 아직 얘기 안 했지?”
“응. 너희한테 말하고, 그리고 하려고.”
“어휴, 바빠지겠네. 그럼.”
“…….”
뭐 원래도 바쁘다.
지영 때문에 지금도 비즈 엔터는 하루하루가 매우 바쁘다. 보도 자료, 밀려오는 전화, 거기에 날아드는 시나리오나 스크립트까지, 정시퇴근하는 분이 아무도 없고 다들 매일매일 특근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임은진이 이번 달 역대급 월급 나오겠다고 앓는 소리를 했을 정도였다.
“그럼 팬들만 생각하면 되겠네. 솔직하게 얘기한다고 했지?”
“응. 내가 변명 늘어놓고 하면, 그게 거짓말이잖아. 그리고 거짓말은 기만이고. 나 그러기 싫어.”
“인정. 거짓말이나 변명은 안 돼. 네 말대로 그건 기만이 맞으니까. 그래도 너는 분명히 팬분들에게 실망을 안겨 드릴 거야. 그래서 실망한 분들이 만약 네가 하는 방송 하차해라, 막 그러면 어쩔 생각이야?”
“그것 때문엔 안 할 거야. 그런데 제작진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지.”
“하긴, 보통 그런 압박은 제작진이 주니까.”
하지만 지영은 안다.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더 런닝에서 이성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하다. 그 예능의 중심이자, 전체라 할 수 있는 건 우정혁이 맞지만, 우정혁도 혼자서 이끌고 가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 혼자 프로그램을 이끌고 갈 수 있다면, 혼자 했을 거다. 근데 그러지 않고 팀을 만든 건, 다 같이 하는 것 자체가 포맷이라는 얘기다.
그런 포맷에서 이제 이성진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이제는 완전히 프로그램에 녹아들었고, 맡은 역할도 상당해서 이성진을 빼놓고 가는 건 프로그램의 팔 하나를 자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우정혁이 절대 그렇게 두고 보지 않을 거다.
‘애초에 우정혁 선배님이 식장에 와서 사회를 봐주신다는 것 자체가, 지원해 주겠다는 거지.’
이 시대에 임신은 민감한 문제다.
특히 어린 나이의 남자나 여자에게는 더더욱 민감하다. 둘이 잘 산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문란함을 문제 삼는다. 성인이지만, 스물둘은 그냥 애로 보는 시선이 이 사회에는 아직 만연하다.
혼전임신=잠자리=문란함.
이게 문제라는 거다.
이해받기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이성진은 강행 돌파를 택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거로.
“그럼 그 책임 또한 달게 받을 거야?”
여태 잠자코 있던 지영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성진의 시선이 지영에게 넘어왔다.
“당연하지. 근데 그건 좀 슬프다.”
“그럴 만한 일을 했잖아. 쉽게 넘어갈 수는 없을 거야. 이건 사회적, 문화적으로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물론 그렇다고 성진이 네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야. 난 내 친구를 존중해.”
“……고마워.”
이성진의 대답에 지영은 강한결을 보며 말했다.
“사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지 않아? 성진이가 거짓으로 말할 친구도 아니고. 혼 좀 날 거고. 실망하는 분들도 나올 거고. 서운해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일은 벌어졌으니까.”
“없지.”
강한결은 지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이건 통보다. 뭔가를 의논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이성진은 이미 결정을 전부 내린 상태였다. 그런데 말을 꺼낸 건, 지지받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모두가 지영의 마음 같진 않았다.
“그러게, 우리가 할 것도 없는데 뭘 모아놓고 이렇게 얘기해? 그냥 톡으로 말하면 될걸.”
조용히 있던 임효중의 말에 이성진은 어? 하는 표정이 됐다. 임효중의 표정은 냉랭했다. 서운한 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지영도 서운한 게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중요한 일이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그만큼. 어려도 모두가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거기에 그냥 일반 결혼도 아니고 혼전 임신으로 결혼하는 건데, 전부 결정 내리고 결국엔 통보만 하는 거다. 이걸 서운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임효중은 분명 짜증 났다.
