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31화
331화. 포드의 운명(14)
메트로폴리탄 공항에서 친구들과 스태프들을 배웅한 지영은, 잠시 정신이 멍해져 바로 나가지 않고 공항 로비에 잠시 앉았다.
“왜?”
“아, 그냥요.”
혼자 남은 임은진의 말에 지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이 많아진 자신의 모습이 마치 예전 그때가 생각나는 것 같아서였다. 같이 움직일 때는, 같이 움직이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친구들만 떠나니 옛날 일이 떠올랐다.
트라우마가 또 제대로 자극된 거다.
가뜩이나 조나단과 함께 있으며 멘탈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 친구들만 비행기라는 위험한 이동 수단으로 떠나니 괜한 걱정이 들어버린 거였다.
임은진은 이런 지영의 상태에 조금은 당황했다.
비행기의 존재를 알고, 그걸 타면 두려워하는 건 사실 어렸을 때가 거의 전부다. 그때야 하늘에 붕붕 떠 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니, 그걸 탄다는 사실에 기대와 흥분도 하지만, 두려워하기도 한다.
사실은 정말 안전한 이동 수단이지만 그게 그렇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지영의 모습은 그런 어린아이 같았다.
조나단과 만나며 이전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자기 연예인의 모습에 임은진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 가요.”
하지만 곧 괜찮아진 표정으로 일어나 씩씩하게 먼저 앞서 걸으니, 그냥 그 속내를 숨기고 따라 걸었다.
“바로 마리나 보육원으로 갈 거야?”
“아니요. 좀 쉴까요? 숙소 청소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그럴래?”
“네.”
머물렀던 자리를 최대한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그래도 열 명이 넘는 대인원이 머물렀던 숙소다. 그러니 제대로 청소가 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돌아가서 청소를 좀 하려고 했는데, 도착하니 이미 메리 킴이 부른 청소업체 직원들이 와서 청소하고 있었다.
“배웅은 잘하고 왔어요?”
이제는 친숙하기까지 한 메리 킴의 질문에 지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잘 못 했지만, 그걸 들키고 싶진 않았다. 지영은 숙소를 둘러보면서, 놓고 간 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꼭 챙긴다고 챙겨도, 놓고 가는 물건이 생기는 게 여행이다. 그리고 역시, 지영은 이성진의 방에서 몇 개의 물건을 찾았다. 정소영에게 처음 받은 선물인 수면 안대와 보조 배터리였다. 지영은 그걸 사진으로 찍어, 톡방에 올렸다.
강한결과 임효중, 황석은 워낙에 꼼꼼한 성격이라 역시 두고 간 건 없었다.
매니저 팀 방은 임은진이 한 번 훑었고, 지영은 방으로 돌아와 잠시 쉬기로 했다. 멍했던 정신은 어느 정도 풀리긴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확실히 괜찮아진 지영은 임은진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둘이 남은 만큼, 운전은 임은진이 하기로 했다. 그리고 뒤엔 제시카 감독과 촬영 감독이 탔다.
다시 도착한 보육원.
지영이 내리자 문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제임스가 달려왔다.
“지영! 성진은 정말 갔어?”
“응. 아침에 갔어. 어제 오전에 인사 잘했지?”
“응! 했지! 성진이 나도 유도 배워볼 거라고 하니까, 도복 보내준다고 했어! 진짜 보내줄까?”
“그럼. 보내주지.”
제임스는 머리가 좀 큰 편이다.
툭 까놓고 말하면 기이할 정도로 성숙한 편이기도 했다. 조나단처럼 말이다. 한국 나이로 이제 초4. 피지컬은 중2쯤 되는 제임스는 결국 유도를 배우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진짜? 진짜지?”
“그럼. 진짜로. 성진이가 가벼워 보이지만 그런 약속은 꼭 지키거든.”
“하하! 그래? 고마워! 참, 오늘 조나단은 기분이 좋아 보여!”
“어? 진짜?”
“응. 아침에 몇 마디 말도 했거든! 보통 내가 인사하면 무시하는 게 일상인 녀석인데, 오늘은 응, 좋은 아침. 하고 대답했다니까?”
