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67화
367화. 함부르크 올림픽(13)
그루지야의 신성.
아쉬빌리 알레코를 칭할 때 쓰는 별명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급부상해 유도 강국이 된 그루지야. 그중에서도 경량급에 속하는 60부터 73까지는 언제나 정상급 선수를 배출해왔다.
알레코는 도쿄에서 은메달을 딴 샤브다투아쉬빌리 라샤의 뒤를 이은, 그루지야의 현세대 에이스였다.
라샤는 도쿄에서 안호진에게 반칙패를 먹이며 결승전에 진출한 선수기도 했다. 그런 라샤를 힘으로 찍어 누르고, 독일행 티켓을 손에 넣은 게 알레코였다. 그 이후 세계 대회에서 상당한 성적을 거둔 덕분인지, 지영과 마주 선 알레코는 매우 다부지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자만이 아닌, 자신감이 충만한 건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됐지, 해가 될 일은 절대 없었다.
“후우.”
강지영!
강지영……!
쿵! 쿠웅! 쿵! 쿠웅!
손뼉과 함께하는 연호에 우웅, 경기장이 울렸다. 경기장 가득 찬 관중이 너무하게도 지영 하나만을 응원해 생긴 현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지영은 이거 하나만큼은 다른 선수들에게 좀 미안했다.
너무 한쪽으로 편중된 응원은 선수의 사기를 꺾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홈과 원정의 차이가, 다국적 선수들이 참가하는 유도 경기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자체가 심적으로 위축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명백하게 지영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거지만, 이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독일 국적 주심이 입장했다.
이 또한 지영에게는 좋은 신호였다. 소피를 구하면서, 거의 모든 독일인의 호감을 샀으니까. 그러니 최소한 편파 판정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심판이 자리에 서고, 사인을 주자 지영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입장했다.
우와아……! 지영이 입장하자 다시금 환호가 일어났다. 하지만 지영은 입장과 동시에, 진하게 경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본래의 세계 볼륨이 10이라면, 지금은 거의 7에서 6으로 줄었다. 그렇게 소음이 줄자 앞에 선 상대의 표정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알레코의 표정은 의지와 각오로 가득했다.
마치 원수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은 없지만, 반드시 지영을 이이겠단 필승의 의지는 느껴졌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준결승이다.
여기서 메달과 노메달의 입장이 완벽하게 갈라진다.
이겨서 결승전으로 올라가면 최소 은메달 확보다. 결승전이니 져도 무조건 은메달이란 뜻이다. 그러나 지면 패자 결승으로 밀린다. 패자 결승에서 승리하면 동메달이고, 여기서도 지면? 5위다.
그리고 5위는 노메달이다.
그러니 준결승은 진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사력을 다해 이기기만 하면 최소 올림픽 은메달이 확보되는 거니, 저런 각오와 필승의 의지를 다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지극히 당연했다.
그리고 그건……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지영의 목적은 올림픽 메달이 아니다. 그것보다 좀 더 명확한, 금메달이다. 은메달, 동메달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목표 자체를 그랜드 슬램으로 잡았기에, 올림픽에서 반드시 우승할 생각이었다.
지영은 정말 적어도, 그 정도의 의지를 다지고 이곳에 왔다.
그렇기에 솔직히 포기해야 하는 몸 상태인데도, 부득불 경기에 나왔다. 그 목표 달성까지는 이제 두 걸음이다. 두 게임. 알레코를 잡고, 결승전에 올라올 게 분명한 미야모토 신지를 잡으면 된다.
물론 앞의 두 경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힘들게 분명하다.
당장 눈앞의 알레코만 해도 솔직히 버거운 정도다. 지영은 그 점을 분명히 인정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하지만 인정했다고, 진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영도 승부욕을 화르르 불태웠다. 그렇게 두 선수가 서로를 노려보며 서로의 의지와 승부욕을 태우기 시작하자, 심판은 그걸 기다렸던 건지 앞으로 나서며 힘차게 하지메! 준결승을 시작시켰다.
하아-!
알레코가 악을 쓰듯이 기합을 넣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지영의 응원을 뚫고 경기장에 울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영은 평소처럼 짧게 기합을 넣고는, 자세를 잡았다. 하필이면 자세도 왼쪽이다.
왼쪽 틀어잡기 자세.
지금 지영에게는 가장 안 좋은 자세다. 거기에 힘까지 좋으니, 잡기 상성은 최악이다. 그러니 당연히 지영은 자세 자체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알레코는 딱 봐도 자세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이니 어쩔 수 없이 지영이 자세를 오른쪽으로 바꿨다.
이런 자세의 변화에 알레코의 표정에 회심의 미소가 깃들었다.
마치 기다렸던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영은 그걸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알레코가 마치 짐승처럼 덮쳐왔다.
* * *
[아! 절반! 강지영 선수! 시작과 동시에 절반을 빼앗깁니다!]
