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08화
508화. 왕의 귀환(17)
패자 결승까지 끝났다.
남은 건 결승전. 꽤 많은 이변이 벌어져서, 결승전 대진은 관계자들이 예측한 것과는 꽤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유도인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바로, 심판 교체였다.
유례, 혹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심판이 도중에 교체당하는 일은 정말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현 국제심판위원장은 미국 국적이었는데, 미국과 일본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은 걸 생각하면, 대만 심판은 선을 넘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실제 시합 내용이 그랬다.
절반인 기술은 절반을 주지 않았고, 절반이 아닌 기술은 절반을 줬다. 대만이 친일 성향이 강한 나라고, 딱 봐도 어떤 사주를 받은 게 분명한 느낌이 나는 판정이었다. 그래서 연장전에 들어가기 전 심판 위원장이 나서서 제대로 된 판정을 내리라고 당부하자, 대만 심판은 오히려 역정을 냈다. 자기는 제대로 판정을 냈다며, 역으로 화를 냈고, 그 결과 심판 위원장은 자기의 권한으로 대만 심판을 내려버렸다.
그는 당연히 처음엔 거부했으나, 경기 중 심판의 권위가 절대적이라면, 심판 사이에서 위원장의 권위 또한 절대적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예정되어 있던 경기 결과가 변했다.
대만 심판이 작정하고 결승전으로 올리려고 했던 일본 선수는 떨어졌고, 모로코의 도칼리 하산이 결승에 올라갔다.
그런 소란 뒤에 시작된 결승전.
여자부 63부터 결승전이 시작됐을 땐 이미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관중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결승전.
열기가 굉장했다.
앞으로 넘어가기만 해도 커다란 함성이 울렸다. 커다란 경기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이런 열기를 피부로 받아들이는 선수들은, 최고의 경기를 보여줬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결승전.
결승전에 올라간 한국 선수는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강유진은 안다리 절반에 누르기 절반.
이성진은 1분 만에 업어치기 한판.
강지영은 4분 풀 게임. 절반 하나로 승리.
세계 선수권 첫날에 나온 압도적인 성적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성적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은 남자 60과 여자 63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여자부 헤비급 두 체급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황금세대에게는 밀리지만, 그 외의 체급에선 세계 최고임을 증명했다.
그렇게 첫날이 지나고, 이튿날. 2일 차 세계 선수권이 시작됐다.
지영은 시합의 여파로 몸이 욱신거렸지만, 당연히 스태프를 자처했다. 친구들은 내일 시합이 있음에도 스태프를 해줬다.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미안해야 하는 게 맞았다. 이성진이 임효중을 잡아줬고, 지영은 강한결을 잡아줬다. 황석은 장대호와 함께 몸을 풀기 시작했다.
부딪치기를 잠시 받아보니 오늘 강한결의 컨디션이 좋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컨디션 좋지? 하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다만, 몸을 강하게 풀도록 유도했다. 그러는 이유는 있었다. 강한결은 첫판이 고비였다.
베카우리 라샤.
도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면서, 강한결이 모든 대회 통틀어서 가장 고전했던 상대였다. 그런 베카우리 라샤는 작년 올림픽 이후 폼이 떨어졌다가, 근래 다시 기량을 되찾았다. 그런 베카우리 라샤와 첫판에 붙는 강한결이다. 컨디션이 좋고 나쁘고 떠나, 정말 조심해야 하는 상대였다.
몸이 완전히 풀려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천재와 첫판이라, 지영은 강한결의 호흡이 터지도록 독하게 굴렸다.
“훅! 후욱. 후…….”
다행이라면, 강한결도 호흡을 터뜨리는데 이골이 난 선수라는 점이었다. 30분간, 거의 쉬지도 않고 움직여 호흡을 터뜨렸다.
후우…….
길게 심호흡한 강한결이 도복을 고쳤다. 몸이 풀렸다는 신호였다. 지영은 얼른 수건과 이온 음료를 가져왔다. 강한결은 그걸 받아 땀을 닦고, 목을 축일 정도만 음료를 마시곤 다시 건네줬다.
몸을 푸는 시간이 지나고, 10분 뒤 경기가 시작됐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도 첫 게임은 임효중이었다. 오프닝 게임에 이상하게도 많이 서는 임효중인데, 오늘도 어김없이 오프닝 게임이었다.
