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38화
438화. 왕관의 무게와 책임(3)
LA에서 도쿄 하네다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지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마땅한 대책이 있어서 도쿄행 비행기에 오른 건 아니었다. 사실 그 반대였다.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도 오른 건, 책임 때문이었다.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까 고민해본다고 해서, 그 방법이 뚝딱 떠오르진 않는다. 거기에 그런 고민을 안고서 후반부 액션 신을 촬영하는 건, 나 다치고 싶어요! 이렇게 크게 외치는 것과 다를 게 없기도 했다.
그래서 지영은 이걸 해결해야 자신이 마음 편하게 작품에 임할 수 있다는 걸 아주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아무런 대책도 없는데 일단은 무작정 도쿄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자기의 행동이 작품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 행동 자체가 무책임한 건 아니다.
작품에 들어갔다고, 그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작품에 최선을 다하는 거야 맞지만, 배우의 상황에 따라 이런 문제는 어떻게든 조정하고 가는 게 맞았다.
“지영아.”
“네?”
같이 비즈니스석을 타고 가던 임은진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태블릿을 지영에게 건네줬다. 그걸 받아서 보자, 기사가 났다. 일본발 기사가 먼저 뜨고.
“기사 났네요.”
“응. 안 나는 게 이상하지.”
“분위기는…… 흠.”
한국에서 2차 기사가 났다.
일본발 기사를 한국 기자들이 옮겨와 2차 생산한 기사다. 당연히 기사의 내용은 교묘했다.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고, 옆으로 그 언론사로 들어가자 뭐 제대로 되어 있는 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기자 정보조차 없었다. 그냥, 이름만 덩그러니 있었다.
심지어 대표는 장일이고, 그 아래 데스크 총책임자 이름은 장이다.
그 아래 부장은 장삼이고, 팀장? 그 사람 이름은 장사다.
“우와, 이름 봐요, 누나.”
“이름? 어? 와아. 뭐야. 이게. 하하.”
그녀는 지영이 보여준 조직도를 보곤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지영에 관한 악의적인 기사를 쓰면 걸릴 게 빤하니 아예 말도 안 되는 이름을 대충 막 올려놨다. 걸려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그리고 실제로 걸리면 그냥 홈페이지 터뜨리면 그만이니 상관이 없기도 했다. 지영 하나를 추락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마이너 언론 몇 군데는 여태껏 이래왔다.
그래서 솔직히 뭐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지영아. 그 옆에 창에 들어가 봐. 거기 그 아이 정보 있어.”
“네.”
쿠구궁.
터치로 창을 옮기려는데, 비행기가 흔들렸다.
[승객 여러분. 지금 본 기는 난기류로 인하여…….]
그리고 곧장 안내 방송이 나왔다.
영어와 일본어로 한 차례씩 방송이 나온 뒤에 기체가 다시 안정을 찾자 지영은 소녀의 정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SNS로 보이는 계정이 떠 있었고, 사진도 있었다. 순수하게 생긴 소녀였다.
교복 차림의 사진이 많았는데, 그 어디에도 멋을 부린 모습이 없었다. 머리, 외모, 가방과 신발, 차고 다니는 액세서리까지. 전부 수수한 느낌이다. 그리고 SNS에 남긴 글을 통해 소녀의 취향, 성격을 알 수 있었는데 이 아이는 전형적인 문학소녀였다.
소설을 읽고 그에 관한 감상평을 남기는 용도로 사용하는 게 SNS였고, 지인들에게 소설을 추천받고, 추천해주는 딱 그런 용도였다.
“……감수성이 어마어마하겠는데요.”
“그렇지?”
“네.”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의 특징 중 하나가 감수성이 남들보다 좀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소설을 통해 감수성을 후천적으로 키워왔고, 그렇기에 좀 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사람마다 이것도 케바케다.
그러나 적어도 지영이 보기에 이 소녀는, 자기의 발언으로 극단적으로 변해버린 삶을 견딜 수 없어 보였다.
자존감도 상당해 보이지만, 이지메 앞에서 그런 자존감은 오히려 상대를 더욱 자극하는 좋은 연료였다.
남을 괴롭히는 개X끼들은 괴롭힘의 대상이 견디면 오히려 좋아하고, 무너지기 시작하면 희열을 느끼는 정신병자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신이상자들의 집요하고, 야비한 이지메를 이런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가 견디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진짜 타고난 멘탈의 소유자여야만 그 이지메에 대항할 수 있고, 타고난 것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만 괴롭힘 자체를 깨부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만에 하나. 아니, 십만에 한 명 겨우 있을까 말까다.
