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00화
400화. 천상계(15)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 지영은 4시쯤 다시 저녁 촬영 예정지로 이동했다. 펜션 앞의 넓은 공터. 도착했을 때 이미 촬영 준비는 전부 끝나 있었다.
“어, 우리가 제일 먼저 왔네?”
차에서 내린 한유진에게 작가들과 대본 점검 중이던 장미 PD가 졸졸 달려왔다.
“일찍 왔네요?”
“네. 5시 전에 모이라고 해서. 아직 다른 팀은 안 왔어요?”
“지금 다 들어오고 있다고 연락 왔어요.”
“아하. 저녁은? 우리가 먼저 준비해도 되죠?”
“물론이죠!”
저녁을 준비하는 것도 출연진들이 전부 하는 것 같았다. 중간에 떡 하니 자리 잡은 메인 펜션으로 들어가 짐을 거실에 놓고, 냉장고를 열어보자 미리 사다 넣어놓은 재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유진과 배구팀은 일단 2층 방으로 짐을 가져다 놓으러 올라가서, 지영과 황석과 함께 먼저 준비하기로 했다.
“석아. 하나씩 꺼내 줘.”
“야채부터 꺼낼게.”
“응.”
석이가 꺼내주는 식재료를 채반에 익숙하게 씻어 넣었고, 한은정 덕분에 칼을 잘 다루는 황석이 버섯을 포함한 손질이 필요한 것들을 잘 정리했다. 20분쯤 지나 한유진이 배구팀과 신경 안 쓴 듯 신경 겁나 쓴 복장으로 내려왔다.
주방으로 온 한유진이 준비가 거의 끝나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어, 뭐야. 벌써 다 했어?”
“네. 금방이죠. 이런 건.”
“왜에 둘이 했어. 같이 하지.”
“원래 나오면 남자가 하는 거랬어요. 누나는 밖에 세팅 좀 해주세요. 저는 발이 불편해서.”
“그래? 알았어.”
한유진이 배구팀과 우르르 나가자, 냉동실을 열어 아이스 팩을 꺼내 아이스박스에 넣고, 거기에 재료를 담아 준비했다. 옮기는 건 힘 좋은 황석이 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자, 임수진이 다가왔다.
“이제 옷 갈아입고, 메이크업 좀 고치자.”
“네.”
지영은 황금세대가 배정받은 건물로 들어가 가방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스타일리스트가 준비해준 대로 입기만 하면 되는 거라 금방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1층 거실에 전신 거울과 의자를 세팅한 임수진이 지영과 황석이 내려오자 손짓으로 불렀다.
기본적으로 크게 고칠 건 없었다.
하지만 조금 손보는 정도로 카메라에 담기는 느낌 자체에도 차이가 생긴다. 공간, 각도 등에 따라 미세하게 차이가 나는 걸 조정하는 게 메이크업의 임무였다.
둘이 정리가 끝났을 때쯤, 강한결과 이성진, 임효중도 돌아왔다.
“잘 놀다 왔어?”
“응. 이따가 얘기하고 얼른 준비해.”
“그래.”
세 사람도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와 메이크업을 수정받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니 가장 먼저 나온 건 역시 배구팀과 황금세대였다. 골프팀은 늦게 도착해서 준비하고 나오느라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았다.
“골프팀 20분쯤 걸린대요! 그때까지 각자 편하게 휴식 취하세요!”
조연출의 목소리에 지영은 근처의 벤치에 가서 앉았다. 건너편 바다가 가까운 곳이다. 슬슬 해가 떨어지기 시작해서 그런지 저 끝에 붉은 물이 살짝 물들어 있어 운치가 있었다. 거기에 파도가 치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지영아, 다리는.”
강한결의 물음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깁스도 하고 있는데 뭐. 너는 어디 갔다 왔어?”
“나? 우느님이랑 시장. 와, 장난 아니더라. 슈퍼스타가 뭔지 진짜 제대로 깨달았다.”
“그래?”
“응. 진짜 장난 아니었어. 시장분들이랑 시민분들 나나 애들은 몰라도 장세리 선배님이나 우느님은 전부 알아보더라. 막 손에 이것저것 다 쥐여주고 그러는데, 엄청났어. 근데 더 놀라운 건, 두 분 반응.”
“반응? 반응이 왜?”
“진짜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한 분 한 분 다 눈 마주치면서 악수해주시고, 인사하고 하는데 그거 보면서 좀 반성하게 되더라.”
“아…….”
“우리도 왜 그렇게까지 받아주지 못하잖아. 몇 명 안 되면 사인도 해주고 그러는데 사람 좀 몰리면 어쩔 수 없지. 하고 그냥 넘어가잖아. 그런데 두 분은 안 그러더라. 사진도 다 찍어주고, 진짜 좀 소름이었어. 멋있었고.”