“임효중 파이팅!”
“지면 죽는다!”
지영의 응원과 이성진의 응원에 경기장 끝에 서 있던 임효중이 고개를 돌려 둘을 보더니, 씩 웃었다. 여유와 자신감이 돋보이는 미소였다. 지영은 임효중이 도복 입은 모습을 보면, 정말 유도를 위해 태어난 인간이 아닌가 싶었다.
‘혹은, 유도의 신 자체든가.’
신이 좀 그렇다면, 적어도 화신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게, 임효중의 경기력을 보면 정말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한 체급에서 한 선수가 독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오노 쇼헤이가 그랬고, 한국의 이원희 선수가 그랬고, 그 이전으로 올라가도 독주했던 선수들은 꽤 있었다. 당장 현시대엔 황금세대가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임효중처럼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렇다고 임효중과 붙은 선수들이 절대 약한 건 아니었다. 미야모토 신지나 베카우리 라샤처럼 압도적인 천재성은 아니어도, 충분히 그에 준하는 선수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게 81체급이다. 오히려 이 체급은, 정상급 선수 간 격차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춘추 전국시대라 부르기도 했고, 일본의 전국시대, 중세 유럽의 혼란기와 비교하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그랬다.
임효중만…… 없었다면.
황금세대가 나오지 않은 대회에서 81은 정말로 박 터지는 게임이 1회전부터 결승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임효중만 나오면…… 그 판이 깨진다.
쿠웅!
잇폰!
지금처럼…….
경기 시작 30초 만에 허벅다리 한판이다. 물러나는 상대를 쫓아 들어가, 그대로 차올린 게 그냥 한판으로 이어졌다. 상대는 어이가 없는지, 그냥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방심? 아니다. 타이밍이 그냥 기가 막혔다. 퉁! 하고 뛰듯이 들어가 팡! 하고 차올렸다. 소매깃을 잡은 상태였고, 목은 그냥 휘감듯이 차버렸다. 그런데 이 한 방으로 그냥 게임이 끝났다.
다음 게임은 황석이었다.
똥통 시드에 빠져서, 1회전이 빨랐다.
황석은 4분 게임을 전부 했다.
결과는 절반 승.
그리고 1시간 뒤, 강한결이 들어갔다.
베카우리 라샤. 황금세대가 등장하기 전, 유도계의 생태계 교란종이었던 선수다. 그런 베카우리 라샤와 강한결의 상대 전적은 2승 0패다. 승률 자체는 확실히 앞서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선수와 마주선 강한결. 하지메! 경기가 시작됐다. 임효중과 황석의 경기는 마음 편히 봤지만, 이번 경기는 긴장이 됐다. 천하의 강한결이라도 베카우리 라샤와의 경기는 필승을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강한결의 실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렇다.
상대 전적도 분명 앞서지만, 그게 절대적일 수는 없었다.
그런 지영의 생각대로, 시합은 백중세였다. 두 선수는 처음부터 격렬하게 붙었다. 정확히는 베카우리 라샤가 공격전으로 끌고 갔다. 이렇게 한 선수가 공세로 나서면, 다른 선수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공세인데 수세로 나가는 건, 운영의 묘가 완벽하지 않은 이상 반칙이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강한결도 운영은 잘한다. 하지만 베카우리 라샤는 그렇게 운영만으로 잡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지영이 신지를 상대할 때는 본능에 맡기는 것과 비슷했다.
격렬했다.
베카우리 라샤의 도복에 조금씩 붉은 물감이 묻기 시작했다. 실제로 물감은 아니었다. 강한결의 손끝이 터지며 난 피가 묻고 있는 거니까. 사실 기술은 두 선수 전부 많이 걸지 않았다. 2분이 지나도록 서로 한 번씩 걸었으니까. 기술을 거는 게 조심스러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기술을 걸고 싶었지만, 걸 수가 없는 상태였다.
잡기가 매우 치열했다.
베카우리 라샤는 강한결을 잡기로 제압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제대로 잡을 각을 안 줬고, 강한결은 그런 베카우리 라샤의 전략을 대번에 눈치채고는, 마찬가지로 절대 유리한 잡기 포지션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2분이 지났을 무렵엔 벌써 지도를 서로 두 개씩 받았다.
