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83화
383화. 휴식(4)
운동선수에게 휴식이란?
옛날엔 최소화하는 것, 정도의 인식이었다. 제대로 된 지식이 없으니 그냥 굴리고, 또 굴렸다. 밥 먹이고 재우고, 이 정면 충분한 휴식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변했다. 휴식의 중요성은 훈련의 레벨로 올라왔다.
제대로 된 휴식.
이 휴식 간 훈련으로 자극받은 근육이 성장하고, 회복된다. 이것만 해도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이때 멘탈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것도 훈련 못지않게 중요해졌다.
선수들은 이를 위해 제각각,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즐겼다.
어떤 선수는 여행을 다니고, 어떤 선수는 부족한 공부를 하기도 하고, 어떤 선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도 했다. 자신의 취향, 성격에 맞춰야 휴식의 효과도 극대화된다. 그래서 선수마다 휴식 방법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지영은?
여행이나 공부보단, 아무것도 안 하는 쪽이었다. 원래 이게 지영의 스타일이었다. 휴식할 때는 밖에 나가서 활동적인 일을 하는 것보단, 집이나 숙소에 박혀 아무것도 안 하고 에너지를 비축하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지영은 이런 휴식을 거의 취하지 못했다.
왜?
이유야 지극히 간단했다.
선수 말고도 직업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영은 딱 이틀을 쉬었다. 입국한 가족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고, 충주로 내려온 지영은 시외에서 나의 무사님 미팅을 잡았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했다.
나의 무사님은 이미 프리 프로덕션도 끝난 상태였다. 대본, 콘티도 나왔고, 로케이션 일정도 잡혔다.
하지만 그게 지영의 부상으로 전부 어그러졌다.
이에 관한 논의가 빠르게 필요했다. 그래서 충주에 도착하자마자 지영은 미팅을 잡았다. 다들 발을 동동 구르던 상태라 지영이 연락하자 바로 다음 날 약속이 잡혔다.
“와, 여기 좋네?”
오전 11시쯤 충주에 도착해 지영을 픽업한 임은진은 약속 장소로 가며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그죠? 여기가 시골이라서 이런 멋이 있어요.”
“충주 정도면 시골은 아니지.”
“시골이에요. 하하.”
인구 20만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젊은이는 나가고, 중장년층이 유입되는 현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낙후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발전하지도 않은. 지영의 아파트 근처가 아마도 마지막 개발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게 충주였다.
하지만 이런 도시라서 시내를 벗어나면 한적한 시골 풍경 그대로였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SNS 감성으로 인식이 변하면서 시골은 그 자체로 감성, 혹은 멋으로 포장이 되었다.
충주에는 그런 SNS 감성에 부합되는 카페가 정말 많이 생겨났다. 지영이 약속 장소로 잡은 곳도 그런 곳이었다. 어머니와 양유진이 나들이를 갔다가 알았다는 곳인데, 음식과 멋, 그리고 가격을 모두 잡은 곳이라고 양유진이 극찬했던 곳이었다.
‘커피도 안 사 마시는 유진 누나 성격에 또 가고 싶다고 할 정도면 뭐, 진짜 괜찮은 거지.’
양유진은 여전히 공장에 다닌다.
그리고 그만둘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했다. 먹고, 입고, 자고. 이 중 어느 것도 지영에게 의지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돈을 쓰는 것에 굉장히 인색했다. 지영과 데이트할 때는 이젠 좀 팍팍 쓰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본인 몫의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쓰는 거였다.
그런 양유진이 다시 가고 싶다고 했을 정도의 퀄리티면, 정말 괜찮은 곳일 게 분명했다.
그 카페는 확실히 입구부터 범상치 않았다.
꽃길이 아니라, 카페는 마치 동화로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켰다. 마치 북유럽의 숲처럼, 난쟁이와 요정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서행하는 차 안에서 보는데도 마음이 편해지는.
정말 그런 곳이었다.
그런 입구를 지나 주차장에 도착한 지영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보통 20대 초반은 이런 풍경에 크게 관심을 주진 않는다. 와, 감탄하긴 하겠지만, 거기서 끝이다. 이 풍경이 주는 정취에 빠지기에는 20대는 너무 이르다.
나이로 따지면 지영도 20대 초반이지만, 지영은 애초에 여기에 나이를 좀 더 줘야 했다.
지금의 나이에 딱 10살을 더 주면 된다. 거기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특수한 과거사까지 얹어서.
