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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473화 (473/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73화

473화. 전설로 가는(12)

보고, 또 보고.

지영이 태어나기도 전에 방영한 장편 드라마의 제목처럼 지영은 대본을 보고 또 봤다. 머릿속에 이미 낙인이 박힌 것처럼 지문과 대사가 전부 새겨져 있지만, 그래도 지영은 더 봤다.

대사 하나.

지문 하나.

‘정은정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찾자. 연기 쪽에서는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나를 잘 아는 사람이야. 철저하게 나에게 맞춰진 캐릭터니까. 분명 원하는 바가 있을 거야.’

그걸 찾아야 했다.

그걸 생각하기 시작했더니, 뭔가 보이는 것 같았다. 지영은 잠시 대본을 보다가, 초반부의 대본을 꺼냈다. 그리고 두 개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확실히 조금 다른 부분이 보였다. 초반부는 액션 신이 많았다. 그래서 지문과 대사가 간결했다. 지영은 이걸, 정은정 작가가 가진 영역의 한계라 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액션 신은 그녀의 영역 밖이었다. 그래서 상황만 지문으로 인지시켜 주고, 나머지는 액션 팀에 맡긴다. 그 안에서 어떤 전투가 벌어지는지까지 신경 쓰진 못한단 소리다.

‘왜? 액션 자체를 그리는 건 그녀의 상상으로는 무리니까.’

그녀는 세계관을 짜고, 스토리 안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 간의 사건사고를 입력하여 재미를 뽑아내는 데는 천재적이다. 하지만 액션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간결하다. 더욱이 특별한 부분이 아니면 서술 자체가 상세하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선이 대립하는 부분으로 나오자, 굉장히 디테일해지기 시작했다.

“여기.”

한쪽 입매만 말아 올리며, 조소를 짓다.

이런 느낌이다.

표정까지 관여하는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툭, 툭.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적당한 간격에 두 번. 이런 식의 지문도 있다.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동 중 하나로, 이건 행동 지침이다.

비교해 보면, 액션 신엔 자기가 관여하지 못했지만, 감정 신으로 들어가면 온전히 자기의 영역이 되는 거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철저하게 해석한 강지영을 완벽한 재로 만들기 위한 대본을 만들어서 보내줬다.

‘이 차이…….’

대충 봤으면, 대충 행색만 하고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이라도 차이가 보였다. 그러면 지영이 할 일은 예정되어 있었다.

“당장 급한 신부터 시작하자. 오늘 신이…… 연과의 재회.”

재와 연이 다시 만나는 신이다.

이걸 한국에서 찍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겨울은 초소전에 투자했고, 해가 지나 다시 봄이 왔을 때쯤에나 연과 재회한다. 그러면 앵커리지의 그 혹독한 설원이 굳이 배경으로 필요하지 않았다. 설원 배경이 필요 없으니, 한국의 세트장에서 찍어도 충분했다. 실내 세트장을 봄처럼 꾸미고, 배경은 CG로 입히면 끝. 그런 방향이다.

그건 한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니 순위에서 밀려나 있다가, 이제 지영이 복귀 첫 신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배치한 것도…… 이제 시작되는 감정 대립의 간을 보려는 거겠지.”

이 신은 일단 아주 이중적인 감정의 대립이다.

살아 돌아온 게 정말 고맙고 반갑지만, 그의 옆에는 역시 자신이 없다. 그 마음에서 나오는 혼란스러운 감정.

반대로.

살아 돌아와 족쇄를 다시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 그 족쇄가 어긋난 길을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나오는 감정. 이런 감정의 대립. 강하면서도 미묘해야 하고, 미묘해졌으면 다시 강하게 단계를 밟아 올라갈 때도 있어야 하고, 갑작스럽게 다운, 그 반대로 순식간에 업까지. 이 복잡한 선을 표현하라고 대본은 말하고 있었다.

이연은 이미 수준급이란 표현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마스터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고수.’

특히 표정과 감정을 잡는 것만큼은 대가 선동일도 인정했을 정도다. 이런 배우와 합을 맞추며 밀리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컨트롤해야 했다. 그런데 이건 자기 연기만을 돌아봐서는 또 힘들었다. 지영은 태블릿을 꺼내 웹플릭스에 접속했다. 그러곤 이연이 나온 부분만 돌려보기 시작했다.

