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56화
356화. 함부르크 올림픽(2)
현 66 체급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단어는 춘추전국시대였다. 다른 단어를 써 예시를 들고 싶으나, 한국의 역사는 수많은 나라가 난립했던 적이 없었기에 알맞은 표현이 없었다. 있었다 한들 일반인은 잘 모를 거고. 그러니 결국엔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그거였다.
춘추전국시대.
‘수많은 강자가 왕권을 탐하는…….’
원래 최강자라 불릴 만한 선수는 있었다.
바로 아베 히후미였다.
그러나 그는 세계 선수권에서 보여준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유도계에서 축출당했다. 원래 스스로 은퇴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가 아베 히후미를 은퇴시켰다. 보이콧. 미국을 시작으로 유럽까지 번진 아베 히후미 개인 보이콧으로 인해 그는 강제로 은퇴하게 됐다. 그리고 그가 은퇴하자, 체급의 왕좌는 텅 비었다.
아베 히후미는 강자였다.
도쿄 올림픽은 물론 그 이전부터 66체급에서는 가히 왕으로 군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가 모든 대회를 휩쓴 건 아니었다. 패배도 있었다. 하지만 굵직한 대회는 거의 아베 히후미가 잡았다.
도쿄 올림픽 이후, 제대로 실력에 물이 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베 히후미는 한 대회에서, 한국의 신성 이성진에게 제대로 털렸다. 그리고 다음 대회에서 만났을 때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 아무리 판을 벌인 간부가 개소리를 떨어 꼬였다고 해도, 해선 안 될 짓을 했다.
그 결과 아베 히후미는 징계 이후, 은퇴 당했다.
아베 히후미가 비록 이성진에게 탈탈 털렸었다고 해도, 그는 체급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어느 대회건 그가 출전하면 항상 우승 후보에 당연히 올렸고, 그를 대상으로 전략을 짜는 게 당연한 선수였다.
그런데 그가 사라졌으니 왕좌는 텅 비었다.
그 결과,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선수들의 부딪침은 가히 춘추전국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체급의 랭킹 10위권의 선수들은 전부 그 왕좌를 탐해볼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중 한 명이 이성진이었다.
협회 측에서 따로 마련해 준 프리존에서 지영은 친구의 시합을 기다렸다.
일찍 출발한 이성진과 따로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안 그래도 시합 준비로 바쁠 것 같아서, 톡으로 힘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게 전부였다. 그래서 당장 친구의 컨디션이 어떤지는 확인 못 했다.
하지만 지영은 걱정하지 않았다. 황금세대 중에서 가장 체중을 많이 빼는 게 이성진이다. 지영도 만만치 않게 감량하지만, 그래도 이성진 정도는 아니었다. 거의 10㎏. 때에 따라서는 11㎏ 가까이 감량하기도 했다.
이게 가능하냐고?
가능했다.
일반인이 봤을 때는 에이, 하겠지만 투기 종목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많이 빼긴 하네, 라고 말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 감량 과정이 쉬운 건 아니었다. 피를 말리는 인내의 시간을 지나야 했다.
5㎏까지는 사실 그냥 웃으면서 빼지만, 그 이후부터가 진짜 지옥이다.
이 감량 과정은 정말 중요한 게, 감량 중에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면 진짜 지옥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선수가 정말 많았다. 선수들에게 감량은 익숙한 거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매번 성공적으로 감량하는 건 또 아니었다.
지영도 실패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감량했는데도 결국 관리 실패로 시합 때 빌빌거렸던 적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성진은 없었다.
자신보다 좀 더 감량하는데도 이성진은 언제나 시합 때 베스트는 아니어도 본래 컨디션의 80% 이상은 맞췄다.
80%면 만반의 준비는 아니지만, 최소한 실력을 무리 없이 펼칠 정도는 된다.
올림픽이니 다들 컨디션이 최고이겠지? 하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당장 경기 중인 선수들만 해도 그랬다.
몸이 무거웠다.
원래 첫판은 몸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힘들게 풀어나가는 선수가 많았다. 특히 호흡을 터뜨리지 못해 빌빌거리는 선수는 정말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 경기 중인 두 선수가 그랬다. 랭킹 10권 안의 선수들인데, 몸놀림을 보니 무슨 물먹은 솜처럼 느껴졌다.
컨디션 관리의 실패도 있지만, 저건 제대로 몸을 풀지 않은 탓이었다.