제임스의 말에 지영은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어제의 대화가 벌써 조나단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고 있는 것 같았다. 희소식이었다. 제임스가 돌아가고, 마치 교대하는 것처럼 롤시가 달려와 폴짝, 지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제임스가 이성진과 가장 친해졌다면, 지영은 롤시와 가장 친해졌다.
처음에 만났을 때, 사실 조나단보다 롤시가 먼저 지영과 만났다. 마리나 수녀의 다리 뒤에서 지영을 빼꼼히 보던 롤시는 금방 지영에게 경계를 풀었고, 이제는 지영이 오기를 매일 기다렸다. 벌써 이별이 무서워졌다. 얼마나 서운해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두렵다고 거리를 두는 건 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제 열났었잖아. 잘 잤어? 점심은.”
“잘 잤어! 그리고 아침도 점심도 배부르게 먹었다? 지영! 오늘은 뭐 하고 놀까?”
반짝반짝.
근 며칠, 오전엔 항상 롤시와 놀아줬다. 지영은 아이들과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도…… 사실 잘 몰랐다. 그래서 그냥 하자는 대로 따라 하는 편이었다. 롤시와 함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통은 롤시가 하고 싶다는 걸 하지, 지영이 뭘 주도해서 하진 않았다.
점심을 먹고 에너지가 넘치는 롤시와 한참을 놀아줬다. 2시간쯤 놀아주자, 체력이 다한 롤시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런 롤시를 방에 데려다준 뒤 지영은 다시 마리나 수녀와 티타임을 가졌다.
“친구들은 전부 갔다면서요?”
“네. 오늘 오전에 떠났어요.”
“같이 가지 않은 건, 역시 조나단이 밟혀서겠죠?”
“네.”
지영은 순순히 시인했다.
조나단이 눈에 밟혔다. 저 아이를 이대로 방치하고 가면, 운동이고 뭐고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지영은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숨긴다고 해봐야 마리나 수녀를 속여넘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한평생 아이들을 맡아오며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들어왔겠어.’
그러니 거짓말은 하나 마나였다.
여느 때처럼 차를 지영의 앞에 두며 앉은 마리나 수녀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남을 거라고 예상하셨죠?”
“음? 솔직히 말하자면,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지영의 그 질문에, 마리나 수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여태껏 수동적인 대화를 나눴던 지영이다. 보통은 마리나 수녀가 질문하고, 지영이 대답하는 게 주된 대화 방식이었다. 물론 지영이라고 아예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그에 잠시 놀랐던 마리나 수녀는, 이내 다시 차분한 표정이 됐다.
“너무 눈에 밟혀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영 군은 조나단과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어요. 조나단과 지영 군이 같이 앉아 있는 모습은 제겐 똑같이 보였답니다.”
“…….”
눈치가 좋은 걸까? 아니면 이건 뭐 영적으로 진짜 뭐가 있는 걸까? 단순히 눈빛으로 그걸 파악……할 수 있겠다.
‘나도 조나단을 한 번에 알아봤잖아.’
그걸 대체 어떻게? 라고 생각하려던 지영은 자신이라는 선례가 있었기에 금방 수긍하고 말았다. 힘든 사람을 파악하는 눈치는 선천적으로 그냥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후천적으로 갖추는 사람도 있다. 마리나 수녀는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그래서 지영 군이 조나단에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였을 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짐작했어요.”
“음, 걱정 안 되셨어요?”
“했지요. 하지만 지영 군. 지영 군의 모습을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었어요. 혹여 과해질 것 같으면 얼른 개입해서 말리려고.”
“아…… 그건 몰랐네요.”
“후후, 아무리 제 판단으로 조나단의 아픔에 지영 군이 개입하게 내버려 두었다지만, 아예 방치할 수는 없죠.”
“…….”
지영은 그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지영은 완전히 비전문가다. 스스로도 야매라고 생각할 정도로 전문적인 지식이라곤, 개뿔도 없었다. 그러니 솔직히 개입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냥 둘 수 없는 마음이 컸고, 그냥 갈 수 없도록 자신의 트라우마가 발동 중이라 조나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당연히 다른 이들이 볼 때 충분히 불안했을 거다.
