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41화
341화. 파리 오픈(9)
원래 유도 대회는 경량급 경기가 항상 먼저 있었다. 60, 66, 73. 이런 순으로 흘러갔다. 그건 거의 법칙과도 같았다. 지영이 유도를 시작한 이후, 거의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달랐다. 프랑스 측은 ‘강지영’이란 스타 카드를 이용하기로 했고, 그래서 순번을 역순으로 돌렸다.
원래 첫날이나, 늦어도 이틀째 경기를 들어갔어야 했는데, 아예 삼일째 마지막 날로 밀어버렸다. 이렇게 밀어버린 이유는 하나, 흥행을 위해서였다. 지영이 첫날 시합을 하면 시민들은 빠르게 흥미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메인 매치처럼, 지영의 시합을 뒤로 밀었다.
사실 처음엔 이 부분에 대해서 별로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고 생각했다. 대회의 흥행과 인기를 위해서니까, 유도인으로서 당연히 수긍했다. 그래서 정말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그런데 첫날 황석의 경기를 보면서 지영은 이미 그때부터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음을 느꼈고, 이틀째는 그냥 절정에 올랐다.
지영은 코치로서의 능력도 최고지만, 애초에 성격 자체가 플레이어였다.
그래서 지영은 유도 한정으로는 절대 ‘관전자’가 될 수 없었다. 그건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이틀간 마치 욕구불만처럼, 경기에 관한 갈증이 켜켜이 쌓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말이다.
그리고 당일인 오늘, 그걸 풀 수 있는 시간이 되자 눈빛부터 변했다.
이렇게 변한 공기는 당연히 스태프들도 금방 눈치챘다. 애초에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선수가 흥분하면 코치는 당연히 그걸 잠재워야 한다.
어떤 종목이든 선수가 흥분하면 절대 좋은 꼴은 못 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걸 좀 풀어줄 요량으로 김재정 코치가 지영에게 다가갔지만, 강한결이 그걸 막았다.
“…….”
“…….”
말없이 왜 그러냐고 바라보자, 강한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웃어 보였다. 괜찮다는 뜻 같았다. 아니, 괜찮다는 뜻이었다.
강한결은 누구보다 지영을 잘 아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괜히 흥분 때문에 시합을 망칠 사람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영은 그런 주변의 반응을 전부 인지하고 있었다. 제대로 인지 중이고, 오히려 달아오른 감정을 이미 통제하며, 느끼고 있었다.
하필이면 예선전도 상당히 뒤쪽이다.
적어도 1시간은 기다려야 하는데, 이 시간이 솔직히 기다리기 지루한 정도를 넘어 짜증이 날 정도였다.
‘후우, 릴렉스, 릴렉스.’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지영은 눈을 감고 첫 게임 상대를 떠올렸다.
첫 게임은 스위스 선수다.
스텀프 닐스.
오른쪽 틀어잡기.
유럽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니 큰 특징은 없다.
‘허리기술과 발기술. 유럽 선수 특유의 힘 유도 베이스.’
정보를 떠올리기 무섭게 스텀프 닐스의 시합이 자연스럽게 재생됐다. 몇 년째 랭킹 20위권을 유지 중인 스텀프 닐스는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사실상. 아니, 올림픽 레이스는 끝이다. 실패로 말이다.
그의 나이가 한창때이긴 하지만, 다시 4년 뒤엔 서른이 넘는다. 그땐 피지컬의 하락을 생각하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거다.
‘그럼 간절할 수밖에 없지. 절박한 감정만큼 강력한 버프도 드물어.’
그러니 아마 문자 그대로 죽기 살기로 부딪쳐 올 게 분명했다. 그런 스텀프 닐스를 상대함에 있어 가장 조심해야 할 건 역시 힘이다. 특히 힘으로 뒤덧걸이 같은 건 확실히 조심해야 했다. 덧걸이로 중심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즉시 힘으로 찍어 눌러 점수를 따내는, 그런 스타일이기 때문이었다.
상대법? 따로 특별히 마련하진 않았다.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그걸 마련해야 할 정도로 실력이 엄청난 선수는 아니었다. 하던 대로, 주의하고 조심하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는 평소의 기량만 나오면 충분히 제압 가능하단 결론을 얻었다.
물론, 절대 방심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만과 자신감은 한 끗 차이지만, 분명히 서로 다른 거였다. 지영은 언제나 자신을 후자에 놓고, 거기서 전자로 벗어나지 않고 조심, 또 조심했다.
그렇게 인내하다 보니, 경기 시간이 왔다.