그만큼 따돌림이라는 것은, 괴롭힘이라는 것은 이겨내는 게 쉽지 않았다. 참고 견디는 것.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 인내하거나 경찰 같은 기관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솔직히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법이라는 게 웃겨서, 죄를 짓는 애들도 보호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 번에 처리하지 못하면 보복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신이 승냥이인 줄 아는 개X끼들의 악의는, 그다음부턴 절대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대상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으로도 피해가 퍼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표적과 친하게 지내면 그 친구도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친구들은 당연히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표적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건 또 배신감이 되어 대상을 괴롭힌다. 인간을 괴롭히는 방법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아서, 안다고 해도 대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이걸 이제 고작 10대 중반인 아이가 견뎌야 한다.
그리고 견디지 못했다.
아이는 결국 뛰어내렸다. 천운이 따라 목숨을 겨우 건졌지만, 이미 소녀의 세계는 무너졌다. 무너진 세계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정신에 큰 상처를 입고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게다가…….
‘나도 겪었던 일이야.’
지영이 이 문제를 지나치지 못하는 게, 조나단을 보자마자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껴 개입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도, 전부 자신이 겪어봐서였다. 지영의 경우는 소녀, 사토 레미와는 다르긴 하다.
지영은 괴롭힘과 따돌림이 아니라 사고로 그 세계에 진입한 거고, 레미는 순전히 인간의 악의에 의해 그 세계로 진입한 거다. 그런데 그 인간의 악의가 레미에게 향하게 만든 건, 지영 본인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할수록, 역시 이번 사태는 자신 때문이라는 확신만 강해졌다.
“가서 어떻게 할지 방법은 있니?”
임은진의 질문에 지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답이 없다고 생각 중이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애초에 마음의 문을 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럼 무작정 가는 거야?”
“지체하면 늦을 수도 있어요.”
“응? 설마…….”
“네. 이미 한 번 뛴 애가, 두 번이라고 못 뛸까요?”
“아…….”
처음 한 번이 어렵다는 말은 전 세계에서 먹힌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도둑질 같은 거다. 처음엔 가슴이 쿵쿵거리고 두근거린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 한두 번이지, 하다 보면 내성이 생겨 그리 떨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점점 대범해지고. 겁나는 것 자체가 거의 처음에만 그런다는 뜻이다.
대범해지고, 대담해지고.
어떤 안 좋은 행위 자체를 저지르기 위해 거리낌이 없어진다. 소녀, 사토 레미는 과연 뛰어내린 일을 후회할까?
‘그걸 후회했다면, 마음의 문을 걸어 닫지 않았겠지.’
그 행동을 반성했다면, 애초에 지영이 지금 이렇게 넘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슬슬 착륙하겠다.”
임은진의 말에 창밖을 보니, 한번 와봤던 하네다 공항이 보였다. 지영은 그에 다시 벨트를 매고, 착륙을 준비했다. 스튜어드가 와 착륙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얼마 있지 않아 렌딩기어를 내린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섰다.
내리기 전 지영은 자신을 알아본 팬과 사진도 찍어주고, 사인도 해준 뒤에 가장 마지막에 내렸다.
비즈니스석 뒷자리에 앉아 있던 가드들과 함께 검색대를 통과해 밖으로 나서자 저 멀리 히카리와 신지가 보였다. 늦은 저녁이라 사람이 얼마 있지도 않았고, 라이벌인 신지와 워낙에 신장이 큰 안자이 히카리라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정말 사심 없이 웃으며 손을 내미는 신지.
지영은 신지와 악수하고, 히카리와도 악수한 뒤 곧장 두 사람이 준비한 차를 타고 도쿄로 이동했다.
숙소로 이동했는데, 임은진이 오면서 예약한 메리어트 호텔이었다. 예약한 객실로 올라가서,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사토 레미는 교토대학병원에 있어.”
“교토?”
“응, 그쪽이 엄마 고향인가 봐. 삼 일 전에 도쿄 대학병원에서 수술받고, 그쪽으로 오늘 아침에 간 것 같더라고.”
“아아. 지금 움직이긴 그러니까 내일 가야겠네. 내가 가는 건 아직 모르지?”
“알아. 그 아이 사촌 오빠 통해서 레미 엄마한테 전달했어. 고마워하신다더라.”
“…….”
고맙기는.