그리고 그건 이성진이 아 왜 그래? 하고 애교를 떨어도 절대로 풀리지 않을 레벨이었다. 그래서 이성진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미안, 정말 미안, 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임효중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와, 회귀 후 첫 트러블이 이렇게 생기는구나.’
이성진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지영은 이거로 한 수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영도 일찍 결혼할 생각이었다. 친구들은 그런 마음을 대충 눈치는 채고 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얘기한 건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답은 간단했다. 결혼 준비하기 전에, 먼저 말하면 된다.
“둘은 나중에 따로 풀자. 그리고 솔직히 놀 기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왕 온 거, 시간은 보내고 가자.”
강한결은 얘기를 끝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이거로 더 이상 얘기는 그만하자는 뜻이었다.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는 파장.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임효중과 이성진의 새로운 자리가 시작됐고. 지영을 비롯한 친구들은 얼른 자리를 피해줬다.
슬쩍 나와서 얘기를 시작한 두 사람을 보던 황석이 말했다.
“잘 풀었으면 좋겠다.”
“결국엔 효중이가 져줄걸? 지금은 그냥 조금 삐쳐서 그런 거고.”
누구보다 이성진을 챙긴 게 임효중이었다. 이성진이 힘들 때마다 옆에서, 조금 과장되게 얘기하면 지극정성으로 챙겼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일을 자기에게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난 것이다. 지영은 그런 임효중을 이해했다. 자기도 서운하긴 했다. 아마 말은 안 해도 강한결이나 황석도 좀 서운한 마음이 있을 거다.
“잘 풀 거야. 그냥 지켜보자고.”
강한결의 말에 지영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동안 또, 시끄럽겠구나란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오래갔다. 1시간이 넘도록 길게 갔다. 하지만 결국 슬슬 풀린 것 같은 시점에 시작된 이성진의 요망한 애교에, 임효중은 혀를 차며 웃고 말았다. 그거로 게임 끝. 본격적으로 휴가를 즐기기 시작됐다.
여러 가지 의미로, 역대급이었던 휴가였다.
* * *
휴가는 잘 끝났다.
이곳저곳 잘 돌아다녔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고, 간만에 봉인 해제하고 술을 마시며 속마음도 마음껏 나눴다. 거기서 정말 오랜만에 규칙 하나를 세웠다. 결혼은 꼭 말해주기. 당연히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영은 짐을 풀고, 한숨 잤다.
여행은 피곤하다.
정신적으로는 즐거워도, 몸은 피곤하다. 그래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지영은 문을 열고 나가 어머니를 도와 저녁을 준비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메뉴 구성. 고기도 있지만, 나물도 많았다. 지영은 저녁을 먹으면서, 이성진에 친 사고를 말했다.
“어머니, 성진이가 저보다 먼저 결혼할 것 같아요.”
“어머? 그러니?”
“네, 올해 안에 식 올릴 것 같아요.”
“어, 올해? 그럼 혹시?”
“네, 성진이 아빠 됐어요.”
“와…….”
어머니는 놀라서 잠시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러곤 걱정스러운 기색이 되셨다.
“괜찮겠니? 성진이 방송 열심히 하는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에요. 그런데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어요. 거짓말이나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고.”
“에고, 성진이 힘들겠구나. 그런데 소영이? 그 애도 낳기로 한 거래?”
“네. 벌써 12주래요.”
“어머어머……. 어머님 허락은?”
이성진의 가족사도 알고, 정소영의 가족사도 얼추는 알고 계신다. 어머니는 최소한 황금세대에 관한 기사는 챙겨 보신다. 그래서 정소영에 대해서도 조금은 안다. 시합 때 자주 보기도 하고.
“허락 맡았대요. 고맙다고 하셨다는데요?”
“그러니?”
“네. 소영이 힘들 때 성진이가 진짜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챙겼거든요. 그걸 소영이 어머니도 알고 계시고요. 제가 알기엔 주말에 시간 나면 소영이랑 어머니 면회도 자주 갔을 거예요.”
