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92화
392화. 천상계(7)
“야, 야! 죽을래?”
지영의 장난에 얼굴이 붉어진 한유진이 다가와 지영을 막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런 한유진의 행동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미 PD도 그렇고, 스태프와 작가들도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오늘 게스트로 출연한 선수들과 장세리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도 놀란 눈치였다.
한유진이 마당발인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설마 지영과도 이런 사이일 줄은 몰랐던 거다. 장난을 멈추고 돌아선 그녀는 자신을 놀란 눈으로 보는 제작진과 게스트를 보며 오히려 놀란 표정이 됐다.
“뭐야? 왜 이런 눈빛들이야?”
그녀의 말에 뒤늦게 합류한 여자 유도 선배, 김성혜가 대신 답했다.
“언니가 지영 선수랑 친한 것 때문에 놀란 것 같은데요?”
“아 진짜? 근데 그게 왜? 내가 지영이랑 친하다고 많이 말하지 않았나?”
“했죠. 했는데…….”
“뭐야. 다 허언인 줄 알았던 거야? 아니 그리고 배구 너넨 내가 지영이 메달 가져와서 기운도 나눠주고 했는데 왜 그런 눈이야?”
한유진이 눈에 쌍심지를 켜자 양효선이 손을 저으며 한유진의 의도된 폭주를 멈췄다. 역시 친한 선후배라 그런지 합이 잘 맞았다.
“지영아. 우리 친하지? 그치?”
한유진의 말에 지영은 살짝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친하다, 편하다로 따지면 장세리보단 역시 한유진이 더 가까웠다. 장세리는 너무 대선배시고, 거기에 회사 대표님이다. 그래서 깍듯함이 저절로 나가지만, 한유진은 그런 거 없이 지영을 정말 편하게 대해줬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고, 통화도 하고, 톡도 하고 그런 사이였다.
그런데 그런 게, 제작진의 눈에도 신기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사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만, 이는 생각보다 특수한 상황은 아니었다. 운동계 선배고, 후배다. 이 노는 언니들이란 예능에서 알게 되어 친분을 유지했다. 여기까진 솔직히 뭐 그리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지영이 인간계가 아니라, 천상계로 올라가면서 상황이 변했다.
지영과 친하다는 건, 하나의 벼슬이 되어버렸다. 물론 벼슬이란 말은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극단적으로 했을 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지영과의 친분은 연예계에 매우 강력한 권력을 자랑했다. 지영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였다. 연예계 활동을 분명 적지 않게 했는데,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정말 극소수였다.
예능 출연은 노는 언니들 한 번이 끝이었다.
그 전에 임스테이2 게스트로 갔던 적이 있지만, 그건 메인이 게스트가 아니라 호스트라 크게 임팩트가 없었다.
그런데 예능 출연만 안 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인터뷰는커녕, 제작발표회마저 불참했다. 오직 작품만 찍고, 그 어떤 방송 활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시상식마저 불참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행보다. 그런데도 방송가는 강지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외모와 실력, 그리고 그가 가진 파급력 자체가 정말 말도 안 되게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는 언니들에 나와서 한유진은 종종 지영과의 일화를 공개했다.
올림픽이 가까워지면서, 황금세대에 관한 인기가 다시 급부상하기 시작하자 더 자주 언급했다. 실제로는 작가들이 그래주길 원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사실 전부 믿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지영의 표정과 반응을 보니, 두 사람은 진짜 친했다. 그러니 지금은 열일 해야 할 때! 작가들은 얼른 스케치북에 ‘최근에 만나서 한 얘기!’, 이렇게 급히 적어서 올렸다.
“너 너, 지영이 그만 곤란하게 하고 이리 와!”
“아 언니! 안 믿으니까 그러죠! 와!”
장세리가 상황을 일단 정리했다.
그러면서 한유진을 끌어당기자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한유진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너 너, 저번에 지영이 만나서 밥 먹었다면서?”
“네! 한국 들어오자마자 이틀 뒤 바로? 아! 유진이랑 같이 봤어요!”
“응? 너랑 네가 어떻게 같이 봐?”
“아니요! 지영이 여친!”
“아 맞네.”
갑자기 소환된 양유진.
지영은 그게 부담스럽진 않았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이름이 언급되자 조금 부끄러운 건 사실이라 살짝 얼굴을 붉혔다. 뭐, 티도 안 날 정도로 아무도 눈치 못 챘다. 그리고 이렇게 이름이 언급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양유진이야 신데렐라로 세상 유명했고, 이런 부분은 알아서 편집해 줄 것이다. 임은진이 나중에 따로 부탁도 할 거고 말이다.
“저 저, 유진이랑도 친해요. 지영이 아마 잰 모를 거야. 종종 내가 유진이 만나서 밥 사주는 거.”
“알거든요?”
“유진이가 말했어?”
“네. 지원이랑도 종종 본다고 했어요.”
“응. 현정이 만나면 가끔 같이 밥 사주고 하지. 야, 내가 이런 사람이야!”
뿌듯.
