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21화
321화. 포드의 운명(4)
나탈리 포드를 다시 만난 건 그 주 주말이었다.
시합이 얼마 남지 않은 지영은 다시 감량에 들어갔고, 조금씩 다시 예민해지기 시작한 정신으로 나탈리 포드를 만났다.
다시 만난 나탈리 포드는 피곤에 절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피곤을 스스로 반기는지, 눈빛은 매우 반짝였다. 몸은 피곤해도, 의욕은 만땅인 상태라는 뜻이다. 지영은 나탈리 포드가 이렇게까지 열성적인 이유를 강한결에게 들어 알 수 있었다.
본래 나탈리 에르힌은 포드 부인이 되며, 일선에서 물러났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자 다시 일선으로 복귀했고,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포드 일가이기 때문에 자리를 잡는 게 쉽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포드는 큰 회사다. 그리고 큰 만큼 알력 다툼도 많았다.
가족 분쟁?
당연히 포드라고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견제에 시달렸다. 그 견제 때문에 일각에선 임원급으로 올라가지 못하거나, 아니면 딱 임원이 되고 커리어가 끝날 거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고.
그런데 그걸, 강지영과의 계약으로 완벽하게 뒤집었다.
포드의 얼굴마담 자리에서 안녕하고, 이제는 부사장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본사는 아니다. 작은 계열사다. 이번 일을 위해 만들어진. 하지만 그래도 계열사 중 하나의 부사장 자리를 따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컸다.
강한결은 이걸 어떻게 조사했는지, 알고 있었다.
왜 알아봤냐고 물으니까 그래도 같이 일할 사이인데,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알아봤다고 대답했다.
그 결과 지영은 나탈리 포드가 야심만만한 인간이지만, 적어도 피도 눈물도 없는 기업 후계자 중 하나는 아니라고 판단 내렸다.
그래서 지영은 이 사람이 그래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신중하고,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래서 같이 일할 때 신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속이며 잠시 서로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지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세요?”
“아, 이틀 쉬었는데도 몸이 조금 무겁네요. 호호. 그래도 괜찮답니다. 쉬는 동안 잘 먹고 잘 쉬어서, 체력은 많이 보충되었거든요.”
“아, 다행이네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메이크업을 분명 신경 쓴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피곤하면서도 눈빛이 매우 맑게 빛나는 걸 보니 말이다.
“관광은 좀 하셨어요? 요즘 예쁜 곳 많은데.”
“저, 한국에서 근무했었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아, 맞다. 죄송합니다. 깜빡했어요. 하하.”
처음 만났을 때 그랬다.
한국 포드 지사에서 근무했었다가.
일, 집, 일, 집. 이것만 하진 않았을 거다. 분명 휴일엔 한국을 여행했을 거고, 어쩌면 지영보다 더 괜찮은 곳을 많이 알 수도 있었다. 그걸 까먹었다. 실수에 지영이 멋쩍게 웃자 나탈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익숙한 웃음이라서, 지영은 자신의 실수에 상대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 안도했다. 나탈리 포드의 정확한 나이는 이제 마흔둘이다. 이 정도 나이면 사실 좀 부담스러워야 하는데, 지영은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선영 누나랑 지금도 옆에 앉아 있는 임은진이 나탈리 포드보다 두 살 어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둘과는 또 달랐다.
좀 거친 느낌이 나는 이선영과도 다르고, 프로페셔널해도 나탈리처럼 커리어우먼 느낌은 아닌 임은진과도 달랐다. 특히 돈을 바른 티가 나는 외모는 더더욱 다른 느낌이 났다. 그러나 묘하게 둘과 매칭이 되는 익숙함이 있었다.
지영은 그게 뭔지 정확히 딱 짚어 얘기할 순 없지만, 그냥 직감적으로 느끼고는 있었다.
“사담을 좀 더 나누고 싶은데, 아쉽게도 오늘 오후 비행기로 다시 돌아가야 해서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익숙하다고 느꼈던 나탈리 포드 씨의 태세 변환에, 지영도 자세를 바로 했다.
“네, 그러세요.”
“여기 메리 킴에게 듣기로는, CF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찍는 게 어떠냐고 제시했다던데, 사실인가요?”