“그래, 잘됐다. 그렇게 어머니가 인정해주면 그래도 마음은 편하지.”
“그러니까요.”
“성진이가 가족에 대해, 그, 좀 그런 게 있지?”
어머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아요. 이건 제 생각인데, 아무래도 노리고 사고 친 게 아닌가 싶어요.”
“정말? 그래? 성진이가 그래?”
“아니요. 제 생각이요. 성진이 영악해요. 그리고 어머니도 알다시피 그런 사고를 정말 생각 없이 칠 애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성진이 똑똑하잖아.”
“네, 그리고 책임감도 강해요. 자기가 사고 치면, 우리한테도 잘못하면 피해가 올 수도 있는데 그걸 몰랐을 리가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된 걸 보면, 아마 분명히 노렸어요.”
“으그……. 소영이. 그래, 소영이는 뭐라니? 성진이 마음이 그렇다고 막 사고 친 거면, 소영이한테 상처 될 수도 있잖니.”
“음, 소영이가 부끄러워할까 봐 연락은 아직 안 했는데요. 아마 소영이도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소영이도 똑 부러져서, 자기도 마음이 없었으면 아이 낳겠다는 생각은 절대 안 했을걸요?”
“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야.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부담이 비슷해. 그런데 임신은 얘기가 달라. 소영이는 청춘을 다 날릴 수도 있어. 그건 생각과 현실이 너무 달라.”
“……네, 그렇죠.”
지영은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 말이 백번 맞았다. 결혼 자체가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부담이라면, 임신은 오롯이 여자에게 90% 이상 부담이 더 세다. 몸의 변화와 위험, 그 전부를 여자가 몸으로 직접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낳고 나서도 그렇다. 남편이 아무리 도와줘도 80% 이상은 여자의 몫이다. 아니, 어쩌면 90%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인 게, 직접 아이를 길러보지 않고는 절대로 육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임신, 육아는 90% 이상 여자에게 부담이 강하다. 이건 웬만한 사람은 다 인정했다.
“후, 그래도 성진이가 여유가 좀 있지?”
“네. 성진이 음, 넉넉할 거예요.”
아이를 키우는 건 사랑과 정성, 그리고 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게, 이성진이 그래도 여유가 된다는 점이다. 더 런닝의 몸값은 그리 세진 않지만, 종편에서 몸값은 제법 된다. 그리고 올림픽 상금과 연금도 있다. 하지만 진짜는 지영이 회귀 초에 알고 있던 미래의 정보로 주식과 코인에서 번 돈이다.
그 액수는 절대로 만만치가 않아서, 정신을 놓고 미쳐서 펑펑 써대지만 않으면 일 안 해도 충분히 평생 먹고살 정도다.
“그건 다행이다. 휴. 신혼집은 어디에 구할 거래니?”
“청주에 알아본대요. 그, 소영이 어머니도 청주에 계시고요. 촬영은 서울 숙소 쓰면 되고요.”
“그러니? 다행이다. 서울이 아니면 집값은 그렇게 안 비싸니까. 요즘 집값도 내려가는 추세니 아예 사라고 해라, 얘. 내 집과 월세, 전세는 안정감에서 차이가 확 나니까.”
“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더니 지영을 잠시 봤다. 뭔가 뜻이 담긴 눈빛이라서 지영은 좀 당황했다. 하지만 그 이상 말로는 꺼내지 않으셨다. 주말이 왔다. 지영은 오전 11시, 터미널로 나가 양유진을 픽업해 낚시터로 향했다.
1시간쯤 달려 도착해 텐트를 치고, 낚싯대도 세팅했다. 잘은 못하지만 둘이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래도 찌가 손가락 한 마디 남기고 물에 잠기게 할 수 있었다. 의자를 펴고 나란히 앉자, 양유진이 좋다, 너무 좋아요! 하고 즐거워했다. 지영은 양유진에게도 이성진의 일을 얘기했다.
잠자코 지영의 얘기를 들은 양유진은.
“아, 소영이 부럽…… 앗.”
화르륵.
저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에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