진행 요원이 지영을 불렀다. 그 소리에 번쩍 눈을 뜬 지영은 곧장 밖으로 나왔다. 선수 대기실은 경기장 안쪽에도 있지만, 아예 따로 방 형태로 내주기도 했다. 진행 요원을 따라 경기장으로 들어가자.
우와아아……!
엄청난 함성이 지영을 반겼다.
우웅, 이명이 들릴 정도로 거대한 함성이었다. 쇼맨십이 없진 않은 지영이지만, 지금은 그 단어 자체가 머릿속에 없었다. 오직 경기장과 상대만 보였다. 경기는 바로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앞에 아직 2경기가 남았고, 2경기면 길게 갈 땐 10분 이상 갈 수도 있었다. 연장전에 들어가고 하면 20분은 그냥 훅 지나간다.
그리고 그 정도 시간이 있으면 몸을 풀기엔 최고였다.
지영이 주변을 슥 둘러보자 눈치 빠른 강한결이 바로 도복을 입고 다가왔다. 어제 시합 중에 제대로 받았는지 살짝 눈두덩이가 부은 강한결. 평소였다면 그걸 보고 다른 상대를 찾았겠지만, 지영은 그러지 않았다.
빠르게 부딪치기로 다시 몸에 열을 피웠다.
숨은 아까 트여놔서, 수십 개를 쉬지 않고 하는데 별로 힘들지 않았다. 숨이 제대로 트였다는 증거였다.
이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좀 더 채워졌다.
이윽고 다가온 경기의 시간.
스텀프 닐스는, 역시나 절박한 표정이었다.
그걸 숨긴다고 숨긴 것 같지만 전부 숨기지는 못했다. 게다가 좀 긴장한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했다. 그에게 이번 대회는 정말 중요했다. 올림픽 레이스의 마지막이고, 여기서 1등을 하지 못하면 사실상 끝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서 매우 중요한 시합인데, 하필이면 첫 게임 상대가 강지영이다.
큰 대회에서 성적은 아직 없지만, 현재 세계를 휩쓸다시피 하는 일본의 삼인방을 모조리 꺾었으면서, 여전히 무패 행진을 달리는 선수.
그것만 해도 부담인데, 엄청난 팬덤을 몰고 다니기까지 한다.
벌써 강지영을 향한 응원이 상당해서, 그는 정신이 조금씩 아득해졌다. 자신 빼고 전부 적인 것 같았다.
“닐스! 닐스! 정신 차려!”
“아…….”
코치의 외침에 겨우 현실로 돌아온 닐스는 진행 요원이 자신을 안내하는 손짓을 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봤고, 따라서 경기장에 입장했다.
상대 강지영은 이미 반대편에 서 있었다.
차분한 눈동자.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리게 느껴지는 눈동자. 동양의 선수들과는 이상하게 다른 느낌이다.
인의예지? 예시예종?
그런 느낌은 조금도 없는.
‘사무라이의 나라라 그런가?’
입 밖으로 내지 않기를 천만다행인 망언을 떠올리며, 스텀프 닐스는 심판의 사인에 따라 경기장에 들어섰다.
바로 코앞에 서자, 풍기는 느낌이 완벽히 달라진 강지영을 보면서 스텀프 닐스는 자신의 뺨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쳤다.
보자마자 멋있다, 라는 생각을 한 자신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준 벌이었다.
이길 수 있다.
아니.
이겨야만 한다.
겉멋에 빠진 저 선수에게, 진짜 유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동료와 아내에게도 그렇게 호언장담하고 왔다. 하지만 닐스는 시작과 동시에 지영을 잡는 순간, 그런 생각은 저 멀리 아득하게 멀어짐을 느꼈다.
잡는 순간 느껴졌다.
이 선수는, 겉멋이 든 게 아니라는 것을.
반대로 지영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실망이란 감정이었다.
이 선수에게서 절박함이 분명 느껴졌다. 그런데 경기 시작 전부터 그에게 느껴지는 건 절박함이 아니라 이상한 잡생각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겠다.
‘시합 중에 잡생각은 필패의 지름길이지.’
무조건 이기겠다고, 악을 써도 지는 게 승부다. 승부의, 승리의 신은 냉혹한 게 아무리 간절하고 절박해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 신은 오직 승자가 될 이에게만 손을 들어줬다.
승자가 될 준비가 된 자.
훈련, 시합에 임하는 자세, 그날의 컨디션, 운 등등.
모든 것을 갖춘 자에게만 신은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절대 손을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저렇게 잡생각을 할 때다.
실력도 부족한데, 시합 중에 딴생각까지 한다? 어딘지 넋이 나간 것 같은 닐스의 모습에 지영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툭.
발바닥으로 가볍게 치는 모두 걸기.
