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89화
489화. 전설로 가는(28)
실험은 필요했다.
재는 함께 출진할 이족 전사들과 백적파를 이끌고 제도 근처의 절벽으로 향했다. 거기서 절벽 위 나무에 줄을 묶은 다음 절벽으로 내려가, 단단한 암석 지대를 뚫은 다음 실험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몇 가지.
단순히 벽에 넣어 놓고 터뜨려서는 효과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럼 절벽의 표면만 터질 뿐, 원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했다가, 제학 선생의 말에 따라 절벽을 정으로 깨뜨려서 가능한 안에 깊숙이 넣어봤다. 길지 않은 심지에 다시 잘 타는 줄을 엮어 불을 붙여 본 결과, 원하는 결과가 나왔다.
안에 깊숙이 넣고 터뜨리니 그 폭발력이 절벽 안쪽부터 깨뜨리더니, 상당히 넓은 반경까지 부숴버렸다. 거미줄처럼 금이 가더니 이내 우르르 떨어지는 걸 보곤 재는 자기의 생각대로 계획을 짤 수 있음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출진 준비는 빠르게 이어졌다. 천양 호수까지는 일주일 거리고, 제국군은 한 달 거리에 있다. 척후 결과 후는 천천히 오고 있었다. 급히 오면서 기습에 걸리거나, 혹은 지친 군세에 이족이 달려드는 것을 대비한 진군 속도였다. 거기에, 주변 영지까지 철저히 단속하면서 오고 있었다. 이미 후에게 반기를 든 자들이 나왔다. 이들이 제도를 포위한 뒤를 노리면 곤란해진다는 것을 아니, 애초에 급하게 올 수 없었다.
그래서 철저하게 주변 영지를 정리하면서 올라오고 있었고, 이 때문에 한 달이 아니라 시간이 더욱 걸릴 수도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그리고 재는 한 달보다, 좀 더 걸리리라 판단했다.
이런 후의 선택은, 재가 보기에도 정답이었다.
제도를 탈환했다고 어차피 전쟁이 끝은 아니다.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전쟁이다. 그러니 완벽한 결전을 치르려면, 그 외의 위협은 제거하고 오는 게 맞다. 그래서 재도 급하게 준비하진 않았다.
이족의 군세를 따로 추리고, 학사군을 추리고 추려 정예를 뽑았다.
그렇게 모은 군세는 모두 삼만이었다.
나머지는 재가 작전에 실패했을 때, 연이 제도에서 농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력은 남겨둬야 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고, 재는 연을 찾았다.
연은 대전에 있었다.
예전에 자기가 쓰던 연화전에서 그녀는 각지에서 올라온 전서를 보고 있었다.
“공주마마, 재입니다.”
“……들어오세요.”
스르륵.
주렴을 걷고 안으로 들어간 재를 보는 연의 눈빛은 무심했다. 이미 대립하는 순간부터 둘의 관계는 끝났다. 그런데도 함께하는 건, 목표가 같아서였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이제는 그냥, 남이다. 그녀의 마음을 본 그 순간, 족쇄는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풀렸다.
“내일 아침, 떠나려 합니다.”
“……후를 처단한다고 해도,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겠죠?”
“…….”
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예, 하고 대답해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괜한 설전은 솔직히 이제 피하고 싶었다. 제학 선생의 도움과 연의 빠른 판단으로 화계를 피해 제도로 진격해 탈환한 것은, 연의 능력이었다.
이를 재는 부정하지 않았다.
후가 계획한 회심의 계략을 피한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고, 재가 없는 동안 초소전이란 더러운 짓을 저질렀던 것을 이번 공으로 상쇄해주기로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재에게서 연이란 존재감은 없어진 상태였다.
이전엔.
주군이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주군.
공주의 무사.
그게 재였다.
양부의 부탁으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켜야만 했던,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이지, 그런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였다. 족쇄가 완벽히 풀린 것이다. 하지만 재는 그래도 책임은 다할 생각이었다.
“재.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예, 공주마마.”
“내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죠?”
“…….”
연의 질문에 재의 눈매가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어차피 마지막이 될 만남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보고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건 비겁한 짓이다. 연은 면죄부를 얻고 싶은 것이다. 재가 마지막이니까, 괜찮다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다. 하지만 재는 그렇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사람의 목숨을, 장기 말로 쓴 것.”
“…….”
“그것도,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알고 있었으면서도.”
“…….”
“그런데도 그곳에 생목숨을 갈아 넣은 것.”
“…….”
“공주마마. 그건 후나 하는 짓입니다.”
“…….”
빠드득!
일그러진 연의 표정을 보며 재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혹여, 제국의 황제가 된다고 해도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또다시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짓을 한다면…… 그 황좌에서 제가, 이 재가, 끌어내릴 거니까.”