10살 플러스와 그 과거사가 지금 눈에 담고 있는 정취를 특별하게 만들어줬다. 좀 더 여유 있게 이곳을 둘러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러긴 힘들었다. 목발을 짚고 숲길을 노니는 건, 다리 하나를 쉬게 하면서 다른 몸 전체를 혹사하는 짓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주변을 둘러보는 건 아쉽지만 포기했다.
카페도 특별했다.
이 카페는 상당히 넓은 부지를 썼다. 콘셉트를 보면, 숲속의 오두막, 정도였다. 아니, 이게 전부였다. 옹기종기, 아기자기, 작은 오두막이 인원별에 맞춰서 중앙의 메인 카페를 주변으로 설치해 놨다.
즉, 메인 카페를 제외하고는 전부 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예약제였고, 당연히 예약하고 왔다.
예약한 룸에 들어간 지영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CCTV 촬영 중, 과도한 애정행각 금지! 라는 문구였다.
그 문구에 피식 웃은 지영은 편한 자리에 앉아 폰을 꺼내 이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지영아!
“저 도착이요. 누난 어디세요?”
-나? 가고 있지. 잠깐만? 오빠, 얼마나 걸려? 30분? 지영아, 30분 정도 걸린대. 늦진 않겠다.
“네. 홍 감독님이랑 작가님도 같이 와요?”
-아니? 둘은 따로.
“네. 천천히 오세요.”
-아니? 얼른 갈 건데? 오빠 밟아! 지영이 벌써 도착했다잖아! 어딜 대스타가 지금 벌써 도착했다는데 늑장을 부려?
피식.
이거 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그래서 더 장난치기 전에 끊을게요. 하고 답도 듣지 않고 끊어버렸다. 폰을 보면서 잠시 기다리다 보니, 정은정 작가와 홍진아 감독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와, 지영 씨.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금메달 정말 축하해요! 밤새 보면서 정말…… 호호.”
정은정 작가의 부담 넘치는 칭찬에 지영은 다시 감사합니다. 하고 짧게 답을 했다.
정은정 작가와 인사를 나누고, 홍진아와도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몸은 괜찮아요?”
“좀 오래 쉬긴 해야 하는데, 당장은 크게 나쁘진 않아요. 깁스하고 있어서 아픈 것도 거의 없고요.”
“후우, 그래요.”
안도의 미소를 짓는 홍진아 감독. 사실 연출을 맡은 입장에서 지영의 부상은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보다도 셌다. 당시 영상을 보고 홍진아는 기겁했다. 진짜 지영이 마지막에 기적적으로 몸을 써서 피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끔찍한 일을 볼 뻔했다.
물론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그런데 그런 몸으로, 올림픽이란 세계 최고의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내기까지 했다. 엄청난 혈투 끝에 말이다.
홍진아의 기준에 이런 지영은 사실 이해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녀는 비현실을 연출한다. 그래서 누구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익숙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준에서도 지영은 참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
“지영 씨를 보면 참 현실적이지가 않아요. 요즘 들어 점점.”
“하하, 뭐 다를 거 없어요. 그냥……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 뿐?”
“호호,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알죠?”
“네.”
재수 없을 거다.
어쩌다 보면 자신처럼 된다고 말하고 다니면.
“지영 씨, 이거!”
정은정이 커다란 종이가방을 건넸다. 뭔가 싶어 봤더니 책이었다. 정확히는 대본이었다. 24부까지 나온 대본 풀 세트. 지영은 대본을 받자 눈이 반짝였다. 보통 작가들보다 정은정은 대본이 많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대본을 다른 드라마 작가들과는 다르게 쓰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단 소설부터 썼다. 소설로 1화 분량을 쓰고, 그다음 그 소설을 대본화한다. 그래서 그녀는 소설과 대본, 언제나 이렇게 두 개씩 나왔다. 그런데 지영은 이게 더 좋았다. 그녀가 정은정 작가의 작품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이걸 보고 나서였다.
지영은 이미지 트레이닝에 이골이 났고, 누구보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잘하는 선수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상상을 잘하고, 좋아하기도 했다.
유일한 취미도 책 보는 거였다. 여기서 몇몇 문제가 생기는데 지영은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배우가 아니었다. 그래서 딱히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받아도 이걸로 캐릭터 조형, 작품 전체를 살피는 안목 자체가 떨어졌다.
