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07화
307화. 세계 선수권(3)
천재적이다 못해 누군가에겐 파멸적인 재능을 갖췄으면서, 경기 자체를 순수하게 즐길 줄 아는 신지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괴물이었다. 그런데, 그건 강지영도 마찬가지였다.
-와, 웃네.
-저거 즐거워서 웃는 거지?
-둘 다 겁나 기분 좋은 듯…….
-딱 봐도 오, 좋아. 만족스러운데? 이런 느낌…….
-돌았냐고 진짜 ㅋㅋ
중계 카메라가 기가 막히게 한 차례의 공방을 주고받은 미야모토 신지와 강지영의 얼굴을 줌업 했다가 풀었다. 서로 웃고 있었다. 마치 역시, 안 녹슬었는데? 이런 눈빛이었다. 그런 마음이 들자, 그게 너무 좋아서 둘은 저도 모르게 웃은 거였다.
그리고 그걸 본 팬들은 기막혀하면서도, 순수하게 경기를 즐기는 두 선수가 대단하게 보였다.
-강지영도 강지영인데, 신지 쟤도 진짜 대박이네.
-뭔가 빈틈이 없어 보임. 이전의 강지영 경기 보면 확실히 좀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지영이도 여유가 없어 보임. 진짜 실력이 백중세인 듯.
-천재와 천재가 붙으면 저런 느낌이군요.
-아 뭔가…… 자괴감 느껴지네요 ㅋㅋ 내 유도 인생 10년이 막 부정당하는 것 같아 ㅋㅋ
-갑자기?
-선수들은 저처럼 느낄걸요? 생각해보세요. 나는 진짜 10년간 죽어라 했는데, 매일 개인훈련까지 해가면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세계 대회 한번 못 나가봤는데, 쟤는…….
-스탑! 그렇게 생각하면 쟤들 빼고 전부 접시물에 코 박아야 하니까, 우리 그냥 저건 외계인이라고 생각합시다.
-……하아.
-ㅎㅎ 릴렉스, 릴렉스!
팬들이 급히 한 현역의 급발진을 막았다.
멘탈이 터지는 저런 급발진은 막지 않으면,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테니 바로바로 막는 게 좋았다.
그리고 팬들은 말은 안 하지만 정말 신기해했다.
단순히 경기 영상인데도, 천재성이 진짜 적나라하게 보였다. 선수가 보는 강지영은, 선수가 보는 신지는 절망적인 인간들이다.
그냥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실력을 갖춘 게 진짜 적나라하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꺾이는 실력이란 게, 둘의 실력이었다. 이것도 참 재밌는 게, 예전 강지영은 좀 해볼 만한 느낌이 드는 선수였다. 잡아봐도, 경기를 봐도 잘하면 이길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선수였다. 그런데 제대로 집중하고 경기를 펼치는 지금의 모습은 그냥 잡기 싸움만 하는 모습만 봐도 와 씨…… 이상의 욕지기가 절로 나올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와…… 틈이 없다.
-지가 팔다리가 긴 걸 알고 그걸 저렇게 제대로 이용해 먹네.
-보통 자기 장점이 뭔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얘는 다 알아. 그리고 다 쓸 줄 알아.
-저렇게 자기 자신에 관한 연구가 끝나 있는 선수도 보기 드문데…….
-가끔 얘가 세계적으로 너무 유명한 인간이라서, 선수로서의 진면목을 까먹긴 함. 얘, 솔직히 연기력보다 유도 실력이 훨씬 좋은 친구임.
-ㅇㅇ 연기력은 아무리 좋게 봐도 중에서 상이지. 배역에 어울리긴 하지만, 그게 막 세계를 연기력으로만 씹어먹을 정도로 압도적이진 않잖음.
-그런데 유도 실력은 세계를 씹어 드신다?
-인정 아님? 지금 저런 모습도 상대가 일본에선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는 미야모토 신지니까 저런 거지, 다른 선수들이었음 우리 경기 매우 편안하게 보고 있었을 거임.
-음…… 인정.