상황을 컨트롤하려면, 이연의 연기 스타일을 보다 딥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감정이 진득하게 실린 눈빛과 표정 연기 이후, 대사가 날아들 때까지의 틈을 파악해 두면, 미처 준비도 안 됐는데 날아든 대사에 당황하거나, 타이밍을 놓쳐 대사를 절거나 하는 일을 예방할 수 있겠단 생각 때문이었다.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혼자 감정을 잡는 신은 존재하지만, 연기는 기본적으로 너와 나, 혹은 나와 너, 너, 너 등등. 일대일이나 일대 다수가 함께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합을 맞추는 연기에 혼자 튀는 놈은, 그 어떤 감독도 내친다. 그걸 내치지 않는 경우는 딱 둘이다.

배우가 낙하산이든가. 감독이 능력이 없든가.

지영도 지금까지 그 호흡을 맞춰 왔다.

하지만 이번엔 아예 상대를 철저히 분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신이 없어서 너무 늦게 깨달았네. 하지만 아직, 늦진 않았어.’

레미의 일로 지영은 딴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어제 늦은 저녁부터 다시 대본을 보며 현장에 복귀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깨닫는 것도 늦었고, 준비도 부족했다. 하지만 지영은 현역 운동선수다.

프로에게 준비가 안 됐다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지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 지영은 바쁜 이유가 있었지만, 그게 현장에서 준비가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라는 말로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분명 준비 시간은 늦었지만, 그래도 지영은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늦게라도 길이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개인 능력이 중요했다.

그리고 다행히 지영은 능력이 제법 있었다. 거기에 정은정 작가가 캐릭터 자체를 지영에게 맞춰 설정했기에, 길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노력.

천재가 하는 노력.

누군가가 이런 지영을 봤다면. 분명 세상 공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불공평함을 느끼는 사람은 이내 이어진 신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 * *

늦은 저녁.

연의 처소에는 아직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악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있을 건 다 있는 지도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뭔가가 개입했어.”

교전 정보는 그날 올라온다. 늦은 시간에라도 반드시 이쪽으로 전달하게끔 연락망을 짜놨다. 그렇기에 연은 이곳에 앉아 초소전의 전황을 파악했다. 팽팽한 전역이 밀리면, 좀 더 병력을 투입했다. 반대의 경우에는 좀 더 전선을 느긋하게 풀었다. 과하게 몰아치면 제국군이 우르르 몰려올 수도 있어서였다.

그런데 근래, 전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족의 전선은 무사한데, 제국의 초소가 터지고 있었다. 벌써 열 개 이상이 터졌다. 교전을 감지하고 근처로 가보면, 이미 상황종료였다는 내용이 속속 들어왔다. 이게, 하루에 한두 번씩 이어졌다. 그래서 연은 반대로 전선을 풀었다.

이쪽 전선의 영역을 풀어, 악에 받쳐 치고 오는 제국군에게 초소를 일단 넘겼다. 그래야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반대로 전선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자기가 짠 판에 다른 이들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개인? 집단? 대체 누구지…….”

중얼거리는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판을 깬 게 불쾌한 것도 있지만, 지금 이 일은 미지의 변수라 할 수 있었다. 이런 변수는 상황을 짤 때, 매우 불편했다. 당장은 아군 같지만, 만약 갑자기 적으로 돌아서면? 이들의 존재를 상정하고 판을 수정하는데, 이들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이런 불확실한 것들 때문에 조금만 삐끗해도, 아군이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일단 정체를 알아보라 시켰다. 그런데 얼마나 신출귀몰한지, 척후로는 개개인이 전부 뛰어난 능력자인 이족이 그 꼬리조차 잡기 힘들다고 했다. 거기에 현장도 반드시 훼손하고 간다고 했다. 여러 가지 무기로 당한 상처가 많아서 몇 명인지, 어떤 전략을 썼는지, 주력 무기는 무엇인지, 신장은? 보폭은? 인원은? 그 모든 것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철저하게 흔적을 지우는 거다.

자기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연 단주. 전방 초소에서 보고입니다.”

“들어와요.”

안으로 들어온 정보망 책임자가 죽간 하나를 내려놓고 바로 나갔다. 연은 그걸 지체하지 않고 곧장 펼쳐 봤다.

“교전. 제국군 사망자가 육십이 넘어? 거기에 반대는 피해가 전무하다?”

올라온 정보를 살펴보던 연은 눈을 빛냈다.