어깨에 힘을 빡 주고 양효선이 오…… 하는 감탄에 맞춰 으스대는 한유진. 역시 방송하는 사람은 달랐다. 뒤에서 슥 받쳐주는 효과음에 저렇게 단숨에 반응하다니. 애드리브를 빼면 딱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는 드라마와는 역시 매우 달랐다.
그게 신기했다.
“자, 자,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가만히 있어 봐. 애들 배고파서 배 문지르잖아. 식당으로 먼저 가자. 가서 얘기해.”
“아 언니, 누가 보면 꼭 제가 막 설친 것처럼…….”
“아니야?”
“맞아요. 헤헤. 죄송합니다. 간만에 후배들 보니까 텐션이 올라서…….”
“오늘 주인공 너 아니다?”
“넵! 자중하겠습니다!”
슬쩍 빠지는 한유진을 보며 이성진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와, 저 누나도 캐릭터 진짜 장난 아니네. 예능 진짜 잘하신다.”
“잘하는 거야?”
“어, 완전. 오프닝 완벽하게 땄잖아. 분위기 어색하던 것도 싹 날아갔고.”
“아.”
이성진의 말을 들으니 그런 것도 같았다. 선수들 면면을 살피니 확실히 카메라 수십 대를 앞에 두고 있어 받던 부담을 조금은 내려놓은 모습이었다.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이 편해진 거다. 이런 장난에 의도치 않고 불을 지핀 지영도 실제로 지금 마음이 매우 편한 상태였다.
“움직이자고. 저기 앞에 가든 보이지? 저기가 산채 정식 하는 덴데, 마침 가을이라서 버섯이 아주 좋아. 송이랑 능이도 준비 넉넉히 했고. 아침이니까 부담 없이 먹고, 점심 저녁 화끈하게 가자고. 괜찮지들?”
“네에!”
아무렴, 괜찮지.
누가 한 말인데.
그래도 나이가 제법 찬 선수들이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하는 건 좀 신기했다.
그러다 지영은 여자 선수들에게 장세리는 우상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운동하는 여자들치고, 특히 엘리트 코스를 거친 선수치고 장세리를 싫어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말 그대로 우상, 아이돌이었다.
리치 언니.
의미 그대로, 진짜 리치 언니.
황금세대를 영입하며 엔터 쪽에서 대박이 난, 떠오르는 라이징 엔터의 대표이기도 했다. 그래서 운동선수는 물론이고 연예인들도 이쪽으로 오길 많이 희망했다. 하지만 장세리 대표는 아직은 회사의 규모를 키우지 않고 있었다.
신중하게, 상황을 봐가면서.
그래서 지영은 더욱 그녀가 믿음이 갔다.
딱!
슬레이트가 내려왔다.
“자, 자! 카메라 팀! 식당으로 먼저 가서 준비해 주세요!”
장미 PD의 외침에 카메라 팀이 곧장 장비를 정리해서 펜션 건너편 길가에 있는 가든으로 이동했다. 가든의 위치도 독특했다. 그 아래는 낮은 절벽이 있고, 절벽 아래는 바로 바다다. 경치 면에서도 진짜 좋은. 목이 대박이었다.
카메라 팀이 움직이자, 장미 PD가 대표인 장세리에게 다가왔다.
“식당에 세팅 끝나면 그때 움직이실게요. 여기서 20분? 그 정도만 기다려 주세요. 괜찮죠?”
“아, 물론이죠.”
“넵! 그럼 준비되는 대로 연락하겠습니다. 참, 이동할 때도 카메라 붙을 거예요!”
그렇게 외치며 멀어지는 장미 PD.
장미 PD는 구도 때문에 먼저 가고, 작가들이 남아서 게스트에게 붙었다. 저번에 미팅에서 본 서승미 PD가 황금세대에게 다가왔다.
“혹시 버섯이나 이런 거 알러지 있으신 분 없죠?”
“네. 다 잘 먹습니다. 음식에 관해서는 알러지는 전혀 없어요.”
강한결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하자, 서승미 PD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어졌다. 아침이라 찬 공기에 하얗게 질려 있던 피부에 홍조가 피어나는 그 반응이 극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거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반응일 건데, 굳이 건드려서 민망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특히 작가는 PD만큼이나 프로그램의 실세다. 괜히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는지 얼른 몸을 돌려 호다닥 도망가는 서승미 PD.
지영은 그 모습에 그냥 작게 웃고 말았다. 그런 지영에게 같이 훈련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서 가장 연관이 많은 선배가 다가왔다.
“여러분. 안녕?”
“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꾸벅.
지영이 먼저 인사하자 친구들도 다 자세를 잡고 제대로 인사했다.
김성혜였다.
아주 오랫동안 여자 대표팀의 에이스로 활약한. 도쿄에 이어 아시안 게임까지 출전했지만, 안자이 히카리라는 천재에게 탈탈 털리고 끝내 대표팀을 은퇴한 선배였다. 도쿄 이후 노는 언니들에 종종 나오더니, 지금은 고정이 된 선배였다.
“아유, 그러지들 마요. 나 혼나요. 이런 거 나가면. 하하.”