이 일이, 누구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지영의 표정이 변하자 히카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영, 자책하지 말아요. 이 일은, 이 나라 사람들이 문제인 거지……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지영을 위로하는 말이 히키라의 성숙해진 어조와 함께 풀려나오니, 분위기가 대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지영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이 아니다?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마. 그 정도까진 아니니까. 그냥, 책임을 느낄 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안도하는 히카리와 신지를 보면서 지영은 정말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지영에게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둘을 제외한 대다수의 일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은 지금, 지영을 악의 축으로 정하고 기사를 미친 듯이 쏟아내고 있었다. 진짜 무슨, 미친 것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지영이 그때 한 말이, 한 소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악을 쓰고 있었다.
그 이전에, 그 기자가 경기 전의 지영의 멘탈을 흔들려고 더러운 질문을 했던 것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공항에서 내려 이곳으로 오면서 지영은 인터넷에 접속해 그런 기사 전문을 전부 살펴봤다.
지영은 악적이 되어 있었다. 한 소녀를 죽음으로 내몬. 솔직히 지영은 그 기사를 보며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죽음으로 내몬 게 누굴까?’
자신일까?
아니면 그녀를 집단적으로 이지메한 일본인일까? 지금도 그녀의 SNS에 들어가면 일본인이 몰려와 왜 안 죽었냐며, 한 번 뛰어봤으니 두 번은 쉽지 않냐며, 병원이니까 차라리 수면제를 먹으라며, 아니면 메스를 훔쳐 손목을 그으라며, 그렇게 좀 죽으라고, 대체 왜 안 죽냐고. 그런 악의 가득한 댓글이 수두룩했다.
그녀를 위로하는 댓글이라도 달리면 그 아래에다가 폭격을 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SNS에도 찾아가 조롱을 달았다.
그런 게, 한가득했다.
거대한 악의. 정말이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소녀가 언젠가 감상평을 남겼던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이중성, 양면성 같은 것도 아니다.
그냥, 보면 다 미치광이 같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눈앞에 신지와 히카리처럼 너무나 멀쩡한 사람도 있었다.
사태를 냉정하게 살펴보고, 누구의 잘못인지 냉정하게 봐주는.
이런 사람도 있는데, 도대체 왜?
“왜 이렇게 다른지 혼란스러운 얼굴이네.”
신지의 씁쓸한 말에 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랬다.
지영은 도무지 이 나라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 지영에게.
“이해하려고 하지 마. 이 나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사는 나도 이해 못 하고 있으니까.”
“……너도?”
“그럼. 지영. 넌 내가 너한테 지고 얼마나 많은 욕을 먹었는지 모르지?”
“……그런 일이 있었어?”
피식.
시합 모드에 들어선 것처럼 서늘한 미소를 지은 신지가 히카리를 힐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왜 너의 다친 발을 공격하지 않았냐고 하더라. 병신같이 왜 그것 하나 못해서 이 나라에 금메달 하나 주지 못 했냐고 비난하더라고.”
“…….”
지영은 단번에 이해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누군가는 페어플레이 했다며 박수칠 것이다. 하지만 절대다수가 멍청하다고 욕할 것이다. 그리고 비단 그건…… 일본뿐만이 아니었다. 한국도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들’이 넘치고 넘칠 테니까.
과정보단 결과를 따지는 사람들.
결과가 오직 전부인 사람들.
그건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일본에도, 한국에도, 전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얘기는 피곤해서였다.
“화제를 좀 돌리자. 두 사람은 어떻게 지냈어?”
지영이 먼저 화제를 돌리자, 신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히카리를 슬쩍 잡아당겼다.
“음?”
“우린 결혼 준비하며 보냈지.”
“어……. 진짜?”
지영이 반색하며 묻자 히카리는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고, 신지는 씩 웃었다.
“좋은 여자잖아. 슬슬 다른 놈이 채갈까 봐 걱정되더라고. 순진한 히카리가 엄한 놈한테 걸려서 고생할 것 같기도 하고 해서, 내가 지켜주기로 했지.”
“이야…… 진짜. 진짜 축하해! 두 사람!”
극단적으로 바뀌는 분위기.
지영은 감탄과 함께 진심을 담아 축하해 줬다.
두 사람의 결혼 때문에 지영은 그래도 잠시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도쿄의 첫날을 그렇게 신지, 히카리의 결혼 스토리에 대해 들으면서 마무리한 지영은 다음 날 이른 아침, 국내선을 이용해 교토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