“그대는 끝까지…….”
“그것만 기억하십시오. 이제 저는 공주마마의 무사가 아님을. 연, 당신이 생각하는 나의 무사는 이미 죽었음을.”
“…….”
“머리에, 가슴에 담아두고 절대 잊지 마십시오.”
“…….”
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재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는 재의 말처럼, 알고도 이족의 목숨을 초소전에 갈아 넣었으니까. 재가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까지 그녀의 가치는, 재가 있음으로 지켜졌다. 스스로도 똑똑했지만, 재라는 한 인간의 전투력이 뒷받침된 게 더 크단 소리다.
그렇기에 그녀는 재가 절벽에서 떨어지자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그게 바로 초소전이었다.
목숨을 갈아 넣는.
그 의미도 없는.
이족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거기에 그 초소전의 시작은 선고였다. 먼저 와서 청했기에, 연은 그 속내를 숨기고 그 야심을 슬그머니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야심은 재에게 곧장 걸렸다.
그걸 알아차렸기에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마지막인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날 선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무심이 가라앉은 재의 눈빛이 연을 직시했다.
연은 그 시선에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폐부를 찌르는 눈빛이다. 연은 아군이 아니라, 적일 때의 재가 이다지도 두려운 존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깨달은 연에게. 재가 선고했다.
“그대는, 좋은 군주가 되어주십시오.”
“…….”
“그리하여 부디, 태평을 이루시길.”
“…….”
재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나갔다.
* * *
컷.
오케이.
“좋아요. 아주.”
홍진아 감독의 차분한 목소리가 현장의 정적을 깼다.
후우.
그에 세트장 안쪽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연의 한숨이었다. 지영도 비슷하게 하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연이 감정을 누른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누나.”
“어, 지영아. 고생했어.”
“네, 누나도요. 정말, 고생하셨어요.”
“후후, 고생은. 너만큼 했겠니, 내가?”
“많이 했잖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저한테 많이 맞춰줘서.”
“어머, 보였어?”
“깨달은 건 작년 12월쯤? 그쯤이에요.”
“그래? 역시 눈치가 빨라. 후후.”
싱긋 웃는 이연을 보며 지영도 웃었다.
이로써, 두 사람이 붙는 신이 전부 끝났다. 촬영이 전부 끝났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연의 개인 신도 있고, 다른 사람과 합을 맞추는 신도 있다. 반대로 지영도 신이 남았다. 하지만 이 신을 마지막으로 이제 두 사람은 한 앵글에 담기지 않는다.
혹, 나중에 정은정 작가가 추가 장면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걸로 두 사람이 같이 연기를 나누는 신은 좀 전에 끝난 거다. 따로 확인하긴 하겠지만, 연출에 한에선 마에스트로라 불려도 무방한 홍진아 감독이 좋다고 한 신치고, 부족했던 부분은 없었다. 배우의 욕심으로 한 번 더 가는 경우는 있어도, 그녀가 오케이라면 부족함 없이 오케이가 맞았다.
그리고 지영도 좀 전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 스스로 표현하고자 한 감정은 전부, 할 수 있는 만큼 내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이연도 마찬가지로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그녀도 자기의 연기가 제대로 나왔다는 마음에서 나온 표정일 터.
이렇게 붙는 신이 끝난 거다.
이연은 아주 오래 함께한 배우이고, 선배이며, 동료였다.
연예계에 들어와 첫 작품에 만난 배우고, 연달아 세 작품을 함께한 배우였다. 나의 무사님이란 작품의 대본을 가지고 와서 지영을 직접 섭외하려 노력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연이 아니었으면, 어쩌면 지영은 이 작품을 안 할 수도 있었다. 그때는 작품보다 운동에 더 초점을 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으면, 정은정 작가와 아예 미팅 자체를 안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럼 이 작품은 없는 거다.
그래서 지영은 이 사람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지영은 그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꾸벅.
천천히 허리를 숙여서, 진심으로 그 고마움을 전달했다.
“감사합니다.”
“어머, 왜 이래……?”
이연이 입을 가리며 놀라자, 짝짝짝! 주변 스태프들이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지영의 인사에 담긴 진심을 봐서,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였다. 부끄러운지 이연은 호다닥 일어나서 홍진아 감독에게 달려갔다.
지영은 그런 이연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느긋하게 걸어가 같이 신을 확인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최종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오늘 촬영은 이걸로 끝이다. 이연도 끝이고.
“야식 먹으러 갈래?”
같이 대기실로 가는 중, 이연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배가 좀 고팠기 때문이었다.
“네, 뭐 먹게요?”
“음, 뭐 먹을래? 지금 웬만한 식당은 다 닫았을 거고.”