-그렇긴 하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세계적인 스타가 된 건 솔직히 몇 개의 사건 사고 때문인지 연기력 자체로 올라간 건 아니잖아. 그런데 유도는 다르지. 이건 진짜 강지영 실력이고.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경기나 봐라.
-맞아요. 경기나 봐요 우리 ㅎㅎ
-씹…….
-ㅋㅋㅋㅋ
강지영에 관한 파악은 정확했다.
배우로서의 지영은 인기는 선수일 때보다 수십, 수백 배는 많지만, 실력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운동선수일 때는 그와는 정반대다.
-아, 이거 시합 쉽게 안 끝나겠네.
-이전의 둘의 경기도 그랬어요. 기본 10분 이상은 생각해야 함.
-아따…….
유도의 경기 시간은 고작, 4분.
그 4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서로 지도 하나 없고, 점수도 하나 없는 상태로 끝났다. 그리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들어갔다.
* * *
지영이 피지컬에서 가장 타고난 것은, 길쭉한 신장도 신장이지만 그것보다 더 타고난 건 체력이었다. 지영은 체력이 좋았다. 황금세대 중에 가장 체력이 좋은 임효중과 비교해도 베스트 컨디션일 때는 그리 밀리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그래서 제대로 호흡이 터졌을 땐, 정규시간 4분을 아무리 격렬하게 해도 크게 지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4분, 고작 4분 경기 후, 지영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다듬고 있었다.
‘너무 달렸나?’
후우, 후우.
호흡이 이렇게까지 틀어졌다는 건 그만큼 격렬하게 시합했다는 뜻인데, 뭐에 홀린 것처럼 공방을 주고받다 보니 이제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호흡 조절은 거의 본능에 맡겨놓고, 미친 듯이 움직였다.
신지의 기술은 매워도 너무 매서워서 조금만 방심해도 날아간다. 그걸 경계하면서 경기를 치르다 보니 정신력 소모도 만만치 않았다.
1회전.
10시 첫 게임이다.
그런데 경기장은 마치 결승전의 고요함처럼, 강렬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본래 경기장 두 개, 혹은 네 개에서 경기가 이어지고, 승패가 나면 다른 경기장은 신경 쓰지 않고 쭉쭉 이어지는 게 보통인데, 이미 예선 1경기가 끝났는데도 다음 선수들이 들어서지 않았다.
이건 심판이고 선수고 전부 아직 끝나지 않은 73의 1경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경기를 방해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도복을 고쳐 입으며 지영은 그걸 눈치챘다.
조금은 고마웠다.
주변의 소음, 소란 없이 경기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후우…….”
띠를 다시 풀어 천천히 고쳐 매는 동안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자신과 비슷하게 숨을 헐떡이던 신지도 가슴의 기복이 가라앉은 걸 보니, 체력에 역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주르륵 흐르는 땀을 훔쳤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풀려 시야를 방해했다.
‘아, 머리를 좀 자를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치고는 긴 장발은 유도할 때 당연히 걸리적거렸다. 그래서 매일 운동할 때마다 자르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지 않은 건. 아니, 못한 건 아직 나의 무사님 촬영이 남아 있어서였다. 극 중 재는 상당한 장발이다. 뒷머리야 어떻게든 붙이면 된다고 해도, 전체적인 길이가 짧아지면 가발을 써야 하는데 그건 당연히 위화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계약서에 아예, 길이를 유지할 것. 이란 조건 사항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자르면?
당연히 계약 위반이었다. 그리고 작품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거고. 미술, 분장팀이 어떻게든 해결하겠지만 애초에 그러지 않으면 되는 문제라, 지영은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시합인 지금은 질끈 묶었지만, 그래도 거친 동작에 조금씩 풀리면서 불편하긴 역시 불편했다.
하지만 심판이 하지메! 경기를 재개시키자 그런 불편한 생각은 씻은 듯이 날아갔다.
‘집중!’
속으로 외친 그 한마디가 다시 지영을 경기에 몰입시켰다.
연장전에 시작.