하긴.
강한결의 말이 맞았다.
어쩌다 마주친 팬 몇 명 정도면 지영도 사인을 해주기는 한다. 그건 뭐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사람이 몰릴 것 같으면 그럴 수 없었다. 사인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닌데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엔 카메라가 있어서 그런가 했는데, 아니야. 카메라 안 돌아가도 그러시더라. 화장실 가셨다가 나오면서 마주친 분들한테도 전부 똑같이 그러시더라고. 대단해, 진짜.”
임효중도 감명받은 얼굴이었다.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조금 아쉬웠다. 다리만 괜찮았으면 자기관리의 끝판왕이라는 우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우느님과 장세리의 얘기를 하다가 보니 20분이 훌쩍 지나갔다.
“출연자분들 전부 모이실게요!”
조연출의 외침에 지영은 바로 일어나서 다시 공터로 갔다. 그리고 시작된 저녁 시간. 저녁은 자유로웠다. 게임도 없고, 그냥 굽고 끓이고 볶고, 비벼서 각자 입맛대로 충분히 배를 채웠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었다면, 역시 운동선수라는 점이었다.
다들 체중 관리를 하는 편이지만 어차피 훈련하면 오늘 먹은 건 하루 이틀이면 전부 빠진다. 그래서 부담을 내려놓고, 양껏 먹으니 역시 기초대사량이 높아서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가장 작은 골프팀의 신지민 선수만 해도 고기를 가볍게 3분이나 먹어 치울 정도였다.
그렇게 저녁을 다 먹고, 모닥불을 피웠다.
이제 저녁 스케줄이다.
단체 토크쇼.
우느님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 왔다.
우정혁의 시작은 골프팀이었다.
우정혁은 정말 누구 한 명에게 치우치지 않고, 전부 충분한 시간을 들여 토크쇼를 이어갔다.
“아 그거 아쉽다…….”
“그러니까요. 그때 제가 넣지 못한 건 제 실력이에요. 제 실력. 그걸 부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때 퍼팅이 조금만, 정말 조금만 원했던 방향으로 갔다면…… 적어도 동메달을 노려볼 수는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드니까 막 너무 아쉽더라고요.”
동메달을 아쉽게 놓친 신지민의 말을 추임새를 넣어가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해 주는 우정혁. 그런 우정혁의 진행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빛을 발했다. 워낙에 대인원이다 보니 토크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정혁은 그 흐름을 정말 잘 살렸다. 지겨울 법하면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청중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러곤 다시 토크를 이어 가는. 그래도 다행인 점은 전원 운동으로는 거의 일가를 이룰 경지에 도달한 선수들이 게스트라는 점이다.
그래서 체력도 좋았고, 또한 집중력도 좋았다.
여기서 후자가 크게 도움이 됐다. 긴 장시간 토크는 자기 얘기나, 흥미 있어 하는 주제가 아니라면 사실 계속해서 집중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선수들은 동업자 정신이라도 발휘되는 건지, 확실히 남의 얘기에도 확실한 반응을 해줬다.
같이 안타까워하고, 같이 즐거워하고.
올림픽에서 최고의 성적을 낸 3종목의 선수들이라 견제 같은 것도 없었다. 아니, 미묘한 견제가 조금 보이기는 했는데, 우정혁은 능숙하게 사전에 그런 기미를 차단했다.
“이야, 벌써 토크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났는데 여러분들 집중도가…… 역시, 대한민국을 빛낸 최고의 선수들네요. 정말, 하하. 이런 토크라면 저는 밤새워서 할 수 있겠어요.”
“다른 토크쇼는 안 그래요?”
장세리가 그 말을 받아주자, 우정혁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계를 흔히, 정글이라고 하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이 격언은 사실 크게 잘못된 말도 아니에요.”
“어머, 음. 하긴, 그러네요. 저도 종종 느껴요.”
“하하. 특히 저는 특성상 어린 친구들도 많이 보잖아요? 이 애들은 집중력이 확실히 부족할 때가 있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급해요.”
“아…….”
급하다는 말에 다들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쟁.
수많은 연습생 사이에서 살아남은 극소수만이 연예계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오면 연습생 때 경쟁했었던 친구들은 그냥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다. 더욱더 쟁쟁한 이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뜻이다.
밤하늘에서 빛나는 스타의 틈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같은 스타가 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인지도가 없는 신인들은 때로 무리를 하곤 한다.
“그래서 실수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그건 애들을 욕할 것도 아니에요. 그 애들은 그만큼 간절하니까요. 그래서 가능하면 이해해 주려고 해요. 제작진 측도 그렇고. 이쪽 길에 인생을 건 아이들이니까요.”