시간이 12시다.
낮이 아니라, 밤 12시. 당연히 식당은 거의 다 문 닫았을 거다.
“아, 서울 가다 보면 24시간 하는 기사 식당 있거든? 거기 불백 맛있더라. 거기 가자.”
“네.”
헤비하지만, 오늘 찍은 신이 많아 에너지 소모가 만만치 않아서 그거 먹는다고 살이 붙진 않을 거라 생각한 지영은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30분쯤 달려 이연이 말한 기사식당에 도착했다.
80년대 식당이 생각날 정도로 외관은 허름했다. 하지만 그래도 안은 깔끔한 느낌이 있었다. 겉은 두고, 안은 한 번 리모델링을 한 것 같았다.
스태프가 많아서, 넓지 않은 식당이 가득 찼다.
“소주도 콜?”
“누나 내일 괜찮겠어요?”
“나 내일 오후 두 시 스타트. 넌?”
“저는 누나보다 한 시간 늦어요. 액션 신이라 연습할 시간 있어서.”
“아하, 그럼 마지막 신을 축하하며, 가볍게 마시자.”
“네.”
술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의미를 굳이 부여해서 주는 술이라면 거절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사각형 불판에 은색 호일. 그 위로 가득 쏟아지는 고기. 딱 봐도 그냥 맛있어 보였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 순간 이연이 소주병 들었다. 지영은 반사적으로 잔을 들어, 공손히 받았다. 대선배님이니까, 그냥 생각 없이 나온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연에게 별로였는지.
“야, 근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깍듯하냐? 거리감 느껴지게?”
눈살까지 찌푸리며 한 말에 지영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니, 공손해도 뭐라고 해요?”
“공손하니까 그렇지. 그냥 편하게 해, 편하게. 한 손으로 받는 건 그렇지만, 그냥 편하게 받아주면 되잖아. 아. 나, 지금. 나한테 정 떼냐? 이제 안 볼 사이라 이거냐?”
“어휴…….”
이제 겹치는 신이 끝났으니, 서운해서 저러는 게 분명했다.
지영은 오늘 술자리가 매우 길어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걱정되진 않았다. 자기도 좀 서운한 건 있었으니까. 아, 물론 이연이란 인간에게 서운한 건 아니었다. 항상 합을 맞추던 사람과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이 주는 상실감이 서운한 거였다.
“자꾸 그러면 저 밥만 먹고 숙소 갑니다?”
“치사빵꾸똥꾸새끼…….”
“와, 그게 언제 적 욕이에요?”
“배우에겐 필독서거든!”
“네네. 누나도 한 잔 받으세요.”
“받으세요?”
찌릿하는 이연을.
“누님이라고 불러 드려요?”
“아니, 한 잔 줘.”
가볍게 침몰시켰다.
그런 이연의 모습에 주변에서 키득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한민국 전체로 따졌을 때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인기를 구가하는 이연의 약한 모습이 재미있어서 나온 웃음이었다. 지영과 임은진, 그리고 정성철과 함께 건배한 이연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올해 스케줄은 정해졌어?”
“네. 촬영 끝나면 바로 선발전 준비하고, 세계 선수권에 집중하려고요.”
“아하. 그러면 무신 척위준은?”
“그건 세계 선수권 다음에 하기로 정했어요. 원래 올해 하반기 개봉이 목표였는데, 그래도 레인 스튜디오가 좀 양보해 줘서 내년 초에 개봉하는 거로.”
“오. 신경 많이 써줬네?”
“네. 그래서 열심히 하려고요.”
“그건 당연한 거지. 오천만 불이나 받았는데.”
그러더니 은근한 표정으로 누나 돈 좀 빌려줄래? 장난을 쳐서 지영은 하하 웃고 말았다. 대답했던 것처럼 레인에서 많이 양보해 줬다. 다니엘 화이트가 말했던 촬영 일정도 조금 미뤄줘서, 나의 무사님 촬영이 끝나고 찍기로 했다.
그 정도 배려를 받았다.
당연히 그 배려에 관한 보답을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그 보답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갚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지 않을 거면 아예 시작도 안 하고, 하기로 했으면 최선을 다하는 게, 원래도 강지영의 스타일이었다.
술이 계속 돌았다.
고기는 맛있었고, 스태프들도 피곤하지만 맛있는 고기와 이연의 섭섭한 마음에 공감했는지 새벽 3시가 되도록 자리를 지켜줬다. 결국 술에 취해 눈에 완전히 풀린 이연을 정성철이 차에 강제로 태우고 나서야 자리는 끝났다.
그렇게 이연이 떠났다.
그녀가 떠난 것처럼, 촬영은 막바지에 도착해 있었고, 엔딩을 일주일 남겨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