0초로 떨어졌던 시간이 다시 1초가 되며 역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악! 기합을 넣은 신지가 다가왔다. 지영은 상체를 살짝 숙인 자세로 돌아갔다. 이제부터는 체력도 신경 써야겠단 생각 때문에, 이전에 보였던 파이팅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세가 줄어든 건 아니었다.
잡고, 뜯어낸 다음 빗당겨치기 모션을 넣는 신지. 지영은 그걸 옆으로 빠지며 끌려갔다. 그러자 신지는 얼른 자세를 풀었다. 지영이 나가면서 모두걸기를 치면 피하는 게 힘들기 때문이었다.
카운터.
어떤 방향에서도 카운터가 들어오니, 신지는 기술을 걸 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반대로 지영은 카운터를 칠 상황 자체가 많이 나오지 않다 보니, 역시 경기를 풀어가는 게 쉽지 않았다.
후우.
숨을 다듬은 지영은 이번엔 먼저 움직였다.
어깨 깃을 잡자 뒤로 빠지면서 소매를 잡고 뜯어내려는 신지. 지영은 그걸 반사적으로 느끼며 들어가서 모두걸기를 쓸었다.
퍽!
부웅!
제대로 쓸렸다. 하지만 쓸려서 몸이 뜸과 동시에 자세를 틀어 앞으로 털썩 떨어졌다. 아깝긴 했는데, 지영은 이 정도로 이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굳히기를 잡을까 하다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단 생각에 그냥 뒤로 물러났다.
맛테!
짧게 붙은 것 같은데 또 벌써 1분 가까이 지났다. 이런 경기는 확실히 시간이 금방금방 지났다.
고개를 돌려 다시 신지를 확인한 지영은 후우, 숨을 다듬으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이미 밖에서 사이드에서 지시가 멈춘 지는 한참 됐다. 두 선수의 기량이 워낙에 절정이라서, 괜히 무리한 요구를 했다가 게임이 터질 수도 있단 생각을 했는지 양쪽 다 그저 잠잠했다.
하지메!
시합 재개.
신지가 빠르게 다가왔다.
둘 다 반칙 하나 없는 상태라 지도를 받아도 게임이 끝나는 것도 아니지만, 지영에게 유효기술을 빼앗겼단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공격적으로 나왔다. 지영이 다시 긴장을 조였다. 웬만한 상대는 그냥 무시해 버려도 되지만, 상대는 무려 신지다. 제대로 걸리면 어? 하는 순간 천장을 보게 만들 실력자였다.
현대 유도는 참 어렵다.
상대가 공세면 보통은 조금 물러나는 게 정상인데, 그렇게 하면 수비적이라고 반칙을 준다. 이런 말이 어울릴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마치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하는 것처럼 물러나지 못하게 한다.
골 때리는 건 복싱도 아웃 사이드로 열심히 빠져도 반칙을 주진 않는다.
그 자체로 전술로 인정받는다. 아예 때리지 않고 등 보이고 도망 다니는 경우는 다르지만. 격투기에서도 수비적인 운용을 문제 삼진 않는다. 인파이터, 아웃파이터, 하는 개념이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유도는 그걸 못하게 막아놨다.
아 지랄! 도망치지 말고 그냥 계속 붙으라고!
이런 느낌의 경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극히 공격적인 스포츠. 그래서 전략 전술 같은 걸 짜도, 시합 때 제대로 써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열심히 짜와도 경기는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못해도 90% 이상이기 때문이었다.
아주 소수, 남은 10%를 자기 생각처럼 풀어가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보통 체급을 제패했다.
실력자, 강자라고 불리는 이들.
지영은 당연히 그 안에 들어갔다. 아니, 그들 사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지영은 연장전 돌입 2분 정도가 지나자, 신지의 노림수를 겨우 깨달았다. 신지는 지금까지 업어치기, 발기술. 혹은 발기술 업어치기로 연결되는 기술과 소매만 잡아 꽂는 빗당겨치기만 구사했다.
‘단 한 번도 허리기술을 쓴 적이 없어.’
쓰려고 하는 모션조차도 넣지 않았다.