아니, 더 정확히는 정보가 부족했다. 지영은 완전체를 대입해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편이었다. 요즘은 데이터에 잘하는 선수는 전부 있으니까, 그 선수 자체를 확실히 상상으로 끌어올 수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나 대본, 이런 것들은 지영이 상상하기에 충분한 동력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지영은 정은정 작가의 방식이 좋았다.
온전한 소설로 흐름을 전부 파악하기 좋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역할을 확실하게 알 수 있어서였다.
“좀 봐도 되죠?”
“그럼요!”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지영은 1화 소설을 꺼내 창가의 의자로 가서 앉아 바로 펼쳤다. 나의 무사님 2부는 재가 협곡에서 떨어지는 걸로 끝났다. 거기서 떨어지면서, 재는 2부 전체를 따졌을 때도 가장 행복하게 보였을 미소를 짓는다.
선고와 함께 있었을 때도 지은 적이 없는 미소를 보여주고, 재는 협곡 아래 강물로 떨어진다.
그렇게 끝나지만, 재는 돌아온다. 라는 문구가 강물에 흘러가며 암전되고, 시즌2의 끝을 알린다. 그렇게 끝나지만 대놓고 재는 돌아온다고 해줬기에 팬들은 누구도 성토를 보내지 않았다.
그럼 3부는?
겨울이다.
한겨울이 되었음에도,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본래 전쟁은 겨울에는 잘 치르지 않는다. 특히 혹한의 겨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미 벌어진 전쟁이라면 다르다. 겨울이고 여름이고, 그런 걸 따지지 않는다. 적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파고들어 와 목줄을 물어뜯으려고 할 테니, 겨울인데 설마 쳐들어오겠어? 하는 생각은 패배의 확실한 지름길이었다.
그걸 양측도 알기에, 교전은 계속 벌어졌다.
전선은 밀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곳곳에 초소를 지었고, 이 초소를 중심으로 겨울은 난타전이 펼쳐졌다.
초소를 뺏고, 뺏기고.
척후의 역할까지 동시에 하는 곳이기에 제국과 이족은 이 초소를 두고 치열하게 부딪쳤다. 삭풍을 넘어, 동토에서 불어온 눈보라가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혹한의 대지가 되었음에도.
초소에는 칼날이 춤췄다.
전략적으로 배치된 초소는 마치 장기와 같았다. 일진일퇴. 깊숙이 돌격해 적진을 교란할 수 있는 초소가 있는가 하면, 어느 곳으로도 빠르게 지원 갈 수 있는 초소가 있고, 뚫리면 적 수뇌부까지 내달릴 수 있는 초소도 있었다.
그렇기에 강을 뒤로 두고 평야와 산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50개의 초소전. 3부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겨울, 죽음. 피.
그리고.
공허.
특히 공허라는 키워드를 극대화하는 장면의 연속이다.
칼이 번쩍이면, 누군가는 죽는다. 칼을 휘두른 자이거나, 휘둘러진 칼에 맞은 자이거나. 누군가는 반드시 죽었다.
그렇다 보니 정신에 부하가 점차 걸리기 시작했다.
이곳을 지키지만, 누구를 위한 지킴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이곳을 지켜서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이곳을 빼앗아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이곳에, 이 혹한의 대지에 흘리는 피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
지키고, 습격하고, 빼앗고, 탈취하는 이들의 머릿속에 점차 쌓이는 이 근원적인 의문은 결국 전장 전체에 거대한 공허를 뚝, 떨궜다.
이 거대한 공허는 이어서 허무를 낳았다.
빼앗아도, 막아내도 즐겁지 않아졌다. 곧 다시 도로 빼앗기거나, 재차 이어진 습격에 다시 빼앗길 것이라는 걸, 자각해서였다.
그게 몇 해가 계속됐다.
제국은 숨을 골랐다. 초소전을 적극적으로 유지했다. 아니, 의도적으로 그렇게 전쟁의 양상을 몰고 갔다.
일견 보면 휴전 같지만, 그 안에서는 허무와 공허에 잡아먹힌 기괴한 전투만 지속되고 있는.
1년.
2년.
3년.
그렇게.
초소전은 3년이나 지속되며 어느 선을 전장 전체에 주욱, 그어버렸다. 지키는 자와, 빼앗는 자의 행동에 의지가 빠진, 인형극. 이 인형극에 지영은 가슴이 답답해져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이야기가 가진 힘이, 가슴을 짓누르는 탓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더더욱, 그 이야기에 빠져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