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71화
371화. 라이벌(2)
결승전.
지영은 많은 결승전을 경험했다. 그래서 사실 이번 결승전도 크게 떨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산이었다.
‘역시 올림픽은 올림픽인가 보네…….’
대회의 무게감이 다르다 보니까, 결승전을 기다리며 서로 마주 보고 선 지금, 엄습하는 압박감 자체가 달랐다.
지영이 첫 결승전을 경험한 건 초등학교 때였다. 그때 처음으로 도 대회 결승전에 올랐으니, 인생 첫 결승전 경험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리고 그때 도 대회를 시작으로 전국 대회, 소년체전, 전국체전 등으로 결승전을 경험했고,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을 시작으로 세계 대회에서도 출전한 모든 대회에 결승전에 올랐다.
아, 세계 선수권을 제외하고.
그렇게 결승전 경험이 많아서 지영은 이번에도 사실 괜찮을 줄 알았다. 그리고 실제로 입장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발목의 부상이 조금 걱정됐지만, 실제로 정신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과 함께 등장해 신지와 마주 보고 서자, 확실히 심장의 두근거림이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딱 처음 결승전에 올라갔던 꼬마 강지영의 심장이 됐다.
그리고 신기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미야모토 신지의 표정도 비슷했다.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미야모토 신지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그를 깊이 연구했기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긴장한 만큼, 미야모토 신지도 긴장했다는 것을.
시선이 마주쳤다.
“…….”
“…….”
잠시 빤히 서로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서로 동시에 작게 웃었다. 그리고 이런 미소를 카메라가 잡았는지.
“아, 강지영 선수가 웃습니다! 여유가 있어 보여요!”
“네, 저 미소를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
“조인선 위원님. 어떻습니까. 이번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인의 답을 듣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유도 전문가의 냉정한 판단이 듣고 싶으세요?”
경기장은 고요했다.
심판이 입장 전이다. 보통 이때는 지영의 팬덤이 열렬한 응원을 보냈는데 결승전은 조용하기만 했다. 물론 아예 소란이 없는 건 아니다. 그냥 이전 경기보다는 작아서, 경기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계석의 목소리가 아주 잘 들려왔다.
특히 그중에서도 조인선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팀 훈련 고문이셔서, 자주 듣는 목소리라 그런지 더 귀에 익었다. 하지만 잠시 뒤, 대화 중인 것 같은데도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이크 음량을 조절한 것 같았다. 궁금해졌다.
조인선 선배님은 과연, 이번 경기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지영이 그런 기색에 저도 모르게 관중석을 보자, 결승전을 기다리며 중계 준비 중이던 배영우 캐스터와 조인선 해설이 얼른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마이크 볼륨이 잘못되어 있어서, 경기를 준비 중이던 강지영 선수가 들은 것 같습니다. 이쪽을 바라보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네, 강지영 선수는 다시 시합 신지 선수를 직시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아, 그건 그런데요. 중계 채널을 통해 조인선 위원님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의견이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조인선 위원님. 의견을 이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음…….”
조인선 교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을 정리하며, 저 멀리 결승전을 기다리는 후배 강지영을 바라봤다. 기특한 후배였다. 처음 강지영의 부상 정도를 들었을 때, 그녀는 아쉬웠다. 모든 체급이 소중하지만, 그래도 강지영은 올림픽 유도 경기의 메인 매치와도 같았다.
일본.
이제 50줄에 접어든 그녀가 현역일 때도 일본과는 앙숙이고, 원수 사이였다. 솔직히 선수끼리야 인사도 하고 지내기도 하지만, 국민의 정서는 일본에게 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일단 패배하는 순간 신문 1면에 나가고, 그걸로 역적은 확정이었다.
축구나 야구, 농구만 그런 게 아니라 종목 전체가 그랬다.
특히 올림픽 같은 대회에서는 지는 순간……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벌어졌다. 그녀 때도 그랬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그녀도 현역 때는 일본 선수에게 지면 분해서 치를 떨었다. 후배들이 지면, 그 모습이 또 한심하기도 했다. 악으로 깡으로라도 이겨야 하는 것. 그녀는 옛날 사람이었고, 의지와 깡, 악이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흔히 말하는 꼰대지만, 그녀는 유도만큼 꼰대 방식의 훈련과 정신상태가 잘 먹히는 종목도 없다고 생각했다.
‘다들 빠져도 너무 빠졌지.’