“음음, 그렇죠.”
연기, 혹은 노래.
거기에 인생을 걸고 학업조차 포기한 아이들.
우정혁은 그 친구들에게 가능하면 공정하게, 많은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는 MC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렇게 우정혁의 프로에 자기 애들을 꽂으려고 메니지먼트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파이는 정해져 있었다. 신인보다는 검증된 이들을 쓰는 게 제작진 측에서도 좋다.
그리고 작품은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홍보에 열을 올리는 스타 또한 수두룩했다.
그러니 기회 자체가 적고, 기회가 적으니 나와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한다. 그 과정에서 실수가 나오는 거고. 그걸 가장 잘 이해해주는 게 우정혁이라서 모든 신인에게 사랑받는 것 또한 우정혁이었다.
“그런데 역시 여유가 있는 선수 여러분들과 이렇게 토크를 하니까 마음이 너무 편하네요. 하하. 조급함이 없어. 이렇게 여유가 있으니까, 역시 토크의 질도 좋고. 어후, 저기 봐. 장미 PD 얼굴에 꽃이 폈어요. 아주. 하하!”
앗!
뭐에 홀린 것처럼 실실거리던 장미 PD가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얼른 대본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에 또 웃음이 터졌다. 분위기는 매우 유쾌했다.
“잠시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화장실 다녀오실 분 다녀오시고! 20분 후에 시작할게요!”
딱!
슬레이트를 치고 잠시 토크가 중단됐다.
게스트들은 메이크업을 다시 손보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지영도 화장실에 갔다가 와서 다시 준비했다.
20분쯤 지나, 다시 촬영 시작.
딱! 소리가 나자 우정혁이 기운차게 멘트를 시작했다.
“자! 2시간이 지났어요. 2시간이! 이제 드디어 여러분들이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하하. 황금세대 아이돌의 얘기를 들을 시간이 됐습니다! 자! 박수!”
우와아!
스태프까지 나서서 손뼉을 치며 반겨주자, 지영은 자세를 바로 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어흐, 인사성도 밝지. 자, 그럼…… 역시 우리 강지영 씨부터? 아니지. 아니야. 우리 지영 씨는 맨 마지막으로 해야겠어. 그치, 장미 PD?”
응응!
홱홱홱!
고개를 빛의 속도로 끄덕이는 장미 PD. 그 모습에 다시 웃음이 한 차례 터졌다. 정말로 속이 빤히 보이는 솔직한 PD다. 그러나 속이 시꺼먼데 그걸 숨기는 이들보다 백배는 나아서, 지영은 오히려 좋았다.
“그럼 시작으로, 그래. 그래도 우리 성진이로 합시다.”
다 존대를 하면서도, 딱 이성진에게만 이름으로 친근하게 부르는 우정혁. 우정혁 정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이는 내가 이성진이를 이렇게 아낀다! 이런 친밀도를 대놓고 이곳에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방송에도 나갈 테니까, 이성진의 입장에서 결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올림픽 금메달. 황금세대의 금빛 질주의 첫 스타트를 끊은 소감은 어땠어?”
우정혁의 질문에 이성진은 좀 쑥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잘해야 한다? 잘해냈다? 내가 친구들 길에 초를 뿌리진 않았구나? 하는 정도? 딱 그 정도였어요.”
“그래? 되게 감상평이 간단하네?”
“하하, 정말 그런 생각이 전부였거든요.”
“정말?”
“네. 좀 압박은 있었어요. 경기 전에. 유도 경기는 다른 종목과는 다르게 하루에 한 체급씩만 했잖아요. 보통 다른 세계 대회도 그렇게는 안 열거든요. 이틀이나 삼일 안에 전부 치르는 방식이라, 같이 시합을 뛰는 친구가 있다는 게 진짜 도움이 많이 돼요. 특히 저는 지영이랑은 거의 같이 시합 뛰고. 그런데 그게 없으니까, 좀 힘들긴 했어요.”
“그러네. 그렇겠네. 그래도 시합 잘하더라. 막판까지 시원시원하게. 참, 손가락은 어때?”
“아, 손가락요. 많이 좋아졌어요. 수술받은 지도 좀 됐고.”
“그래, 다행이다. 야. 하하. 금메달 축하해. 정말 축하한다. 하하!”
우정혁이 어깨까지 두드려 주며 애정을 표했다.
좀 더 토크를 이어가며 임효중, 황석, 강한결 순으로 지나갔고, 지영의 차례가 왔다.
여기 보세요. 짝!
선생님이 초등학교 1, 2학년 집중시키는 것처럼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그렇게 몰려든 시선이 부담될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다.
때에 따라, 주목받을 때 오히려 더 명경지수를 유지하는, 지영은 전형적인 그런 스타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