“맞습니다. CF보다 다큐멘터리가 홍보로는 더 좋지 않을까요? 일단, 러닝타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계속 그 차를 타고 다니게 될 테니까요. 그때 같이 움직이면서 카메라에 잘 담아, 잘 편집하면? 그럼 노출도가 CF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지영의 말에 나탈리 포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다.
말도 안 되게 다르다.
노출도가 많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 열광하는 것은 당연히 마케팅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
요즘은 한물갔다지만, 10년도만 해도 미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 중 하나는 파워볼 광고였다.
그것 말고도 더 있겠지만, 일반인들도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게 바로 파워볼과 타임스퀘어 광고였다. 그리고 당연히 거기에 광고를 거는 건 진짜 더럽게도 비싸다. 지영이 그랬다. 셀럽은 그 자체로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었다.
입는 것, 쓰는 것, 타는 것까지.
전부 광고로 쓸 수 있었다.
협찬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성공한 연예인, 셀럽은 협찬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나는데, 그게 바로 자체로 광고이기 때문이었다.
메시나 호날두가 SNS나 광고로 어마어마하게 돈을 받아먹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지영이 그랬다.
지영은 SNS를 상업적으로 쓰진 않지만, 만약 쓰게 된다면 당장 그 계정 가치가 폭등할 거라 예상이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이런 자신을, 지영은 고작 CF에 잠깐 노출하는 걸로 끝내지 말고, 아예 다큐 형식으로 방송이든 뭐든 내보내 더 크고 길게 내보이자는 거였다.
그리고 이건 당연히 포드에서 절대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어차피 준비만 해주면, 안에 담겨야 하는 건 강지영이니 그 본인이 제일 피곤하기 때문이었다.
그 어느 연예인도, 일주일이고 이주고 매일 따라붙으면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에 웃으면서 아, 매일 고맙습니다! 이러지는 못한다.
그게 가능한 건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나 가능하다.
신인 띄워주기 다큐가 아니라, 진짜 성공한 배우를 밀착 마크하면서 카메라를 대면 렌즈 앞에서는 웃다가도 멀어지면 한숨부터 쉬고 볼 거다.
그리고 그놈에 돈이 뭔지, 한탄하게 될 거고.
어쨌든 그런 문제가 켜켜이 쌓여서, 가장 큰 사생활과 합쳐지면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게 밀착 마크 다큐다.
그런데 지영은 그걸 먼저 제안했다.
본인이.
게다가 강지영은 미디어 노출을 극히 꺼리는 성격이었다. 애초에 나탈리 본인이 다른 방향으로 선회할 수 있었던 것도 강지영의 ‘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소수’ 언론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다.
심경의 변화?
아니, 그건 아니다.
‘그렇게 쉽게 흔들릴 타입은 아니야.’
나탈리 포드가 아는 지영은 그랬다.
포드에서 철저하게 해부한 강지영의 성격도 그렇게 나왔다. 그래서 대하기 너무 까다로운 ‘을’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극히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마치 손이 닿으면 변색 되는 고미술품 다루듯이 지영을 대하는 중이기도 했다.
분명 갑과 을은 명확한데, 기업과 광고모델의 위치를 보면 누가 봐도 전자가 압도적으로 갑이어야 하는데, 재밌게도 포드는 을의 위치에 있었다.
이것 때문에 말이 많았지만, 대승적으로 합의 본 게 건드리지 말자. 바로 이 부분이었다.
어차피 돈을 줬고, 그 정도 값어치를 해주기만 하면 떠날 사람이니 굳이 문제 만들지 말자. 이렇게 합의를 봤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일유협 사건을 통해 제대로 봤기 때문에, 그냥 철저하게 일적인 관계로 남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핸들링은 확실하게 하는 걸로.
그리고 그 핸들은 당연히 나탈리 포드가 잡았다.
문제는 이 핸들링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먼저 이렇게 제안해 주는 이유를 알아보기로 했다.
“좋아요. 장기간 신제품을 노출하는 방안이 있다는 건, 저희로서는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에요. 하지만 지영 씨. 이건 지영 씨에게는 매우 피곤한 일이 될 수 있어요. 예전에 저도 포드 본사 주관 다큐멘터리 때문에 잠시 일주일간 촬영한 적 있는데, 진짜 피를 말렸거든요. 그렇게 힘든 게 밀착 다큐인데, 정말 괜찮겠어요?”