시대가 변했다.
런던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런던 이후부터는 차마 말로 하기 힘들 정도였다. 참혹하단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 꼰대라고 불러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최고가 되었으니까.
요즘 말로 꼰대 기질을 빼는 건, 그녀 본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그녀는 한동안은…… 일본의 시대가 계속될 거로 예측했다.
일본은 룰까지 바꿔가며, 그 룰에서 최고가 되기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 런던 전후로 힘을 못 쓰던 이유가 그거였다. 그렇게 세대교체와 함께 일본은 철저한 준비 끝에, 최고가 되었다.
오노 쇼헤이 세대의 모든 일본 선수가 세계를 휩쓴 게 그 증거였다.
그런 흐름이 그녀는 한동안은 지속될 거로 예측했지만, 그 예측은 실패했다. 마치 어딜 감히? 하는 것처럼 등장한 황금세대 덕분이었다.
강지영.
황금세대의 리더는 아니나, 황금세대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존재.
유명세도 유명세지만, 하필이면 이 친구의 체급엔 거의 동급의 천재가 존재했다.
미야모토 신지.
강지영이 없었으면 세계를 휩쓸었을 불세출의 천재. 이 친구로 인해 73체급은 원래도 인기가 많았던 체급인데, 정말 특별한 체급이 되어버렸다.
그런 체급의 결승전.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체급의 결승전.
“조인선 위원님?”
“아, 죄송합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두서없이 뱉어내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보자면, 아쉽지만 우리 강지영 선수의 패배가 예상되네요.”
“음…… 역시 부상 때문이겠지요?”
“네. 강지영 선수는 올라운더 선수라서 중심축이 두 개라 봐도 무방해요. 그러니 기술을 걸 때 충분히 다른 쪽으로 중심을 옮겨서 거는 게 가능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강지영 선수는 왼쪽 자세고, 그렇기에 오른발에 중심이 많이 실려요. 하지만 하필 다친 부위가 오른발이에요.”
“치명적이라는 얘기군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죠. 공격과 방어의 중심이 될 발이니까요.”
“그럼 역시 경기에서 이기기는 힘들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게 보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실력, 기본적인 상식을 빼고 나면…… 그래도 저 아이는. 아, 죄송합니다. 저 선수는 강지영이잖아요?”
조인선 선수님이 볼 땐 ‘아이 맞짘ㅋㅋㅋㅋ’ 하는 댓글이 우르르 올라왔고, 그리고 공감했다. 냉정하게 봤을 때는 강지영의 패배가 점쳐지나, 다른 누구도 아닌 강지영이다. 강지영이면 혹시? 하는 마음이 드는 거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혹시 운 좋게? 내가 응원하는 선수이니 천운이 따라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이 강력하게 피어나는 중이었다.
“뭐, 까보면 결국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저는 강지영 선수의 투지가 참 대견해요.”
“투지요?”
“네. 한동안 우리 선수들이 잃어버렸던 유도선수의 투지요.”
“아……. 네?”
배영우는 순간 당황했다.
잃어버린 투지라고 하는 건, 이전의 선수들을 전부 까버리는 발언이기 때문이었다. 투지. 투기 종목에서 이걸 갖추지 못한 선수는 대성은커녕,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지도 못한다.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라고 보는 이들이 엄청 많은 게 바로 투지다.
그런데 지금 조인선 교수는 투지란 단어를 꺼내, 한동안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럼 지금 이전 세대를 죄다 까버리는 발언이다.
그러나 작정한 조인선 교수는 배영우가 말리기도 전에 말을 이어갔다.
“런던 때 이후, 우리 선수들은 투지가 없었어요. 이건 선배로서, 선출로서 보는 시선이 아니라 일반인의 시선에도 잘 보였거든요. 당장 그때 당시 경기 댓글만 봐도 그래요. 지고 있는데 뭐 저리 여유 있냐. 잡지도 못할 거면 유도는 왜 하는 거냐. 이기려는 의지가 하나도 안 보인다. 등등. 이런 댓글들이 주였어요. 이런 댓글을 단 게 절반은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면, 일반인의 눈에도 결국 투지라는 게 안보였다는 거겠지요.”
“어, 흠…… 그, 네. 하하.”
배영우가 당황하건 말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다들 아시죠? 리우와 도쿄에서 증명됐어요. 투지를 잃은 선수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지금 제 말이 억울한 선수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알아야 해요. 스포츠는 결국 성적이 나를, 너 자신을 증명합니다.”