운동, 혹은 성적이란 주박에서 벗어난 김성혜는 확실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원래도 좀 동글동글한 느낌이 강했지만, 관리를 살짝 놓은 지금은 그런 느낌이 좀 더 강해졌다.
“반가워. 반가워요. 정말. 그리고 고맙고, 미안하고.”
아주 많은 의미가 담긴 말에 지영을 포함한 황금세대는 그냥 웃었다. 그녀가 은퇴를 결심했던 아시안 게임 때문에 황금세대는 아주 혹독한 일을 겪었다. 그리고 그게 시발점이 되어 황금세대는 한 번 은퇴했었고, 다시 돌아왔을 때부터 ‘일부’ 언론과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전쟁은 사실 승기가 이쪽으로 기울었지만, 아직 종전되지 않았으니 현재진행형이었다.
미안하단 말은, 그에 관한 사과였다.
그리고 고맙다고 한 말은 대한민국의 유도를 다시금 세계에 우뚝 세워준 것에 대한 업계 선배의 인사였다. 지영은 그 인사와 사과에 담긴 인사를 대번에 파악했고, 그래서 고개를 다시 정중히 숙여서 받았다.
존중받을 만한 선수였다.
비록 그녀는 조인선 교수 이후 여자 유도 올림픽 금메달이란 위업을 세우진 못했다. 올림픽이란 커다란 무대에서 메달을 목에 걸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 한국 유도를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지금도 코치로 일하며 후배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런 행보만 봐도, 그녀는 유도 업계에선 존경받을 만한 선수였다.
그런 김성혜에게 이성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희 후배잖아요? 마음껏 자랑하셔도 돼요!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해주세요!”
“어, 진짜요? 그래도 될까요?”
“넵! 진짜!”
“하하, 고마워.”
조금 늦게 합류한 김성혜는 한유진이 지영과의 친분을 내세우며 자랑할 때,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좀 씁쓸한 웃음이었다. 한유진이 지영과 친하고, 지영과 친하기에 황금세대 전체와도 잘 아는데, 같은 종목 선배인 김성혜는 오히려 그러지 못했다.
세대가 달라서 함께 훈련받은 적은 없었다.
김성혜가 은퇴할 타이밍에 황금세대는 한국을 딱 대표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다. 전국체전이나 선발전 때 마주치긴 하지만, 그땐 선수들이 예민해서 말 붙이기도 본래 힘들다.
그래서 거의 접점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의기소침한 김성혜를 이성진은 놓치지 않았고 이렇게 말해줌으로써, 김성혜는 그래도 이제 어깨를 펼 수 있게 됐다. 이따가 촬영 중에 자연스럽게 자신이 아는 황금세대 썰을 풀기도 할 거고 말이다.
그럼 당연히 방송도 풍성해지고, 좋아진다.
이제야 표정이 풀린 김성혜가 이성진이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한 뒤, 지영을 향해 물었다.
“금메달 정말 너무 축하해. 그리고 지영이 다리는 어때?”
“감사합니다. 많이 좋아졌어요. 사실 오늘 그냥 걸어도 되는데, 아직은 최대한 자제하느라 깁스한 거예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정말 다행이다. 아, 진짜 다행이야. 멋지다. 멋있어. 너랑 너희들은 정말 다 잘됐으면 좋겠어.”
“선배님도요.”
“하하, 고마워. 어, 이동할 건가 보다. 이따 또 얘기하자?”
“네.”
출연자들 이제 식당으로 이동할게요!
김성혜가 손을 흔들며 다시 돌아가자 조연출이 크게 외쳤다. 지영은 천천히 목발을 짚고 이동했다. 황석과 강한결이 옆에서 보조를 맞춰줬다. 이른 아침이지만 도로를 건너야 했다. 차가 없는 것도 아니라서 길가를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런 출연자에게 VJ가 많이 따라붙었다.
“아, 바다 냄새 슬슬 난다.”
“그러게. 우리 바다도 오랜만이지 않나?”
“미국에서는 호수였으니까, 오랜만이지?”
“진짜 바쁘게 산다, 우리.”
황석과 강한결의 말에 지영도 공감했다. 친구들은 그래도 이제 휴식기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준비 중인데, 아마 준비해도 내년 아시안 게임이 끝난 이후에 본격적으로 할 가능성이 높았다. 반대로 지영은, 당장 촬영이 코앞에 와 있었다. 벌써 홍진아를 포함한 배우들은 이미 알레스카로 떠난 상태였다. 매일 같이 현장 사진이 오는데, 솔직히 좀 미안했다. 그래서 이번에 예능 찍고 나서, 일주일 안에 지영도 출국할 예정이었다.
“야,”
툭, 툭툭.
강한결이 팔꿈치로 어깨를 툭 치면서 지영을 상념에서 깨웠다. 왜? 하고 돌아보자 강한결이 턱짓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오호라…….”
뭐가 그리 좋은지 세상 밝게 웃으며 말을 거는 박세인과 그런 박세인의 말을 미소를 지은 채 들어주는 임효중이 보였다.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가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