[아아, 위험했어요! 그루지야 스태프가 격렬히 항의합니다! 왜 한판이 아니라 절반이냐는 항의 같아요! 아, 비디오 판독에 들어가는데요?]
[이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조민선 위원님?]
[위험하죠. 음, 그런데…… 아 리플레이 영상이 나오네요. 아, 절반이 맞을 것 같아요. 사실 저 정도면 조금 편파 판정을 적용하면 아예 안 줄 수도 있는 레벨이거든요?]
[그런가요? 아 다행히 독일 주심입니다. 독일과는 또 관계가 좋으니 조금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해설의 말에, 채팅창이 난리가 나고, 관중들도 걱정과 염려에 한숨을 내쉴 때, 지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허리를 짚고 발목을 돌리고 있었다.
방심?
‘아니.’
안 했다.
방심 따위.
발목도 안 좋아서 제대로 실력도 발휘 못 하는 중인데 방심까지? 지영은 그런 정신 나간 인간은 아니었다.
그럼?
알레코가 제대로 노린 거다. 지영의 반응이 느리다는 걸 아무래도 파악한 것 같았고, 그걸 파악한 뒤에 시작과 동시에 아예 감듯이 덮쳐 덧걸이를 노렸다. 지영이 딱 걱정했던 기술이었다.
조심해야지, 조심해야지 생각하면서도 시작과 동시에 들어온 저 기술에 걸렸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당했느냐고?
알면서도 당하는 기술이라서 그렇다.
이성진의 업어치기가 정말 날카롭다는 사실은 전 세계 유도인이 다 알고 있다. 이번에 66체급에 나온 선수들은 이성진과 만날 경우를 가정했을 때, 무조건 업어치기만 조심하자! 이런 마음으로 준비를 단단히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준비한 선수치고, 이성진의 업어치기를 막은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알고 있었는데도, 업어치기에 사정없이 날아갔다.
알면서도 걸리는 기술이란 게 바로 그런 거다. 사실 이런 거야 상대와 겨루는 전 종목이 그랬다. 축구나 농구, 야구도 알지만 못 막고, 못 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지금이 딱 그랬다.
경계할 만큼 했는데도, 제대로 걸렸다.
이는 지영의 반응이 발목 때문에 그만큼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알레코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에 두고, 거기서 지영의 반응에 따라 초반에 승부를 걸 생각이었다.
비디오 판독이 끝났다.
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끝나나?
‘설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단 한판 기술이 아니었다. 그리고 주심이 독일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한판을 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역시…… 하지메! 심판은 시합을 재개시켰다. 알레코는 한껏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고, 지영은 그 모습을 보며 길게 심호흡했다.
좀 전에 제대로 당했다.
‘그러니 갚아줘야겠지?’
임쩌민부터 알레코까지.
전부 지영의 발목이 정상이 아니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까, 이미 자신은 알려질 만큼 알려진 선수였다. 스타일에 크게 변화를 줄 수 없는 선수. 속이는 게 거의 불가능한 선수였다.
철저하게 해부된 탓에 말이다.
그러니 뭘 어떻게 해도 부상은 사실 숨기기 힘들었던 거다. 그걸 자각한 순간, 지영은 연기를 풀었다. 어차피 안 아픈 척 해봐야 소용도 없으니 불편한 연기는 벗어던지는 게 나았다. 그런 뒤 자세는 오른쪽으로, 어깨를 최대한 늘어뜨렸다. 본래의 자세를 딱 오른쪽으로 전부 옮겨놓은 모양새였다.
이런 지영의 자세에 알레코는 이기는 선수의 특권인, 느긋한 유도로 돌아갔다. 이기고 있으니 급할 게 없단 뜻이었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지영도 언제나 저랬으니까.
지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3분 40초.’
정말 시작과 동시에 채였기 때문에,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보통 선수들은 이 정도 시간이 있으면, 그래도 여유롭게 시합을 풀어나가려고 한다. 아직 3분이나 넘게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작 3분밖에 안 남은 거야…….’
어? 하면 3분? 그거 금방 간다.
다른 나라에서 지영을 사냥꾼, 레인저라고 부르는 건 이 시간을 잘 이용해서였다. 상대의 여유를 이용해서, 어? 하고 정신 차려보면 반칙이 두 개다. 그럼? 상대는 이제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급하지 않더라도, 시합 자체를 공격적으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전과 똑같이 여유를 부리다가는 반칙패니 지극히 당연한 변화였다.
그럼 지영은 그걸 이용했다.
공격적이라는 건, 어떻게든 기술을 걸기 위해 움직인다는 거고, 그 조급한 공격성을 지영은 여태껏 아주 잘 이용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반대다.
쫓기는 건 알레코지만, 무사히 도망치면 알레코의 승리다.
지영은 쫓는 추적자긴 하나, 놓치면 패배다.
따라서 굳이 여유롭게 경기를 풀어갈 필요 자체가 없었다. 지영은 가슴 깃에 손을 뻗었다. 알레코는 물러나며 툭 끊어냈다. 잡기가 대번에 소극적으로 돌아섰다. 지영은 그런 알레코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침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일단은 다행이었다.