“저…… 조인선 교수님?”
위원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교수님이란 호칭으로 급히 그녀를 말려보나. 이미 고삐가 풀린 조인선 교수는 말을 이어갔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예능이 있죠? 골때녀라고.”
“아, 네. 그거…… 하하, 제가 했지 않습니까.”
“그 예능을 보면, 예능인데도 투지가 그렇게 잘 보일 수가 없어요. 다들 이를 악물고 하잖아요. 그리고 그게 너무 고스란히, 적나라하게 보이니 실력이 형편없어도 대중이 좋아해 주잖아요?”
“네…… 필사적이었죠. 하하.”
“그런데 리우와 도쿄, 우리는 필사적이었을까요?”
“…….”
“선수니까 오히려 더 몸을 사린 것 같단 느낌을 왜 저는 받았을까요? 내가 늙고 낡아서 그렇게 보였을까요?”
“어흑! 아닙니다, 하하. 저, 교수님? 이제 그만…….”
“아니요, 죄송하지만 말은 끝까지 해야 하지 않겠어요? 호호, 오늘이 중계 마지막이라고 해도…… 할 말은 해야겠어요.”
“……네.”
배영우는 포기했다.
앞에서 PD도 말리지 말라고 손을 엑스 자로 교차하고 있기도 했고. 방송사고 확정이지만, 은퇴한 레전드가 욕먹을 각오를 하고 후배들을 설교하는 거니, 나름 명분은 있을 것 같았다.
“일반인에게도 투지가 없이 보였다는 건, 그건 정말 대회를 준비한 마음가짐이 딱 그 정도였단 뜻이에요. 본인은 그러겠죠. 아니다. 나는 열심히 했다. 이 악물고 했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 다음에 잘하면 된다. 이번은 경험이다.”
“…….”
“경험? 누가 올림픽이 경험하는 자리라고 하죠? 그 대회는 증명하기 위한 자리예요. 경험할 마음가짐으로 갈 거면, 절실한 다른 선수에게 양보하는 게 나아요. 그게 성적도 잘 나올 거고.”
“…….”
“축제는, 일반인이 즐기는 겁니다. 여러분은 검투사예요. 스타트라인에 선 말입니다. 증명해야 해요. 그리고 그걸 증명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과정이 아니에요. 결과지.”
“…….”
냉정하다 못해 잔인한 말이었다.
채팅창은 조인선 교수의 말로 폭발하고 있었다.
과하다 vs 맞는 말이다.
치열하다 못해, 전쟁터처럼 불이 붙어서 논쟁이 붙었다. 시대가 달라졌다. 스포츠를 즐김에 있어, 조인선 교수의 이 발언은 오답으로 판정받는다. 그런 시대였다. 스파르타 정신 말고, 헝그리 정신 말고, 이제는 정말 ‘즐기는’ 영역으로 스포츠가 옮겨갔다.
하지만…….
“즐기지 않는 선수가 성공하는 겁니다. 뼈를 깎고, 죽을 각오로, 정말 매트 위에서 이곳저곳 다 부러져서 실려 나와도, 그래도 이를 갈고 상대를 잡아먹기 위해 덤벼들어야 하는 거예요. 유도는 그런, 투기 종목이거든요. 아름다운 패배? 그런 건 없어요. 반칙으로 추잡하게 따낸 승리만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승리가 아름다운 거예요.”
“……흐음.”
“그런 의미에서, 강지영 선수는 아주 후자에 부합해요. 그런 사고를 겪고도 대회에 나온 것도 나온 거지만, 저 어린 선수가 시합에 임하는 자세와 의지를 보세요. 느껴지잖아요? 필승의 의지가.”
“…….”
“도핑 때문에 진통제도 맞지 않고 절룩이면서, 저렇게 승리를 갈구하는 모습 저 자체가, 아름답잖아요?”
필승의 의지.
그래, 조인선 교수가 이렇게 신랄한 비판을 내놓은 이유가 이거였다.
“보고 배웠으면 좋겠어요. 저 의지를.”
채팅창은, 잠시간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뒤, 배영우가 말했다.
“드디어 심판, 입장합니다.”
분위기에 맞춰, 차분한 어조로 결승전 시작을 알리는 배영우 캐스터였다. 그리고 잠시 뒤, 두고두고 회자 될 명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