지영은 그런 선수들의 시합에서 시선을 떼고, 뒤에 입장선에서 준비 중인 친구를 바라봤다. 거리가 있어서 표정이 보이진 않지만, 지영은 서서 몸을 푸는 것만 보고도 친구의 컨디션이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친구의 옆에 선 선수는?
카닌 다니엘.
브라질 선수였다.
남미계 특유의 유연성을 갖춘 선수로, 아주 당연히도 주짓수 고수였다. 서서 게임을 풀면 승리고, 잡혀서 굳히기로 끌려가면 패배가 확정이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저 선수의 일전을 준비한 이성진이었다.
‘이 선수 때문에 한 달 넘게 주짓수 선수들이랑 훈련했으니, 괜찮을 거야.’
카닌 다니엘은 정말 까다로운 선수였다.
몸이 유연해서 일단 기술 방어가 굉장히 좋았다. 넘어간 것 같은데도 몸을 비틀어 피하는 장면을 보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대로 딱 잡아 찍듯이 넘기는 게 아니면, 거의 웬만한 기술은 전부 피해 가는 게 다니엘이었다.
지영과는 전혀 다른 타입의 방어유도 전문가다.
하지만 지영은 다니엘의 영상을 보며, 당연히 약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방어유도 전문이긴 한데…… 운영이 약해.’
다니엘의 방어는 강력했다.
하지만 방어만 강력했다. 굳히기로 경기를 끌고 가지 못하면, 패배하는 경기가 정말 많았다. 왜? 현대 유도는 공격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방어만 하면 거침없이 반칙을 주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이 아무리 기가 막힌 유연성으로 기술을 방어해도, 그 방어가 두 번, 세 번 누적되면 곧장 반칙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반칙이 두 개가 되는 순간 굳히기로 경기를 끌고 가는 건 매우 요원해졌다. 그렇게 되는 시합은 거의 90% 이상 패배로 직결됐다.
빙글 돌아 앞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멋은 있겠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러니 이성진은 기술 방어 뒤, 굳히기로 끌고 가는 상황만 조심하면 된다. 그걸 위해 정말 오전 내내 블랙벨트 선수에게 시달렸던 이성진이었다.
앞 경기가 끝났다.
연장 포함 9분. 두 선수다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지만, 저렇게 경기를 뛰었으니 승자는 이제 다음 판에 날아다닐 것이다.
승자 판정 뒤 두 선수가 물러나고, 진행요원이 들어와 매트를 정비했다. 그리고 이성진이 입장했다.
백색 도복.
청색 도복보다는 역시 이성진에겐 백색 도복이 잘 어울렸다.
팡팡!
스윽, 스윽!
두어 차례 뛰었다가, 발바닥을 매트에 강하게 쓸어 맺힌 땀을 닦아내는 루틴은 지영과 똑같았다.
와아!
그리고 역시 이성진의 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환호했다. 이성진이 고정으로 출연 중인 더 런닝은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었다. 이성진이 고정이 되기 전에도 이미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그램이라, 그 팬층을 흡수한 이성진의 해외 팬은 지영 다음으로 많았다.
그런 이성진의 팬이 보내는 열광적인 환호.
그러나 이성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조금도 웃지 않았다.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상대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잠시 뒤 심판이 입장하고, 경기가 시작됐다.
지영은 두 손을 꼭 쥐고, 친구의 다부진 기합과 동시에 움직이는 친구를 응원했다.
오른쪽.
오른쪽.
카닌 다니엘도 오른쪽 자세고, 이성진도 선 자세는 오른쪽이었다. 물론 이성진에게 자세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서도 상대를 업는 게 특기니까.
‘하지만 아예 각을 주지 않으면?’
천하의 이성진도 없는 각에서는 업어치기를 들어갈 수 없었다. 에이, 그게 무슨 고수야! 하겠지만 레슬러들이 잡지도 않고 상대를 던지지 못하는 것처럼, 태권도 선수가 거리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발차기를 해봐야 상대에게 닿지 않는 것처럼, 유도도 일단 잡고 거리와 틈이 맞아야 기술을 들어갈 수 있었다.
카닌 다니엘의 전술이 그랬다.
각 줄이기.
혹은.
각 죽이기.
이성진이 파고들어 올 수 있는 간격을 주지 않는 것. 일단 카닌 다니엘의 첫 전략 수는 그걸로 보였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잡기에 목숨을 건 것처럼 보였다. 아니, 보이는 게 아니라 목숨을 걸었다.