이전의 영상을 봤을 때, 허리기술 사용 빈도가 거의 50%가 넘어갔는데 말이다. 그 말인즉슨, 그냥 기회가 오면 찬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지영이랑 할 때는 한 번도 기술을 넣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버릇처럼이라도 기술을 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지금까지의 자세도 허리기술을 걸 수 있는 자세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그때마다 신지는 거리를 벌려서 역시 발기술, 업어치기 연계나 빗당겨치기 쪽만 노렸다.
‘마치, 내 머릿속에서 허리기술을 없애려는 것처럼…….’
실제로 먹히고 있었다.
지금 깨닫기 전까진 말이다.
지영은 정말 이걸 불쑥 깨닫기 전까진 신지가 허리기술을 구사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전의 시합에서는?
‘허벅다리도 차고, 허리 채기도 썼었고.’
모든 기술을 좌우로 구사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직 업어치기와 발기술, 빗당겨치기만이다. 그래서 정말 지영의 머릿속에서 허리기술 경계가 사라졌었다. 진짜 그렇게 사라졌다가, 지금 다시 생겼다. 지영은 순간적이었지만 이게 신지의 노림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 번.
제대로 잡고 채든 뽑든, 한 번이면 게임은 끝난다. 그 한번을 위해 신지는 지금까지도 공을 들이고 있었다.
지영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맞붙은 순간 잡기 싸움을 걸다가, 덮치듯이 달려들어 깊게 등 깃을 잡았다. 이렇게 되면 신지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등 깃을 잡게 되고, 양쪽 다 허리기술을 차기 아주 좋은 포지션을 거의 동시에 잡게 된다.
이렇게 서로 등을 잡고 있으면, 유도 선수에겐 눈앞에 특급 한우를 차려 놓은 것과 같았다.
차고 싶다.
이건 차야 한다.
허리후리기든, 허벅다리든.
제대로 채는 순간 탄산보다 짜릿한 쾌감을 줄 기술을 넣고 싶어진다. 그것도 그냥 조건반사적으로.
기술을 걸기 애매하더라도, 간은 무조건 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역시.
‘맞네.’
슬그머니 자세를 풀더니, 가슴 깃을 잡아 밀고 앞으로 돌아 나온다. 천하의 신지가 서로 비슷하게 잡았는데도 자세를 풀고 앞으로 나온 거다. 이건 꽁무니를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에 지영은 확신했다.
노림수다.
신지는 게임 시작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공을 들여서 지영에게 허리기술 방어체계, 혹은 경계심을 지우고 있었다.
‘그리고 딱 한 번 타이밍이 오는 순간.’
허리 채기든 허리후리기든, 아니면 가슴 깃 잡고 찍어 허벅다리를 차든, 분명 뭐든 한 방에 결정타를 넣을 생각 같았다. 그래서 지영은 그 타이밍을 줄여주기로 했다. 기술 방어에 있어, 업어치기와 발기술을 조심하는 모습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른 척, 그냥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허리기술 방어가 사라진 척.
3분, 4분. 5분이 지났다.
신지는 집요했다. 완벽하게 숨통을 물어뜯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 짐승처럼, 지영이 조금씩 풀어 놓은 미끼를 계속해서 무시했다. 하지만 투+ 한우보다 맛나 보이는 먹이가 계속해서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천재의 경계심에도 결국 한계가 왔다.
툭, 투욱.
업어치기 모션이다. 그런데 미적지근한 미묘한 공기가 느껴졌다. 지영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특히 이 방식, 허벅다리 장인 임효중이 찍어 찰 때 자주 쓰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이건, 무조건 찍어 차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툭 채서 업으려던 것처럼 굴던 신지가 그대로 깊게 들어와 강하게 매트를 찍었다. 그리고 허벅다리를 차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 지영은 두 다리를 땅에 착, 밀착시킨 상태였다.
“아.”
외마디 탄성을 흘린 신지의 몸이 부웅 떠올랐고, 콰앙! 지영의 카운터 백드롭이 작렬했다.