그러니, 그냥 방치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매의 눈으로 지영을 다들 주시하고 있던 거다. 지영이 무리한, 혹은 과격한 행동을 하면 얼른 말리려고.
이걸 깨닫고 나니, 지영은 오히려 안심됐고,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감사는 제가 지영 군에게 해야지요. 생면부지의 조나단에게 이렇게 신경을 써주고 있는데. 그리고 조나단은 오늘 얼굴이 정말 밝았어요. 어제 대화를 좀 나눈 게 아무래도 도움이 되었나 봐요.”
“아까 제임스에게 들었습니다. 좋은 징조겠죠?”
“물론이에요. 인사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자기만의 세계에서, 밖으로 나왔다는 뜻이니까.”
“……다행이네요.”
“전부, 지영 군 덕분이에요. 그래서 솔직히 지영 군이 조금만 더 힘내주기를, 저도 바라고 있답니다.”
“…….”
지영은 최선을 다하겠다,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밖으로 잠시 나온 조나단이지만, 언제 다시 안으로 들어갈지 모른다. 그리고 지영은 며칠간 조나단과 가까워지려 노력하며 깨달은 게 있는데, 자기 힘으로 이 일을 해결하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건, 자신을 예로 들어보니 그런 결과가 나왔다.
자신도 나오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약이란, 약을 달고 몇 년이나 걸려서 밖으로 나왔다. 자신도 그랬는데, 조나단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조나단에게 세계 밖으로 얼른 나오라고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참 모진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힘들 때 도망가는 건 당연한 거야. 그건 비겁한 짓도 아니고, 바보 같은, 멍청한 짓도 아니야.’
특정한 신념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게 정말 당연한 거였다.
심지어 아이를 도와야 한다는 명목하에, 오히려 어른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불쑥 들었었다.
여러모로 복잡해진 생각을 가진 지영이었다.
이런 복잡한 생각은 며칠 더 조나단과 얘기를 나눠보고, 길을 제대로 정할 생각이었다.
마리나 수녀와 좀 더 대화를 나누던 지영은 밖으로 나와, 이번엔 먼저 항상 가서 앉는 벤치로 향했다. 벤치에 앉자 자욱한 안개에 쌓인 산이 보였다. 마운틴. 뭔가 웅장한 단어. 지영이 한국에서 보던 건 ‘산’이란 느낌이라면, 저건 진짜 마운틴이다. 산과 산맥. 그 장엄한 절경은 절로 사람을 숙연해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그곳에 산이 있으니까 오른다고들 했다.
지영은 순간적으로, 저 산을 올라 보고 싶단 욕구가 생겼다. 하지만 욕구는 욕구에서 끝냈다. 산악인이나 탈 법한 저런 산은 잘못 타면 탈이 나면 났지, 결코 좋을 것 같진 않았다.
털썩.
조나단이 옆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또 말이 없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이번엔 지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은 혼자 왔어.”
“응. 봤어. 친구들은?”
“갔어. 한국으로. 이제 다시 훈련을 시작할 때거든. 다음 대회도 있고.”
“대회? 맞다. 유도 선수라고 했지?”
“응. 그래도 국가대표야. 나도, 내 친구들도.”
“진짜?”
국가대표란 말에 처음으로 톤이 업됐다.
지영은 뭔가 힌트를 잡은 것 같은 기분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운동 좋아하니?”
“그럼. 좋아해. 나 투수야. 잘 던졌어. 잘 던지면 엄마가 좋아했거든.”
“그랬어?”
“응. 지영은 야구 할 줄 알아?”
“음, 제임스랑 농구나 축구 하는 거 못 봤어?”
지영이 웃자 조나단은 봤어, 하고 작게 큭큭거렸다. 좋은 조짐이었다. 조금씩 더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 서로에게. 지영은 부담스럽게, 그냥 가만히 같이 있는 방향으로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하려고 하질 않아서 조나단도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게 관계 개선에 정말 큰 도움이 됐다.
지영은 지금처럼, 이렇게 거리를 좁혀 가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이틀이 흐른 뒤.
“지영. 캐치볼 할래?”
글러브와 공을 들고 온 조나단의 말에, 지영은 마리나 수녀를 닮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