잡고, 털고, 뜯고.
상대를 정신없게 만들기 위해 손을 뻗어 격렬하게 잡기 싸움을 걸어오는 다니엘. 지영은 그게 나쁜 전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쿄에서는 많은 한국 선수가 저 전략에 걸려, 패배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저런 식으로 움직이면 골 때리게도, 공격적으로 보는 심판도 있었다.
한국 유도는 기술 유도다.
그런데 기술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는 대신, 피지컬이 딸린다. 그걸 이용해 상대 선수들은 힘과 속도로 잡기 싸움을 걸어왔다. 그리고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그 전략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걸 이겨낸 극소수만 메달을 목에 걸었고.
카닌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신장은 이성진보다 한참 작지만, 그 작은 신장에서 나오는 힘을 바탕으로 강력한 잡기 싸움을 걸어왔다.
아마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성진은 잡지 못하면 허수아비다.’
뭐,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런데 그건 이성진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다. 전부다. 이성진을 포함해, 여기서 시합을 관전 중인 강지영을 포함해, 유도복을 입은 모든 선수가 그 안에 포함된다. 유도 기술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잡고 나서야 시작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기술도 있었다.
‘잡지 않아도 걸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도 기술이 있지.’
툭, 부웅!
이성진이 가슴 깃을 잡히자 거칠게 뜯어내며 물러나는 카닌 다니엘을 쫓아 들어가며, 그대로 몸과 손바닥으로 대놓고 상대를 밀며 모두걸기를 쓸었다. 그리고 그 모두걸기에 걸려, 예상치 못한 모두걸기를 다니엘은 미처 방어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부웅이다.
쿵!
와자리!
떨어지면서 그래도 용케 몸을 틀었다. 몸이 유연하니 가능했다. 시작한 지 고작 30초 정도에 딴 절반이다. 사실 상대가 저렇게 나오리라는 건 이미 예상했다. 도쿄 올림픽에서 그렇게 잘 먹혔고, 지금도 사실 잘 먹혔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전략을 들고 나올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반대로 이걸 어떻게 깨야 할까에 관한 연구를 했다. 아주 당연하게도 잡지 않고도 걸 수 있는 기술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첫 번째로 떠오른 게 바로 밀면서 모두걸기였다.
지금 이성진이 건 모두걸기는, 일반인에게는 아사바리라고 부르는 게 익숙한 형태의 기술이다. 쌈박질할 때 상대의 가슴팍을 밀면서 팍! 쓸어버리는 느낌으로, 그 느낌을 살려 걸었다. 이렇게 거는 건 솔직히 경지에 오른 선수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애초에 저렇게 대놓고 들어오는데 상대가 바보도 아니고, 그대로 걸려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 한 번, 정말 딱 한 번 의외성이 생겼다.
이성진이 이걸 얘기했을 때, 지영은 당연히 좋은 방법이라고 대답했다. 다만 언제 꺼내 들지는 몰랐는데, 이성진은 길게 끌지 않고 첫판에 꺼냈다.
“나쁘지 않지. 첫판은 성진이가 힘들어하는 게임이니까.”
첫판에 빌빌거리진 않지만, 이성진은 호흡을 터치고도 첫판을 힘들어했다. 솔직히 그런 선수는 정말 많으니 딱히 약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특히 카닌 다니엘처럼 활동적인 선수와 붙으면 무조건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성진은 시합을 유리하게 풀어가기 위해 노림수를 아끼지 않고 풀었다.
그 결과가 절반이고, 절반을 선점하자 경기 궤적이 급격히 틀어졌다. 절반을 뺏기면 경기는 당연하게 불리해진다. 경기 시간은 고작 4분인데, 이 4분은 어? 하다 보면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이기고 있는 선수에겐 시간이 더럽게 안 간다고 느껴지겠지만, 지는 선수에겐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다니엘은 후자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대회였으면, 이렇게 조급하게 풀지 않았을 거다. 유도에서 조급함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당연히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올림픽이다. 4년에 한 번, 유도 선수라면, 당연히 최종목표인 올림픽이다.
이런 대회에서 여유?
뭐, 선수마다 스타일이 있으니 다르겠지만, 카닌 다니엘은 여유가 없었다. 절반을 빼앗기자마자 기존의 전술을 버리고, 즉시 공세로 몰아치기 시작하는 카닌 다니엘. 의 공세를 이성진은 부드럽게 받아, 그대로 업어치기로 말았다.
완벽한 업어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