사망자만 육십이 넘는다는 것은, 그 전투에 투입된 제국군은 실제론 더 많았다는 뜻이다. 백 대 백이 부딪쳐서 한쪽이 완전히 몰살당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정말 아예 뒤가 막혀 있다면, 아니, 그 경우도 거의 구 할은 항복하는 이가 나올 것이다. 그런 항복은 보통 절반 이상 대대원이 사망하면 나온다. 전황이 급격하게 기울어지고도 끝까지 항전하는 경우는 그만큼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일백 이상이 초소전을 지휘하는 제군 군의 책임자 아래 펼쳐졌다. 연은 그게 포위전이라고 봤다.

방을선.

연이 확인한 제국의 지휘관이다.

계략, 모략에 매우 능한 자로 예전에 한 번 승리에 도취 되었던 이족의 전사들이 쭉 밀고 들어갔다가 역으로 포위망에 갇혀 거의 전멸할 뻔한 일 이후, 척후를 통해 밝혀낸 자였다. 그자의 특기가 바로 포위 섬멸전이다.

“그런데 그게 보기 좋게 깨졌단 말이지…….”

도대체 누가?

아니, 어떤 집단이?

일백이라면 절대 혼자서 상대할 수 없었다. 특히 그자의 특기인 포위 섬멸전이었다면 더더욱. 반드시 차륜전을 썼을 거고, 아무리 날고 기는 전사라 해도, 그곳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도 제국군의 사망자만 즐비하다? 그렇다는 건 무조건, 정말 무조건 집단이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최소 열 이상의.

“제국의 정예가 섞인 일백의 포위진을 뚫을 정도면…… 도움이 될 거야. 음, 어떻게 선을 대지?”

그런 판단이 서자, ‘이용’하잔 생각이 아주 당연하게 뒤따랐다.

“그런데 벌써 판을 깨도 될까? 흠…….”

아직 전력이 부족하다.

역적 후는 지금 다시금 징병에 들어갔다. 이번에 내려올 때는 이전보다 더 많은 군을 몰고 올 것이다. 그걸 대비하기 위해 이쪽도 이족의 영역 전체를 돌며 병력을 늘리고 있지만, 애초에 이족은 원래 멋대로 살던 이들이다. 그래서 병력 보충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굳이 초소전으로 소모전을 시작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전면전은 정말 잘못 치르면, 뒤가 없기에 여유는 반드시 남겨 두고 전쟁을 이어왔다. 그러니 이 판을 깨면, 남은 건 다시 전면전이다.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 과연 적을 막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당연히 뒤따랐다.

“소모전 때문에 불만이 늘어나고 있어. 음, 선택을 하긴 해야 할 때야.”

이대로는 이족에게 죽어달라는 것밖엔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연히 이족이 밀릴 거라는 것도 그녀는 알았다. 제국은 크다. 따라서 제국민 또한 많다. 반대로 이족은 애초에 소수정예 집단이다. 아무리 통합하고 통합해도, 병력을 뽑아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목숨을 매우 신성시했다.

애초에 이들은 제국군이 넘어와 아이들을 해치지 않았으면, 이렇게 봉기하지도 않았다.

탁, 탁탁.

흔들리는 촛불.

타다다닷! 그리고 누군가가 급히 달려왔다.

“다, 단주! 선고가 돌아왔습니다!”

“누구? 선고가?”

벌떡!

벌떡 일어난 연은 급히 달려나갔다. 선고가 전사한 뒤, 연은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반대로 시원하기도 했다. 앓던 이가 쏙 뽑혀 나간 것처럼. 그런 이중적인 마음에 몇 날 며칠을 괴로워했다.

그런데 그런 감정을 자신에게 선사한 선고의 복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전쟁에 아주 중히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급히 밖으로 나갔다. 달빛을 등지고, 몇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족은 오오! 오오오! 우하! 이햐! 어히야, 허이야! 빙글빙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선고의 생환을 축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은 멈칫했다.

오는 게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달빛에 비친 음영을 보아 남자 둘과 여자 둘이다.

‘전장에서 동료를? 아니면 인질인가?’

이어가던 연은 멈칫했다.

“어…….”

한 사람이, 한 사람이…… 매우 익숙했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 그 사람을 연은 잊은 적이 없었다. 거의 한 시도. 조금만 방심하면 불쑥 머릿속으로 끼어들어서, 그녀를 매우 괴롭게 했던 사람. 그 사람이 딱 저런 모습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알아봤다.

그래서 반가웠다.

너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나섰는데.

진지에 피워 놓은 불의 영역에 들어서며 드러난 그의 눈빛에 그녀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걸음도 저절로 멈췄다.

싸늘한.

적의.

가…… 그녀의 심장에 무참히 쑤셔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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