그래서 먼저 지영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주는 대답을 건넸다.
지영은 그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큐라는 카드를 머릿속에서 떠올렸을 때, 지영은 주변에 연락을 돌렸다.
가장 먼저 돌린 건 당연히 다큐 경험이 많은 이연이었다.
이연은 연기자 출신이 아니라 아이돌 출신이었다.
그것도 하루에 두세 시간 자면서 행사 다니던 성공한 아이돌 출신이었다. 그렇게 성공한 아이돌은 단물까지 뽑힐 때까지 짜이고, 또 짜인다. 그리고 당연히 그 안에 다큐멘터리 촬영 같은 것도 있었다.
이연은 그랬다.
미치는 줄 알았다고.
화장실까지 쫓아오진 않는데, 정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처럼 쫓아다닌다고. 분명 사전에 조율했는데도 어? 하면 저 멀리서 카메라를 대고 있다고. 민낯이 나가는 것보다, 사생활을 감시당할 때는 진짜 카메라를 뺏어서 잘근잘근 밟아 버리고 싶었다고.
이연은 정말 가감 없이 얘기해 줬다.
그래서 지영은 이연이 나온 다큐를 찾아보기도 했다. 확실히, 피곤에 전 것보다, 짜증에 절은 이연의 모습이 더 많이 나왔다. 그래도 아이돌이라서 필사적으로 방긋방긋 웃는 게 심지어 애처롭기까지 한. 그중 한 장면을 캡처해서 보냈다가 전화로 쌍욕 직전의 단어를 듣기까지 했던 지영이었다.
천하의 이연이 그렇게 치를 떨었던 게, 밀착 다큐였다.
하지만 지영은.
“전달 못 받으셨나요?”
“네? 뭐를요?”
“성공한 사업가, 기업인 등등을 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연기할 자신이 없다고 했던 대답이요. 그 대답을 저번 미팅 때도 먼저 했는데.”
“아, 그 얘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겸손 떤다고 생각했어요?”
툭 치고 들어간 지영의 말에 나탈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강지영을 해부할 때 당연히 그의 연기력도 있었다.
한국과 미국에서 보는 연기력은 당연히 기준점이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강지영의 연기력은 그냥 간단하게 상중하로 나눴을 때, 상이었다. 일단 그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아주 잘 살렸다.
예인의 천재 예술가 서건이 그랬고, 나의 무사님의 무사 재가 그랬다.
그녀도 책임자이니 당연히 강지영의 드라마를 다 찾아봤다.
그리고 딱히, 그 연기가 어디 하나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는 예술가 서건의 팬이기도 하고, 무사 재의 팬이기도 한데요? 그 캐릭터의 연기는 정말 좋았어요.”
“그게 제 밑천의 끝입니다.”
“네?”
하고 반사적으로 대답한 나탈리는 웃었다.
겸손인지, 진짠지, 기만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탈리가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하자, 지영도 그 기색을 읽고 설명을 이어갔다.
“운 좋게 작가님들이 좋게 봐줘서 연기에 갑작스럽게 들어왔고, 연습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많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제 성격은 여러 가지 캐릭터를 맡을 수 없어요. 포드가 저를 선택한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단 뜻입니다. 그건 곧 제 한계를 의미해요. 변할 수 없는, 그리고 변하기 싫은.”
“……그래서요?”
“성공한 사업가? 사업을 해본 적도 없고, 기업을 운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따라 해봐야 어색함만 보일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제시한 거예요. 저도 저지만, 포드는 성공해야 하잖아요?”
“……그게 다큐다?”
“네. 그건 저를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연기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실제로 만약 하게 되면 진짜 그렇게 할 거고요. 꾸미지 않고. 신차의 노출은 그 안에서 알아서 각 잡아주고. 그게 마케팅 측면에선 더 좋지 않을까요?”
“음…….”
지영이 잘하는 거.
내추럴.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
‘포장되지 않은.’
그런.
“날것의 강지영, 매력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