시합이 이렇게 격렬한데도 지도가 두 개나 나온 건, 그만큼 잡기가 치열하다는 뜻이었다. 이제 이렇게 되면 심판이 지도 하나를 누구한테 먼저 누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아니면 그 이전에, 기술로 끝나든가.
그래서 보통 이렇게 지도 2개에 몰리면, 스타일이 변하는 경우가 많다. 괜히 수세에 몰리면 한 번에 게임이 끝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강한결도, 베카우리 라샤도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철저한 잡기 싸움.
아니, 철저하단 말보단, 처절하단 말이 더 어울렸다. 두 선수는 끝까지 잡기 싸움을 고집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조마조마했다. 유도는 기본적으로 상대를 메치는 운동이고, 그걸 위해 기술을 걸 때 나오는 에너지가 장점인 스포츠다. 그러나 지금은 기술을 거는 횟수가 4분이 지나도록 서로 1회씩밖에 되지 않는데도, 손에 땀이 찰 정도로 박진감이 넘쳤다.
도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독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신과 구.
사실 나이 차이는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아서 피지컬은 비교할 필요가 없다. 누가 더 잘하냐, 승패는 여기서 갈릴 것이다.
하지메!
경기가 연장전으로 들어섰다.
‘밀리지 마라. 밀리면 진다…….’
지영은 근처 대기실에서 두 손을 모은 채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기세다. 첫판이라서 솔직히 몸도 제대로 안 풀렸을 거다. 1회전부터 연장전은 솔직히 모든 선수가 기피하는 경기다. 호흡이 터지고 말고를 떠나서, 그냥 첫판부터 연장전은 무조건 힘들다. 아니, 힘든 정도가 아니라 괴롭다.
두 선수의 호흡은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이제 연장전으로 들어가면 조금씩 파탄이 나는 게 보일 거다. 지영이 보기에 베카우리 라샤도, 강한결도 똑같이. 이 파탄이 누가 먼저 나기 시작하냐. 지영은 승패는 거기서 갈릴 거라 봤다.
그런 지영의 생각은 딱 맞아떨어졌다.
연장 시작 3분이 지났을 때부터 한 선수의 가슴 기복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선수는 강한결이 아니었다. 베카우리 라샤의 체력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고, 여유롭던 표정도 사라지고, 입술을 질끈 깨물기 시작했다.
그건 곧, 체력의 한계를 의미했다.
아니, 1회전인 걸 감안하면 한계가 아니라 붕괴에 가까웠다. 저 단계에 오면, 급속도로 무너진다. 강한결은 그걸 눈치챘다. 그리고 좀 더 강하게 푸쉬를 걸기 시작했다. 되치기를 생각해 확 달려드는 방식 말고, 천천히, 천천히 상대를 코너로 모는 방식이다. 저런 식으로 밸런스가 파괴되면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질 못한다.
힘을 주어야 할 때, 빼야 할 때를 놓치면 시합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걸 계산해서, 코너로 천천히 몰아넣는 강한결을 보며 지영은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그렇지! 그대로만 가자!”
이성진의 응원에 강한결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맛테!
그리고 심판의 그쳐!
설마 바로?
지영은 아니라고 봤다. 이번 건 경고성 그쳐다. 또 밀리면 지도를 주겠다는 걸 암시하는. 이렇게 되면 베카우리 라샤는 이제 절대로 물러나지 못한다. 그럼 다시 백중세로 돌아갈까? 아니, 그렇지 않다.
유도는.
밀고 오는 상대를 아주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는 기술 천지인 종목이다. 확 달려들 듯이 잡기를 해오는 걸 그대로 받아, 발목 받치기. 베카우리 라샤의 몸이 그대로 붕 떠서, 뱅글! 돌았다.
쿵!
잇폰!
그리고 그걸로 승부가 났다.
우와아-!
커다란 함성이 울렸고, 이 경기를 시작으로 황금세대의 질주가 시작됐다. 이변 없이, 아니, 이변이라 할 수 있는, 황금세대의 전원 금메달. 외신은 이날 황금세대의 경기를 헤드라인에 이런 제목을 달아, 걸었다.
왕의 귀환.
참, 적절한 제목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