그 모두 걸기가 닐스의 정신을 일깨웠다. 별로 세게 치지도 않았는데 정신을 번쩍 차린 닐스다. 그는 갑자기 현실로 돌아와 그런지 정신이 좀 멍한 것 같았다. 지영은 그 모습을 보며 이 선수가 피지컬만큼 정신력이 강했다면, 애초에 이 대회에 나오지도 않았겠다고 생각했다.
장점보다.
‘단점이 너무 커.’
정신을 번쩍 차린 닐스는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간 몸에 쌓인 데이터에 따라 끌고, 그대로 업어치기.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건 기술은 최악의 수였다. 지영은 수비 유도의 정점에 있는 선수였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건 기술도 안 먹히는 판국인데,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기술을 건다?
되치기하기 딱 좋다.
“으아!”
지영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닐스가 전부 돌기도 전에 빠지면서 찍어 눌렀다. 그러자 비스듬히 어깨부터 시작해 등 절반이 제대로 바닥에 찍혔다. 심판은 그 모습을 자세히 보고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지만 아쉽게 위가 아닌, 가로였다.
와자리!
절반 선언.
지영이 보기에도 절반 짜리 점수였다. 절반을 빼앗기자 발라당 누우며 굳히기 포지션을 준비하는 닐스. 정신을 차린 그 모습에 지영은 미련 없이 몸을 뺐다. 자신의 굳히기 실력은 그다지 좋지 못하니 굳이 어울려줄 필요는 없었다.
맛테!
지영이 멈추자 심판이 곧장 그쳐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제 좀 정신을 차린 닐스가 일어나자, 한 호흡 뒤에 곧장 다시 시작을 외쳤다. 지영은 닐스의 코치가 한숨을 내쉬는 걸 보면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절반을 먼저 따는 건 지영의 필승 루틴이었다.
안 그래도 운영의 묘를 극한으로 살린 방어 유도의 대가인 지영인데, 여기서 절반을 먼저 따냈다. 지영의 데이터를 볼 때, 절반을 먼저 딴 경기에서는 단 한 번도 진 경기가 없었다. 아니, 어차피 패배가 없는 지영이니까, 더 제대로 설명하자면 흔들린 경기가 없었다. 절반의 이점을 살려 천천히 상대를 말려가면서, 완벽한 경기를 펼쳤다. 그래서 강지영과 상대할 때 같이 반칙을 받는 한이 있어도, 먼저 점수는 주면 안 된다고 그렇게 설명했었다.
하지만 닐스는 그걸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지영은 절반을 딴 순간부터, 마음을 편히 가졌다. 조급하지도, 그렇다고 마음을 느슨하게 풀지도 않은 평정을 확실하게 유지했다.
1분쯤 지났을 때, 닐스는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3분이고, 닐스는 뭘 어떻게 해보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선수가 느끼는 시간은 체감상 달랐다.
이기고 있는 선수는 왜 이렇게 안 끝나! 하는 마음 때문에 시간이 체감상 늦게 가는 것 같고.
지고 있는 선수는 아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 하는 마음 때문에 체감상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영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3분.
‘벌써 3분…….’
이제 열이 제대로 올라서, 시합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벌써 끝나기 직전이다. 더 하고 싶었다. 이틀을 기다린 만큼, 좀 더 이 갈증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벌써 1분밖에 남지 않았다. 경기를 더 하고 싶다고 절반을 내주는 건 미친 짓이니, 결국엔 이렇게 끝나게 될 거다.
30초쯤 남았을 때, 지영은 처음으로 반칙을 하나 받았다.
그걸 보고 누군가는.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30초 남기고 겨우 지도 하나를 받다니…….”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경기 운영이야? 저런 게 가능해?”
“보고 있잖나. 기술도 기술이고, 카운터도 카운터지만, 빌어먹을 건 저 경기 운영 능력이지. 저걸 어떻게 못 깨면, 공략은 애초에 불가능해.”
“반칙 관리 능력이 완전히 사기야……. 진짜 말도 안 나오는군.”
절레절레.
각 나라의 스태프들이 지영의 경기를 보며 한숨을 연거푸 내쉬는 순간, 삐이이이! 4분 경기가 끝났다.
절반 승.
이기고 밖으로 나오는 지영의 모습은 여전히…… 목마른 모습이었고, 이는 경기에 아주 확실히 티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2회전 3회전을 치른 지영은, 일본의 마사루와 맞붙게 되었을 때는 다시 지독히 차분한 모습을 갖췄다.
친분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마사루는 실력자였고, 역시 준결승까지 왔다.
‘그러니 철저하게 상대해줘야지.’
어쩌면 마지막 대회라고 한 만큼, 지영은 후회 없는 경기가 되게끔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아주 철저하게. 상대해 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