저렇게 수비적으로 나오면, 지영은 저걸 이용할 수 있는 운영 능력이 있었다. 툭툭, 거리 계산을 한 다음, 연속으로 손을 뻗었다. 일단은 잡기 싸움을 먼저 건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내가 ‘공격적’이라는 느낌을 심판이 받지.’
똑같이 잡기 싸움을 한단 인식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는 수세고, 하나는 공세라는 느낌을 아주 명확하게 심어줘야 했다. 이걸 심어주려면 상대를 압박하는 건 기본이다. 이건 사실, 모든 유도인이 다 안다. 그리고 본능에 따라, 배운 대로 다들 시합 때 코치가 주문하면 할 줄 아는 운영이기도 했다. 요컨대, 특별할 것 없다는 뜻이다.
유도가 그렇다.
업어치기도, 허리후리기도, 안다리도, 다들 할 줄 아는 거다. 그러니 기술도, 운영도 특별할 게 없다. 그런데 이 특별할 게 없는 걸, 특별한 레벨로 끌어올린 이들이 정상급 선수가 된다. 축구도 농구도 그렇다.
간단한 패스와 슛.
이 기본기를 완벽하게 마스터한 선수는 천만금을 주고라도 모셔가려고 난리가 난다. 여기에 센스까지 겸비하면 뭐, 위대한 선수를 두고 경쟁하는 거다.
지영은 특별할 것 없는 잡기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압박, 뜯어내면 반걸음 전진하면서 다시 잡기.’
아마도 처음엔 지도를 나눠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저쪽만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지영의 목적은 알레코에게 빠른 시간 내에 알레코에게 반칙 두 개를 안겨주는 거니까. 자신은 하나를 떠안아도 괜찮았다.
40초가 지났을 때.
“맛-테!”
여기서 심판의 성향이 조금 갈리는 게, 바로 지도를 주는 심판이 있고 경고성으로 그쳐를 선언하는 심판이 있다는 점이다. 이 심판은? 주저 없이 지도를 먹였다.
“시도! 시-도!”
지영과 알레코에게 하나씩 들어간 지도.
우우!
지영이 압박하고 알레코는 확실히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는데 지도가 둘에게 들어가니 대번에 야유가 터져 나왔다. 일반 관중이 보기에도 알레코가 수비적으로 물러난 게 눈에 보였던 거다.
그래도 지영은 아쉽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어차피 정석이다. 아예 도망갈 정도로 수비적이었던 게 아니라면 지영도 둘 다 지도를 받을 거로 생각했다. 딱 그 생각대로 된 거다.
‘후우, 중요한 건 지금부터…….’
저렇게까지 힘이 좋은 선수가 방어로 나간다면, 괜히 기술을 걸다가 시원하게 되치기당한다. 그러니 반칙 두 개를 먹인 다음, 저 수비 자세부터 날려버리는 게 먼저였다. 그걸 어떻게? 운영으로.
지영은 경기 운영은, 분석관들이 치를 떨었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정평의 이유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하지메! 사인에 맞춰 움직인 지영은 중심을 단단히 잡은 다음 상대를 몰아갔다. 이번엔 좀 더 적극적,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래야만 했다. 이번에 같이 반칙을 받는 건 의미가 많이 떨어졌다.
알레코 혼자 지도 2개를 만들어야, 발등에 불을 뚝 떨굴 수 있는 거다.
유도 지능이 좋다면, 여기서 이미 지영의 노림수를 깨달았을 거다. 하지만 척 봐도 알레코는 아직 알아차린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영은 몰아붙였다. 그가 깨닫기 전에. 깨달았을 때는 지도를 하나 더 받고 아! 하는 심정이 됐을 때가 되도록. 몰아붙였다.
지영은 잡기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게 못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잘했다. 체급에서 가장 팔다리가 긴 축에 속하니 잡기 자체에도 매우 유리했다. 작정까지 한 마당에 그 유리함을 이용하지 않을 지영이 아니었다.
뻗고, 상대가 끊어내면 거의 한 걸음 전진. 상대가 바짝 붙으면 방어하기로 마음먹은 입장에선 매우 부담스럽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고?
물러난다.
수비를 위해 공간을 최대한 두기 위해선 물러나는 것밖에는 없으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지영은 그런 알레코를 쫓아가며 계속해서 강력한 압박을 걸었다. 심판은 경고 없이 곧장 지도를 주는 성향이다.
이런 성향의 심판이, 계속해서 잡기를 거부하고 물러나는 선수를 본다면?
우우!
그런 선수에게 야유가 마구 쏟아지기까지 한다면?
너무 확실한 미래가 그려지지 않나?
“맛-테! 시도!”
심판의 외침에 알레코는 반사적으로 점수판을 돌아봤고, 그는 확인했다. 남은 경기 시간은 2분. 판이 뒤집히기에, 너무나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음을.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